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자차 Feb 13. 2023

덴버 기행기

1일 차 - 

새로운 하루가 열릴 때는 그날까지의 역사를 모두 망각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태아의 신체가 되기까지. 역사는 매일매일 재탄생하는 것처럼.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하고 보다 더 잘 잊어야 한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도 태어나서 처음 마시는 커피처럼, 오늘 바라본 아름다움은 전에 본 적 없는 태초적 이미지라고 세뇌하는 것. 

여행은 이중적이다.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이미지를 접목시키고 대조하고 추억하는 비유의 여행이 있다면, 진공 상태에서 잉태하는 하나의 이미지 만을 쫓고 향유하려는 원초적 여행이 있다. 

우리의 정신은 그래서 지치고 혼곤해진다. 절반은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다른 절반은 끊임없이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이 둘의 전쟁은 인간의 숙명이다. 우리는 매일 가장 늙으면서 가장 유아적이다. 


무용한 것들은 실은 제일 위대한 것이다. 무용함이란 무엇일까? 그건 자본 밖에 있는 무엇이다. 무용의 집합론. 무용이 A고 자본이 B라면 (AUB) - B를 해야 자본 밖의 무용을 적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한 사람의 내부에는 이상과 일상과 인상이 함께 섞여서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간다." - 김언



2일 차 - 

Garden of the Gods에 갔다. 신들의 정원. 이름만큼 매혹적인 돌들. 신이 하나하나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작품들. 하찮은 우리는 돌들 사이를 맴돌며 당찬 사색에 잠긴다. 

트레일을 따라 걷던 중, 멕시코에서 온 대가족이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한다. 10명 정도 돼 보이는, 꽤 큰 가족이었다. 

나는 가족을 장엄한 암벽 사이에 절묘하게 끼워 맞추고 사진을 찍었다. 가족 안에서 삼촌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은 남자가 탄성을 내지른다 - "we look like we're in a portrait!" 

나는 힐끗 웃으며 유유히 발길을 재촉한다. 누군지도 모르는, 다시는 볼 수 없는,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얼굴들.


사건을 중심에 놓고 사람을 지워버린다. 

세계를 뜰채에 넣으면 사건만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 나머지는 모두 부산물이다. 사건 만이 사실에 가장 근접한 무엇이다. 

우리는 사건을 기록하려 한다. 신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건이 우리 위에 있으니 기록으로 하여금 사건을 숭배한다. 진실을 찬양한다. 

그렇게 사건과 사건이 모이면 무엇이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점점 더 작아지고, 인류의 소실점이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다. 

인간은 사라진다. 사건은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니 너는 사건 그 자체가 되었다. 


"사라지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 가를 고민하는 인간."



3일 차 - 

다시 또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채근하고 거슬러 올라가서 그것의 기원, 혹은 분기점이 무엇이었는지 언제나 염두해둬야 한다. 

그러나 기원 이전에는 또 다른 기원이 있을 것이며, 우리는 결국엔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시작의 방 안엔 끝 밖에 보이지 않고, 너라는 품 안엔 네가 없고 우리라는 단어 안엔 혼자만이 있다. 

부재가 잉태한 부재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라서, 그렇게 무언가가 되고 싶고 무언가로 존재하고 싶은 마음은 결국엔 폐허를 낳게 되고. 


그래서 여행하고, 그래서 소멸한다. 부재가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내가 부재의 아귀로 들어가겠다. 마치 성경의 조나처럼. 부표 같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세계를 둥둥 떠다닌다. 아무것도 아닌 커피를 마시며, 아무것도 아닌 책을 읽으며, 아무것도 아닌 인스타그램을 보며, 아무것도 아닌 허기를 달래며, 아무것도 아닌 아무 나를 생각 하며,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서서히 사라져 간다. 

역사가 나를 기억하는 이미지 또한 아무것도 아닌, 그래서 모든 것일 수 있는 한 장면이다. 


"예술은 충만한 허구이다. 나는 공허한 실체다."



4일 차 - 

지내고 있는 호스텔이 아무래도 빈대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 같다! 그 들의 습격을 처음 받은 것은 2017년 뉴욕의 여름이었으니, 빈대들은 확실히 여름의 곤충이다. 

2017년 이후론 별 탈 없이 지냈는데, 팔과 등, 다리에 생긴 빨간 반점들을 보니 이 자국들은 빈대들의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가려운 것보다는 시각적, 심리적 거슬림이 더 크다. 거울을 보니 빨간 점들밖에 안 보이고, 아무래도 요즘 피부 재생 능력이 약해졌다 보니 이 점들은 안 없어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 따위도 생기고. 

하지만 몇 년 전 발발했던 빈대 습격 사건도 몇 주가 지나니 잠잠해졌듯이, 이번 사태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수습되리라 믿는다. 

이때 생각나는 문장 하나 - 여름은 청춘의 계절뿐만이 아니다. 여름은 모기, 곤충, 흉터, 물집, 도드라기, 상처, 독의 계절이기도 하다. 

몸 구석구석에 물린 자국들을 보니 내가 왜 여름을 추상적으로만 좋아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5일 차, 혹은 덴버 에어팟 구출 작전 - 

화요일 날, 진대들이 득실거려서 다른 에어비앤비로 거처를 옮기는 도중, 이전 비앤비에 에어팟을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비앤비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하청업체 직원이 내가 쓰던 베개 밑에 두었다고 다음날 찾아가란다. (이때 돋아난 의심 - 왜 베개 밑에 두었을까? 조금 더 보안이 잘 된 곳에 두는 게 났지 않았을까?) 


다음날 가 보니, 베개 밑에 에어팟은 보이지 않았다. 방구석구석을 찾아봐도 에어팟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든 생각 - 누가 가져갔구나. 아니면 청소직원이 가져갔거나. 내 잘못이지... 하며 단념하고 원래 가려던 Estes Park로 향했다. 에어팟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한 것 같았다. 


그날 밤, 혹시 몰라서 에어비앤비로 한 번 더 가본다. 이 번엔 에어팟 추적 어플을 사용해 본다. 내 에어팟은 2046 Federal Blvd. 에 있다는 알람이 뜬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여긴 또 어디고. 비앤비에 묵고 있던 Tarq라는 친구가 같이 가보자고 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못 갈 이유는 또 뭐가 있겠는가. 덴버 부근에 있는 음침한 집에 도착한다. 괜히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온다. Tarq한테 허탕 쳤다고, 그냥 가자고 말을 한다. 그도 수긍한다. 

하지만 차로 돌아가던 중, 그 음침한 집 앞에 주차된 차를 본다. Maids Cleaning. 설마. 주소를 구글링 해본다. 

2046 Federal Blvd는 앞서 말한 하청업체의 본사 주소였던 것이다. 에어팟은 아직도 청소부 직원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드디어 회수했다. 

하나의 팩트를 둘러싼 의심과 거짓들... 진실을 가려내기엔 모든 것이 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다.

작가의 이전글 뉴질랜드 기행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