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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dy Sep 01. 2022

"우리의 실수로 세계가 대가를 치렀습니다."

'철의 장막'을 걷은 고르바초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8월 30일 사망했다.


2020년 구정은 선배와 함께 쓴 책 <여기, 사람의 말이 있다>에는 고르바초프의 이야기도 들어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가치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찾아보려 노력했는데, 1부 '평화를 외치다' 섹션에 냉전을 끝낸 지도자로서 고르바초프의 '말'들이 담겼다. 연설과 언론 인터뷰, 회담 회의록 등을 통해 그가 개혁개방 정책을 택하게 된 배경과 이를 국제무대에서 실행한 과정을 짚어봤다. 또 세계적 평가와는 달리 정작 고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했고, 최근까지도 강대국의 군사적 대립을 경계해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서방과 러시아의 '신냉전' 구도가 또다시 전개되는 양상이다. 고르바초프의 사망에 애도를 표했지만, 최근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을 벌인 러시아의 결정에 대해 고르바초프는 불만족스러워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BBC는 전했다. <여기, 사람의 말이 있다>에 소개된 냉전이라는 앙시앙 레짐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의 '말'을 다시 꺼내 본다.


후마니타스 페이스북




 



저는 소련과 미국이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며 연설을 시작하려 합니다. 양국은 새로운 원칙에 기반해 관계를 수립하고, 전쟁 전에 존재하던 것과는 다른 세계 질서를 만들 기회를 놓쳤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수차례 스탈린 지도부의 외교 정책을 비판해 왔습니다. 전쟁의 경험과 결과를 반영해 전후의 역사적 논리를 재평가하지 못했을뿐더러, 파시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사회주의의 승리와 동일시하고 사회주의를 퍼뜨리려 한 것은 심각한 오류였습니다.
그러나 서방, 특히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련이 군사 공격을 결코 일으킬 수 없었음에도 미국은 비현실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1939~41년에도 그랬지만 스탈린은 전쟁을 두려워했습니다. 전쟁을 원하지 않았거니와, 결코 큰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무엇보다 소련은 이미 전쟁으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국민들은 전쟁을 싫어했습니다. 사람들은 집으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핵'이라는 요소가 세계 정치에 들어오면서 엄청난 군비경쟁을 촉발했습니다. 저는 서방에서 이를 먼저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양쪽 모두 이를 이념으로 정당화했습니다. 갈등은 선과 악의 피할 수 없는 대립으로 보였습니다. 물론 언제나 상대방을 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틀림없이 수십 년에 걸쳐 양측이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우리가 저지른 실수로 세계가 큰 대가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1992년 5월 6일 미국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 칼리지,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냉전의 막을 내린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이고 최초이자 최후의 '소련 대통령'이던 그가 연단에 섰다. 1946년 3월 5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을 쓰며 냉전의 시작을 알린 바로 그곳이었다. (중략) 2만여 명의 청중이 환호하며 맞이한 고르바초프는 45분간 러시아어로 연설했다. (p.65~67)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낙후한 현실을 인정하고 '서방과 같은' 번영과 발전을 꾀하게끔 경로를 바꾸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1986년 발생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참사였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있는 체르노빌 원전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서 방사능 누출돼 50여 명이 직접적인 피해로 목숨을 잃었다. 후유증 피해는 그 뒤로도 이어졌고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환경이 파괴되면서 체르노빌은 여전히 '죽음의 땅'으로 남아 있다.

이 사고는 그 자체로 대재앙이었을뿐더러 소련의 관료 체계가 얼마나 무능하고 불투명하고 부실했는지를 낱낱이 드러냈다. 당시 중앙정부는 사고 사실을 곧바로 공개하지 않아 주민들의 대피가 늦어졌다. 책임자 처벌은 꼬리 자르기 식이었다. 나라 안팎에서 소련의 성취에 대한 믿음이,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렸다.

(p.71)





1990년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는 그에게 평화상을 안겼다. 고르바초프는 수상 소감에서 냉전이 갑작스럽게, 다행히도 전쟁이나 무력 충돌 없이 끝난 그해를 '전환기'라고 규정했다.


1990년은 전환기입니다. 부자연스럽게 분리된 유럽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일은 다시 합쳐졌습니다. 우리는 군사적·정치적 이념적 대립의 물질적 토대를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거되지 않은 중대한 위협이 있습니다. 잠복한 갈등과 이를 언제 분출할 지모를 원시적 본능, 공격성과 전체주의입니다. 소련 지도부는 개방성과 상호 신뢰, 국제법과 보편적 가치에 바탕을 두고 세계가 발전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앞으로도 지금처럼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노벨 평화상은 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며 페레스트로이카와 개혁 정치사상을 공인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73~74)




소련이라는 거함의 방향을 돌린 키잡이 고르바초프를 ‘고르비'Gorbi라는 애칭으로 부를 만큼 전 세계의 환호와 열광이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고국인 러시아에서 그의 여생은 평탄하지 못했다. 1991년 8월 공산당 강경파들이 쿠데타를 시도해 고르바초프는 사실상 감금당했다. (중략)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로 이동해 가는 과정에서 인프라는 무너졌고, 경제는 몰락해 파산 위기까지 갔고,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공위성을 띄운 강국의 위상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말하자면 고르바초프는 찌그러든 러시아의 상징이자 원인이라고 러시아인들은 생각한다.

같은 공산주의 진영이던 중국에서도 '고르바초프 열풍'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p. 75, 77)




장벽이 무너지고 철의 장막이 걷힌 지 30여 년, 세계에서 냉전의 그늘은 가셨을까? 동서 진영 대립은 분명 없다. 남아있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있지만 진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폭주에 따른 피해자들이 늘어나고, 옛 공산권 국가들의 경제적·사회적 발전이 여전히 뒤처져있다는 것은 냉전 체제와 그 종식 과정이 남긴 그늘이다. '뉴차르(황제)' 푸틴 시대에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이 깊어지자 '신'냉전'을 거론하는 이들도 많다. (중략)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987년에 체결한 중거리핵전력 INF 조약을 러시아가 지키지 않았다면서 2018년 탈퇴했다. 그러자 고르바초프는 『뉴욕타임스』에 「새로운 핵무기 경쟁이 시작됐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자랑스러운 성취가 위협받고 있다면서, 그는 '새로운 군비경쟁'을 우려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승자는 없다. 끊임없는 군비경쟁, 국제긴장, 적대감과 불신은 위험을 키울 뿐이다. 이 끔찍한 위협 앞에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멈춰서는 안 된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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