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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 May 10. 2021

누가 이 영화를 잔잔하다고 했는가?

노매드랜드(2021)

<스포 주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작성된 리뷰입니다. >


"House가 아닌 Home을 향해서" - 이지혜 영화 저널리스트

"욕망 대신 영혼을 채우는 삶" - 심규한 기자

"공동체 언제 어디서든 존재가 가능한 희망의 이름" - 허남웅 평론가


<노매드랜드>를, 주인공 '펀'이 과거의 상처를 떨쳐내는 이야기로, 즉, 일종의 극복 서사로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또 한편으로는 희망, 영혼, 삶과 같은 긍정적인 키워드에 방점을 찍고, 잔잔하면서 찡한 감동을 주는 영화로 분류하는 사람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한데 왜인지. 처음 이 영화를 관람했을 때 정반대의 느낌을 받았다. 처음엔 영화 속 감정에 제대로 이입하지 못했던 탓이라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앞자리 사람은 스마트폰을 두세 번 씩이나 확인하여 나의 집중력을 흩트려 놓았고, 설상가상으로 영화 시작 전에 콜라를 너무 많이 마셔 영화 중간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러 가서 영화를 찍고 온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사람이 가장 없을 월요일 점심시간에 영화표를 예매했고 빈속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물도 가급적이면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영화관에 입성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았던 그 감정들을 체험하고 그들과 함께 공감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물론 리뷰 제목에서도 스포 했듯이 철저히 실패했다. 도무지 희망, 영혼, 선택의 키워드로 영화가 읽히질 않았다. 불안하고 잔인하고 슬프고 암울한 느낌만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내가 문제였을까? 내 시선이 너무 편협해서였을까? 혹시 내가 놓쳤던 부분이 있었던 게 아닐까? 며칠을 고민하며 그냥저냥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리뷰를 쓸까도 했지만


내 마음대로 리뷰를 써버렸다.

써버렸다는 표현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리뷰가 내 브런치 채널에 있었나 싶다.

어쨌든 그렇다. 이 리뷰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고, 오류를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는 리뷰다.  


영화<노매드랜드> 스틸컷


무엇이 영화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영화<노매드랜드>에서는 독특한 프레임 구도의 반복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주인공 '펀'을 프레임 정중앙부에 위치시키는 구도다. 해당 구도의 특별함을 이해하기 위해선 프레임 예술의 '3 분할 법칙'을 알아야 한다. '3 분할 법칙'이란 회화예술에서부터 이어진 하나의 고착화된 법칙으로, 개별 화면을 4개의 선으로 9등분 하게 되면 4개의 교차점이 생기는데, 그 4개의 교차점 부근에 피사체를 위치시켜야 화면을 보는 수용자들이 안정감을 느낀다는 이론이다. 정석으로 여겨지는 이론이다 보니, 대부분의 영화들은 이에 근간하여 화면을 구성한다. 물론, 한사코 따라야 하는 법칙은 아니라서, 3 분할 법칙에 거스르는 숏을 중요한 시점에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감독도 적지 않다. 영화<노매드랜드>는 해당 법칙을 위배하는 숏들을 꽤나 높은 비중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특히 주인공 '펀'을 잡는 숏들에서 이러한 반골적인 프레이밍이 노골적으로 그리고 빈번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3 분할 법칙을 위배함으로써, 클로이 자오 감독이 의도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3 분할 법칙을 준수하는 목적은 구도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반대로 3 분할 법칙을 거스르면, 필연적으로 구도적 불안감이 야기된다.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자오 감독이 영화 속에 불안감이라는 감정을 심어놓기 위해 해당 구도를 애용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다. 영화 곳곳에 깔리는 의미심장한 느낌의 음원 트랙, 핸드헬드 카메라를 연상케 하는 격정적 흔들림, 등과 같은 다른 양식적 요소들 역시 '불안정한 분위기 조성'이라는 목적으로 귀결되는 연출 기제들이다.

