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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 Aug 05. 2021

각박한 세상 속, "결국 사람"을 말하다

모가디슈(2021)

(스포가 있는 리뷰입니다)


“진부한 장르. 진부한 서사.

탈출극을 차용하여 남북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주창할 것이 뻔한, 영화 <모가디슈>를

굳이 각 잡고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군함도>와 <베를린>의 혼합판에 불과하지 않을까.”


예고편을 마주한 뒤 들었던 첫 생각이었다.

하지만 ‘류승완’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남달랐고.

문화의 날에 개봉한 영화를 외면하기는 힘들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선, 마음속으로 '와'를 연발했다.

<모가디슈>는 이런저런 잡념들을 바로 불식시켰다.

"역시 류승완 감독"이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 작들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났듯, 류승완 감독은 진부한 장르 속에 숨겨진 진주를 찾는 능력이 특출 나다.

전형적인 장르영화 탈을 쓰고는 있지만, 류승완 감독의 손을 거치는 순간 그 흔한 용 그림에 눈동자가 찍혔다.

<모가디슈>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북한의 갈등과 화합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 해외 로케이션 촬영 등등. 영화 <모가디슈>는, 다양한 기준에서, 류승완 감독의 전작 <베를린>과 유사점이 많았다. 필연적으로 <베를린>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베를린>은 단언컨대 훌륭한 작품이었다. <베를린>을 처음 관람했을 때 개인적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는데, 액션 씬과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방식에 있어 <베를린>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마지막 하정우와 류승범 배우가 연기한 두 북측 공작원 간의 결투 시퀀스는 속도감 있으면서도 절제된 영상미를 보여줬고, 세밀한 묘사력으로 관객들은 액션 동작들을 하나하나 음미할 수 있었다. 다시 봐도 전율을 일게 하는 명장면이다. 액션씬 외에도 <베를린>은 전반적으로 배우들 간의 케미를 적절히 조화시킴으로써 각 배우들의 연기력을 극대화시켰고, 영화 상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서스펜스적 요소들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관객들의 오감을 즐겁게 했을지언정, <베를린>은 관객들의 가슴을 터치하는데 실패했다. 서사적으로 탄탄한 만듦새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전형적인 첩보물 틀 안에서 활보한 영화였다. 구태여 끼워 넣자면, <베테랑>도 마찬가지였다. 대중성이 높고 흥행적으로 성공한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당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의 순한 맛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던 이유다.

기존의 정착화된 공식을 완벽히 소화하고 거기다가 플러스알파를 더하는 능력은 류승완 감독이 최고다.

하지만 지금까지 류승완 감독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적이 있느냐 하는 물음에는 항상 물음표가 따라왔다.


개인적인 추정으로, 류승완 감독은 전작과 유사한 주제의식(남북 이데올로기)을 다루면서도 전작을 둘러싼 장르적 아쉬움들을 떨쳐내야 하는, 나름대로의 막중한 부담감을 등에 업고 <모가디슈> 제작에 임했을 것이다.




프로덕션 대작

이번 영화를 두고, 많은 평론가들은 한국 프로덕션 시스템의 발전에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영화의 분위기나 스케일이 한국 영화사를 통틀어봐도 눈에 띄었다. 스케일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디테일하고 사소한 부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관객들의 몰입감을 한층 더 높였다.


류승완 감독은 <모가디슈>를 제작하며 사실 고증에 만전을 기했다는 말을 했다.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와 가장 유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모로코 에사우이라 지역에서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하였고, 꾸준히 모래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촬영지 전체에 흙먼지를 깔았다. 작품 상에서 중요한 장면인 카체이싱 시퀀스의 사실성을 위해 90년대 초반 모델 자동차들을 유럽에서 직접 공수하였고, 동시에 고장에 대비해 매 컷마다 정비소로 차량들을 보내 철저히 관리하기도 했다. 현지 무술 연기자들을 화상으로 면접보고 섭외하여 영화 자체의 퀄리티를 높였다는 일화는 덤이다. (모가디슈 정부 경찰을 연기한 배우는 정말 압권이었다.)

