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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시기 May 28. 2021

[쿠오바디스, 아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습니까?

다시 되물어지는 질문의 힘

* 다음 리뷰는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이다 셀마나기치 (야스나 두리치치 분)는 보스니아 내전의 한가운데에서 활동하는 UN군 소속 통역관이다. 영화는 그녀의 남편과 두 아들이 자리에 앉아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 아이다를 빤히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다는 굳센 의지와 감정적 버거움이 공존하는 양면적인 얼굴로 그들의 절박한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해당 장면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서사와 정서의 양 측면에서 단번에 요약하는 훌륭한 오프닝이다. 즉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중한 가족들을 구하는 데 여념이 없는 아이다의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은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철저히 무력하고, 오직 UN과의 연결 고리가 존재하는 아이다만이 위태로운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가족들의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보였던 아이다, 나아가 그녀의 믿음직한 자구책으로 기능해야 할 UN 역시 실질적으로 아무런 대응 능력을 가지지 못했음에 있다. 이는 아이다의 역할이 타인의 말을 언어만 바꾸어 그대로 전달하는 통역관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녀 자신의 주체적인 권리는 완전히 배제되어 버리는 까닭이다. 카레만스 대령 (요한 헬덴베르크 분)이 이끄는 UN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전장을 직접 관할하는 장교들은 상부의 결정을 거듭해서 되뇌일 뿐이다. 그들에게 적극적인 방어수단이라거나 믈라디치 (보리스 이사코비치 분)의 군대를 저지할 만한 실질적인 무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 사회는 막무가내로 폭주하는 세르비아의 눈치를 보느라 마땅히 수행해야 할 평화 유지 의무를 방치했고, 버려진 사람들에게 남은 선택이라곤 막막한 현실을 등지고 도피하거나 적들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중간자, 혹은 메신저의 비애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영화의 주제를 확장해 보자면, 이 역시 거대한 시스템과 그 앞에 선 무력한 개인들의 비극이다.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양자 사이에서, 언제나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압도적 약자로서 개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십니까, 아이다>라는 영화의 제목은 그 질문의 거친 의역이자 작지만 확고한 소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아이다의 행적을 이야기의 주된 뼈대로 차용하고 있어 그렇지, 한 발짝 물러서 보면 사실상 앞선 질문은 스레브레니차의 시민들 모두를 객체로 삼고 있다. 평범한 다른 시민들과 다르게 UN에 소속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아이다가 얻어낸 유효한 차이는 결국 아무것도 없다.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남편과 두 아들은 학살 당했고,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가족 중 유일한 여성인 그녀만이 모질게도 살아남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라는 질문은 영화가 생략한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로소 다시 시작한다. 마을의 남성들이 끔찍하게 희생되고 남겨진 여성들, 아이다를 포함한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에게 영화는 앞으로 나아가게 될 목적지를 묻는다. 참혹한 비극을 뒤로 하고 이제 당신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아이다의 대답. 전쟁이 끝나고 그로부터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듯 보이는 추운 겨울날, 아이다는 다시 스레브레니차로 돌아간다. 가족들과 함께했던 집을 되찾고, 전에 그러했듯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영화의 끝을 장식하는 학예회 장면, 카메라는 무대 위에 선 아이들과 객석에 앉은 어른들을 교대로 비춘다. 여기에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여성들과 학살을 자행했던 남성들이 평화로운 표정으로 뒤섞여 다음 세대의 몸짓을 구경하고 있다. 과연 해답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뿐인가. 이전 세대를 구속했던 혐오와 죽음으로 얼룩진 비극의 사슬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앞으로의 주인공이 될 다음 세대에게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장래에 대하여 희망을 거는 것. 무력한 메신저로서의 지난 날을 뒤로 하고 다음 세대의 교육자로서 그들이 가야 할 곳을 인도하는 것.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재, 관객을 똑바로 마주 보는 이전 세대의 결연한 얼굴을 보고 현 세대의 보스니아인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분명 지금은 그 때와는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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