결국, 꽤나 성공한 듯 보인다. 러닝타임 전체를 관통하는 불안감 덕에, 영화 속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황홀감이나 압도감을 주기보단 초라하고 쓸쓸한 정서만을 남긴다. 펀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근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어떠한 낙천적 해석들을 경계하게 된 원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속에 만연한 불안감. "감독이 씁쓸한 느낌의 해피엔딩을 의도했던 게 아닐까?"라며 억지에 가까운 정신승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의구심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과연 영화<노매드랜드>는 단순히 과거의 짐을 덜어놓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전향적인 내러티브에 불과할까?

영화<노매드랜드> 촬영 현장


왜 영화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영화의 중반부에서, 펀은 노매드의 삶을 살다가 RV 차량이 고장 나, 이를 수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수리비용이 만만치 않게 청구되는 바람에 펀은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마지막 선택지인 친언니의 집으로 향한다. 펀의 언니는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펀을 살갑게 맞이하고 함께 집에서 바베큐 파티를 즐긴다. 그런데 그때, 파티에 참석한 한 남성이 펀의 삶을 두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이에 펀은 영화 상에서 거의 처음으로 분노의 감정을 내비친다(데이브가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접시를 깨는 순간을 제하고 말이다).

노매드의 삶을 사는 펀을 비하하는 발언이었기에, 분노하는 펀의 모습이 그리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펀은 노매드의 삶을 살면서 겪었던 어떠한 수모 앞에서도 무심하거나 웃어넘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굳이 그 남자의 말에만 발끈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의 말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펀의 분노 스위치를 건드렸다는 소리인데, 펀을 분노케 했던 그 스위치는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무언가를 타인이 들춰내고자 할 때, 이러한 자기 방어기제를 드러내곤 한다.

펀이 숨기고 싶어 했던 그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선 펀의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애초부터 펀의 꿈은 노매드가 아니었다. 하지만 외부환경으로 인해 불가항력적으로 노매드의 삶을 살게 되었고, 펀은 현실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와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좋은 노매드 친구들을 다수 사귀고, 새로운 사랑이 될 수 있었던 데이브도 만났다. 또 자연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만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발적 선택에 의해 노매드가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펀의 마음속에는 정주의 삶,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재 내에서의 삶 그리고 제도권 내에서의 삶에 대한 욕망이 존재했다. 단적으로 노매드 삶을 정리하고 가족 공동체 안에서 대우받는 데이브의 상황을 부럽게 바라보는 펀의 시선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정확히 한 장면을 꼽자면, 데이브가 자신의 아들과 피아노를 치며 평화롭게 밤을 보내는 모습을 펀이 계단에서 바라보는 씬을 언급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상하다. 펀은 영화 내내 이웃주민, 언니, 그리고 데이브의 함께 살자는 제안들을 거절한다. 체재로의 복귀를 내심 갈망하는 펀이 체재로의 복귀를 돕는 제안들을 일관성 있게 거절한 것이다. 혹자는 펀의 RV 차량이 펀의 새로운 HOME이 되었기에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주장하겠지만, 이후 노매드의 삶을 재개한 펀의 표정과 행동에선 일말의 개운함이나 떳떳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이 펀이 어떠한 개인적 가치관이나 굳건한 의지로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펀이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 진짜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영화 내내 지속됐던 펀의 자기 합리화 행동을 떠올리게 했다.

펀은 영화 내내 노매드 삶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펀은 주변(자본주의 체재 내에서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서 건네는 수많은 걱정들에 "나는 괜찮다"는 식으로 자신의 삶을 강변한다. 일종의 자기 합리화다. 펀의 자기 합리화의 동인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다만, 그 기저에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노매드의 삶이 자신의 인간다움을 포기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남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합리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펀의 자기 합리화가 지속되어 펀이 이를 내재화하였고, 궁극적으로 체재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주변인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봤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동안 남들과 자신에게 습관처럼 주입했던 합리화 논리를 스스로 부정하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영화<노매드랜드> 스틸컷