류승완 감독은 '실제 사건을 다루는 영화이고 해당 사건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 사실 고증 및 재현에 더욱 집중했다'라고 밝혔다. 피나는 노력의 확실한 동기이고, 여기에 훌륭한 영화 제작 환경이 얹혀 <모가디슈>가 탄생한 것이겠다. 그러나 프로덕션의 승리로만 이 영화를 평가하는 것은 실례다. 앞서 언급한, <모가디슈>에 대해 류승완 감독이 감독으로서 느꼈던 개인적인 부담감 역시 이러한 사실 고증의 노력으로 승화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제작진들의 역량과 한국 영화 프로덕션의 발전 덕에, 제작진들이 투자한 노력은 결실을 이뤄냈다.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과의 교집합을 셀 수 없이 찾을 수 있었음에도, <모가디슈>는 이전 작들의 그림자들을 철저히 쳐냈고 류승완 감독의 '새로운'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오히려 <모가디슈> 류승완 감독의 이전 작들을 뛰어넘는 수작이 되었다고도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노력의 양이 항상 결과의 질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그 고리타분한 공식을 제대로 증명해냈다.

 


결국, 사람


전형성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모가디슈>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스킬적 요소들을 차치하더라도, 분명 이 영화는 새롭게 다가왔다.


“결국 사람” 

류승완 감독 영화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휴머니즘은 <모가디슈>에도 어김없이 드러났다.

한층 더 세련되고 설득력 있게 주장되어, 영화의 깊이를 더했다. 표층 위로는, 영화가 탈출 서사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이지만, 기실, 모든 서사 요소들은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귀결됐다.

단적으로, 남북한의 대사들이 도움을 요청하러 해외 공사로 향했다가 돌아오는, 중후반부 시퀀스는 류승완 감독이 “사람”을 얼마나 중시 여기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영화 속, 남한과 북한 대사 구성원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이후, 한국 공사관에서 오월동주하게 된다. 그러나 소말리아 반군의 위협이 거세짐에 따라, 생명의 위협을 느껴 모가디슈 탈출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남한과 북한 대사들(한신성 대사, 림용수 대사, 강대진 참사관, 태준기 참사관)은 탈출로를 모색하기 위해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를 뚫고, 각각 이탈리아 대사관 그리고 이집트 대사관으로 향한다.

이때, 카메라는 각국의 대사들이 떠난 한국 공사관을 잠깐 프레임에 잡으면서, 다분히 클리셰스러운 복선을 하나 심어 놓는다. 한국 공사관에 남은 북한 대사 구성원들의 수가 남한 대사 구성원들 수보다 현저히 많기 때문에, 대사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북한 대사 구성원들이 한국 공사관을 무력으로 점령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이러한 전략이 태준기 참사관(구교환) 입에서 나온 적이 있었기에, 관객들은 일종의 확신에 가까운 두려움을 갖고 서사 전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대사관을 찾은 한신성 대사(김윤석)와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은 남북한 대사관 구성원들을 모두 대피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고, 희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국 대사관으로 향한다.

