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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시기 Jun 23. 2021

[화이트 온 화이트] 이토록 더러운 색깔

백색의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백색의 사람들

[화이트 온 화이트]는 여느 보통의 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화법을 취한다. 서사 대신 이미지의 나열을 통해 보다 간접적인 의미 전달 방식을 택하고 있어 관객들이 영화에게 바라는 일반적인 감상을 기대한다면 꼼짝 없이 배신 당하기 십상이다. 영화가 끝나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이 이 영화를 국내에서 개봉할 마음을 먹은 수입사에 대한 경이감이었으니 어련할까.


영화의 영제목 'White on white' 를 쓰여진 대로 직역하면 '흰색 위의 흰색'이 된다. 그리고 영화는 정말 억척스럽게도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오롯이 구현한다. 순백의 눈 덮인 땅 위에 발을 딛고 선 백인들. 그들의 행위와 그 속에 담긴 본질, 곧 허구의 이상에 빠져 뒤틀린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꾸만 터져 나오는 추악함을 느릿하게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뼈대는 흰색 땅으로 일컬어지는 환경적 요인과 그곳에 도착한 백인들의 존재라는 인종적 요인의 두 가지로 압축된다.



영화는 시작함과 동시에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땅의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한다. 장소를 바꾸어 얼마간 지속되는, 일견 압도적인 공허와 적막. 러닝타임이 지속될수록 새하얀 땅의 의미는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는 직관적 범주를 벗어나, 생명체가 적을 두고 생존하기 위한 가장 원시적인 단계의 무대로서 일종의 '서식지' 의 뜻을 내포하는 비유로까지 확장된다. 이리도 척박하기 짝이 없는 땅에는 이미 무리를 지어 터전을 확립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곳에 당도했는지 모를 백인들은 서서히 메마른 땅을 정복해 나간다. 서양식 집을 짓고, 울타리와 도로를 만들고, 원주민을 죽여 귀를 자른다. 모든 일의 배후로 지목되는 '포터 씨'는 결국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아니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공동의 지향성을 향해 백인들은 오늘도, 내일도 총을 쏘고 술을 마신다.



시놉시스만 보면 마치 [로리타]를 연상케 하는 자극적인 소재가 펼쳐질 것 같지만, 막상 영화 속에서 개별 인물들의 행위와 그들 간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매우 불친절하다. 실제로 영화의 주인공격으로 등장하는 페드로가 지주 포터 씨의 신부가 될 어린 소녀 사라에게 유별난 관심을 가지는 모습들이 묘사되긴 하나, 그마저도 초중반부의 몇 장면에 그친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인과가 생략되어 있고, 특정 사건의 진행을 일관되게 서술하기보다 단발적인 정보의 제시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렇듯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이입을 의도적으로 절단함으로써, 영화는 어느 특정한 인물이 아닌 백인이라는 인종 집단 전체를 주된 주체로 상정하고 끊임없이 공격한다. 원인 모를 구역질을 한다거나, 눈밭에 죽은 듯 처박힌 채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우악스럽게 서로의 몸을 탐하면서도 정작 얼굴에는 역겨운 표정이 떠오르며, 된통 맞아 코가 깨진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구한답시고 아직 어린 아이의 몸을 피사체로 삼아 보는 이가 불쾌할 정도의 설정을 가미하거나, 고운 살결이 아름답다며 강제로 원주민의 몸을 만지고 벗기기도 한다. 마치 스스로의 추악함을 감당하지 못해 발생한 균열 사이로 검은 액체가 새어 나오는 것만 같다. 그렇게 온통 흰색이라 칭해지는 배경과 인간은 자꾸만 더럽혀진다.



캐릭터의 배제라는 전반적인 흐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명목상 페드로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는 아마도 사진가라는 직업과 아름다움에 대해 광적으로 집착하는 면모가 백인들의 만행을 가감 없이, 동시에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내려는 영화의 핵심 논지에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당히 충격적인 형태의 엔딩을 보고 나면, 앞서 지속적으로 묘사했던 균열의 장면들이 사실상 이 순간을 완성하기 위해 은밀하게 쌓아 올려졌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사진은 철저한 연출의 결과다. 찍혀지는 이들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오로지 찍는 사람의 목적대로 구성되는 인위적인 장면. 널브러진 원주민의 시체 위에 발을 올리고 서서 이리 저리 구도를 바꿈으로써 마침내 백인에 의한 아름다움이 온전하게 구현되는 순간, 영화는 사진기에 내어주었던 프레임을 터뜨리듯 흰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나는 그 새하얀 순백의 색깔이 너무나도 더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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