노매드 삶에 대한 합리화는 비단 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영화 속, 모든 노매드들의 삶 속엔 비애 섞인 합리화와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다. 영화 속 노매드들은 그들의 삶을 선택이라는 단어로 수식하곤 한다. 그러나 전후 PTSD로 인해 노매드가 된 남자, 동료의 죽음을 마주하며 노매드가 되기로 결심했던 여자 등, 대부분의 노매드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선택권을 행사하여 그 광활한 사막에 자리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펀과 유사하게 외부적 요인들(자본주의 체재에 대한 회의와 부적응)이 그들의 선택을 강제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RTR의 리더 밥이 노매드들을 자본주의에서 내쳐진 사람들이라 비유할 때, 노매드 사람들이 이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모습은, 그들이 노매드로 살아가는 이유가 자발적인 요인들만에 의해서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그들이 표하는 삶에 대한 만족감에도 묘한 슬픔이 도사리고 있다. 펀의 친구 스웽키가 펀에게 자신의 삶이 나름 괜찮았다고 이야기하는 씬에서, 스웽키가 묘사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지긴 한다만, 그 말을 하는 스웽키의 모습은 초연한 마음으로 유언을 남기는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되려, 자신의 삶이 나름 괜찮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안타까운 독백에 가깝다. 

개별 노매드들의 언행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루고 있는 공동체 삶에서도 유사한 맥락의 합리화를 읽을 수 있다. 노매드들은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파티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들을 즐기면서 나름의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역시나 그렇듯, 해당 장면들 속에 표상되는 행복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불안한 사운드트랙, 불안한 카메라 구도와 움직임을 통해, 그들의 행복 추구 행위들이 위태로운 절벽 끝에 서있음을 유추할 수 있어서다.


물론 펀을 비롯한 노매드들의 이러한 자기 합리화가 그들의 삶을 한심하게 비추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우선, 기본적으로 그들의 합리화는 우리가 부정적으로 일컫는 자기합리화 개념과 결을 달리한다. 밥은 영화 상에서 RTR이 자본주의에 반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공동체라 주장한다. 그들 스스로가 부적응과 도태의 도상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적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자기 합리화는 성찰의 부재에서 비롯된 일반적인 자기 합리화와 구별되는 것이다. 여기서 확장하여, 스스로의 치부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인정하기 싫어하는 양가적인 감정을 그들의 합리화 동기로 대입 한다면, 모순으로 가득찬 그들의 합리화는 기실 노매드들의 처절한 현실을 의미할 뿐이다. 마냥 그들의 합리화를 다른 여타 합리화들을 마주할 때처럼 비판하고 한심하다고 폄하할 수가 없는 이유다. 

어쩌면, 그들의 합리화는 펀의 합리화와 유사하게 순전히 자신들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 방어수단이 아니었을까. 그들에게 이러한 합리화 기제는 전부이자 마지막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젠 남자의 말에 분노한 펀의 행동이 맥락상 설득력을 갖추게 된다. 남자의 발언은 펀과 노매드들의 최후의 보루이자 마지막까지도 양보할 수 없었던 그들의 인간다움을 긁는 발언이었겠다. 인간다움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 속에 살고 그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도피'라는 단어로 그들의 현실을 상기시키는 행위만큼 잔인한 건 없다. 펀은 그의 말을 듣고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자기 합리화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부정하려 했겠다. 그것이 그녀의 분노였다.  


어떠한 의미에서 결백하다고도 볼 수 있는 노매드들의 합리화는 이렇다 할 신파 서사나 웅장한 음악 없이도 그들의 삶을 처절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체재로부터 쫓겨나,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 합리화라는 얇은 포장지로 남은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형세가 사뭇 마음 아프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울러, 펀과 노매드들의 이러한 애처로운 합리화는 영화가 풍기는 불안한 정념의 기반이다. 이런 합리화들을 토대로 형성된 불안감의 외연 안에서 영화는 카메라 양식들,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서사구조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