도착한 한국 공사관. 대문이 열리면서 카메라는 북한 대사관 구성원들만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었다. 슬로우 모션의 시간은 관객들의 우려와 한신성 대사의 우려가 하나 되는 순간이었고 한 대사의 흔들리는 눈빛은 모두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예견대로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면 전형적인 클리셰를 활용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겠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이를 제대로 비튼다. 숏이 천천히 진행되면서,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한 대사의 부인 김명희(김소진)가 등장한 것이다. 한 대사도 관객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본 시퀀스에서 활용된 맥거핀스러운 전략은 인간에 대한 막연한 회의를 방지하면서도, 이념을 초월한 남. 북한인들의 동지애를 부각했다. 영화의 극적 재미를 위해 억지로 억지로 갈등을 쑤셔 넣기보다는 절제를 통해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를 고수하고자 했던, 류승완 감독의 디테일이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훌륭한 선택이었다. 만약 거기서 또다시 관습적인 클리셰가 막무가내로 등장하여 장르물의 전형성을 따랐다면, 솔직히 지루함에 영화관을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든 생각, 오히려 류승완 감독이 택한 방식이 가장 개연성 있는 연출이 아니었을까.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도록 유도하여 관객들의 심장을 부여잡는데만 혈안이 됐던 지금까지의 다른 영화들에 갑자기 의문이 든다. 뭐 일단 넘어가고.)

결국, 그러한 전략 하나로, 영화 <모가디슈>는 여태껏 나온 남북 갈등과 화합을 소재로 한 영화들 사이에서 차별화를 이뤄냈다. 영화 속 사소한 디테일과 전략의 차이는 이렇게 큰 변화이끌어낸다.  



영화 속 소말리아


류승완식 휴머니즘 색채에 기준점을 두고 영화를 관람하다 보면, 흥미로운 지점을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류승완 감독이 자신의 휴머니즘 철학을 주인공들에게만 투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는 소말리아의 모가디슈를 외부환경으로 구축하여, 탈출극에 이국적인 느낌과 긴박감을 부여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 내내 소말리아인들을 외부환경을 구성하는 파편적 요소로만 남겨 두지 않았다. 정치 사회적 문제의 발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군 혹은 정부군이 되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소말리아 사람들을 카메라 속에 적극 담으면서, 그들의 존재를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시켰다.


영화는 남측 대사관의 소말리아인 운전사가 반군이라는 설정을 넣었고, 사회적 혼란으로 초래된 소말리아 인들의 난맥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소말리아 반군 아이들의 잔혹성을 남북 대사 아이들의 순수함과 대비시키는 장면들에 긴 시간을 할애했다. 이들을 통해 영화 속 소말리아인들은 서사의 중심부로 자연스레 진입할 수 있었다. 소말리아인들이 외부환경의 구성요소라는 부차적 지위에서 점차 관객들의 감정이입 객체로 올라서게 됐던 것이다.

소말리아인에 대한 이러한 영화의 확장적 시도들은 결말부에 다다라서 절정을 맞는다.

반군, 이탈리아 공사관 경비대, 그리고 정부군들이 남북 대사관 사람들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장면에서다.


소말리아 정부군과 반군으로부터 도망 오면서, 격렬한 카체이싱을 경험한 남북한 대사관 사람들은 이탈리아 공사관 앞에 가까스로 도착한다. 그러고선 준비해둔 백기를 들고 총격을 멈춰달라고 정부군, 반군 그리고 이탈리아 경비군들에게 호소한다. 삶의 갈림길에 놓인 남북 대사관 사람들을 가운데 두고, 3개의 세력들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해당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소강 국면으로 접어드는데, 카메라는 세 개의 세력들이 형성한 대립 관계를 롱샷, 클로즈업, 하이앵글, 로우앵글을 넘나들며 고요하면서도 처절하게 보여준다.

세 개의 세력들이 각자의 권리와 주장을 내세우며 대립하는 3자 구도 장면은 묘한 삼각관계를 연상시킨다. 해당 씬에서 이렇다 할 블록버스터적 액션들이 등장했던 건 아니지만, 분명 사람들 기억 속에, 오랫동안 살아 숨 쉴 장면임에는 분명하다. 긴장감 속에서 광활함과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까닭이다.


답보상태가 유지되던 중, 3개의 세력들은 차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 북한 참사관 태준기의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그제야, 그들은 활활 불타오르던 갈등의 불씨를 잠시 잠재운다. 태준기 참사관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서, 비로소 대립하던 세력들이 남북한 사람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던 게 아닐까. 결국 태준기의 죽음을 계기로, 대사관 사람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잠시 휴전을 하자는 제안에 3개의 세력들이 합의한다. 남북한 대사관 사람들은 이탈리아 공사에서 안전하게 태준기의 장례를 치러줄 수 있었고, 버스를 타고 정부군 그리고 반군들의 경계선을 지나, 적십자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경계선을 지나가는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창밖의 소말리아인들을 바라본다. 긴장감이 무성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의 눈빛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준 소말리아인들에 대한 감사와, 전쟁 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소말리아인들에 대한 연민을 동시에 내비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그러했으리라.



<모가디슈>는 인류애적 공감대가 특정 민족 혹은 특정 공동체 안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외려, 전 인류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말한다. 주변인으로 설정된 소말리아인들이 주인공들에게 연민을 느껴 한시적 휴전에 합의하는 장면들을 삽입하여, 그들 역시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영화는, 소말리아 인들이 일방적인 악으로 남겨질 수 있었던 설정으로부터 어나, 그들의 존재감을 점진적으로 강화시키고 이해의 여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발 더 나아간다면, 같은 민족에게 총칼을 들이밀 수밖에 없었던, 소말리아인들의 현실은 남북으로 나뉘어 지리멸렬됐던 한반도의 과거를 반추하게 만든다. 영화 속 소말리아인들의 서사는 한반도와 소말리아의 현실을 일종의 평행선 상에 놓으면서, 두 국가가 공유하는 모순적인 허탈감과 비애감을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  

물론 아직은, 공동선을 추구할 의지가 모두의 마음속에 남아있음을 조용히 읊조리면서.


선과 악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이 어느덧 주류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이에 그치지 않고 모든 이의 마음속에 여전히 빛나고 있는 공동선을 조명하는 <모가디슈>의 철학은 분명 색다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모가디슈>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장르적 전형성을 완전히 탈피.




휴머니즘적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고 해서 막연하게 희망만을 강변하면서 영화가 끝났던 것은 아니다.

케냐 공항에 도착한 남북 대사관 구성원들은 공항에 남북한 정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함께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공항 밖으로 나가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급하게 나누고 각 국의 공항버스로 분리되어 탑승한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는 동포애로 하나 될 수 있었지만, 종국에는 허상뿐인 이념의 차이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장면이었다. 카메라 구도 역시 이러한 '개인으로서의 개인'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 사이의 괴리를 강조한다. 하이앵글 롱샷으로 찍은, 멀리 떨어진 두 미니 버스의 구도는, 함께 탈출 서사를 이룩해낸 두 대사관 구성원들의 처연하면서도 아쉬운 감정을 대변했다.


각자의 버스를 타고 멀어져 가는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모가디슈>의 하이라이트로 기억될 것 같다.

용 그림에 점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한국 영화의 새로운 도약



"밀당의 귀재."


긴박함과 슬픔을 적절히 밀당하며 관객들을 붙잡는 데 성공한 영화 <모가디슈>에 감동하며 떠올린 어구다.

영화의 구성요소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영화를 보며, 넓은 포장도로를 달리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껴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단순하게 재미 위주의 일회성 영화로 끝맺지도 않았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싶어 했던 감독의 의지와 욕망을 확인할 수 있었던 영화였다. 동시에 영화는 깔끔한 마침표로 과잉 표출될 수도 있었던 욕망과 의지를 조용하게 눌렀다.

한마디로, "기존의 류승완 감독의 강점들과 새로이 선보인 시도들이 적절히 융화된 영화"였다.


이번 류승완 감독의 영화 <모가디슈>는 메시지적으로, 서사적으로, 양식적으로 모자람 없이 관객들의 가슴을 터치했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침체를 겪고 있는 극장문화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한국 영화계가 쏘아 올린 첫 번째 신호탄이 <모가디슈>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다행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발판은 이제 제대로 놓였다. 잠시 주춤했던 한국영화는 다시 비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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