영화<노매드랜드> 스틸컷


그들이 합리화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펀을 비롯한 노매드들이 모순적인 합리화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근복적으로 그들 스스로에게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남자의 예의 없는 발언처럼, 영화는 주변인들의 시선 역시 노매드들의 합리화를 강제한다고 말한다. 영화에 따르면, 노매드들을 향한 공격적인 시선이나 연민 가득한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노매드들의 삶을 막연히 멋지고 재미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시선 역시 노매드들의 불안한 합리화를 지속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캠핑장에 놀러 온 할머니들은 펀을 "미국인"(자본주의 세계의 일원)이라는 울타리에 넣어 유대감을 형성코자 하면서, 노매드인들을 자유분방한 영혼이라 칭한다. 펀의 언니는 노매드들을 미국 개척자들과 동일선상에 두면서 그들의 존재 가치를 높이 평하고, 동시에 펀이 노매드의 삶을 청산하지 못하는 이유가 노매드의 삶이 재미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제도권 내에 정주하는 사람들은 노매드들의 개별적인 상황과 복잡한 현실에는 깊이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노매드들의 일면만을 보고 그들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섣불리 평가하려 든다.

노매드들은 파티 씬 속 남성의 말과 같은 누군가의 부정적인 시선을 마주할 땐, 자신들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인 자기 방어기제를 꺼내 들었을 것이다. 반면에, 펀의 언니의 말과 같은, 누군가의 무책임한 긍정적인 시선을 마주 할 땐, 현실과의 괴리를 느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러한 괴리와 모순의 지속이 펀과 노매드들로 하여금 자기 방어적 합리화를 영속화하도록 만들었겠다. 어쩌면 펀과 노매드들이 겪는 고통의 시발점은 자본주의 체재 그 자체였겠지만, 그 고통을 끝내지 못하게 막는 주체는 자본주의 체재 내에 정주하며 그들의 삶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우리"였을지도 모른다.

영화<노매드랜드> 촬영 현장
영화의 순환구조가 암시하는 결말

영화를 본 관객들은 <노매드랜드>가 순환구조를 띠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공간적 배경의 처음과 끝을 조응시키면서 하나의 연속적인 고리 형태를 만든다. 영화 중반에 할머니들이 언급한 반지 그리고 영원한 사랑의 구조와도 일맥상통하다.

오프닝 장면과 파이널 장면에서 펀이 취하는 태도가 상반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누군가는 이 영화의 결말을 새로운 출발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순과 괴리로 얼룩진 펀과 노매드들의 합리화를 토대로 바라본다면, 영화의 전체 순환구조가 갖는 의미성은 철저히 뒤집힌다. 해당 순환구조는 펀이 결국 똑같은 항로를 영원히 맴돌 것이라는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다. 영화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영원히 변화가 전무할 펀과 노매드들의 슬픈 현실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펀이 과거에 살았던 집을 방문한 뒤 남편의 물품들을 버리고 새로이 길에 나서는 일련의 행동. 그 일련의 장면들은 어느정도 희망적인 메시지를 내포 하긴 한다. 어느정도 동의 하지만 글쎄다. 그 장면들만을 가지고 펀의 내면 속에 있는 모순과 괴리가 단박에 해결됐다고 매듭짓기에는 개인적으로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노매드랜드> 촬영 현장




겉으로 비치는 표층 위에서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감정선을 강조하지는 않지만, 영화<노매드랜드>는 노매드들의 인간다움을 건드는 방식을 통해 그들의 고통을 처절하게 묘사한다.  

어찌 보면 영화 <미나리>와 대척점에 있는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새로이 자리 잡고 절실하게 뿌리를 내리는 미나리의 모양새와 새로운 방향성이 없는 원형 고리의 모양새가 대비된다. 이야기 자체가 주는 느낌 역시 철저히 상반된다.


자본주의 체재의 잔혹성, 자본주의 체재로부터 도태된 사람들, 도태된 자들을 바라보는 자본주의 체재 내의 사람들 그리고 도태된 사람들의 합리화. 이 모든 것들이 영원히 순환한다는 메시지. 너무 극단적으로 바라본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필자의 마음속엔 <노매드랜드>가 이러한 느낌의 영화로 자리 잡을 듯싶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잔잔한 영화로 분류하기가 참 꺼려진다.

어찌 됐든, 필자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잔인하게 서술한 이 영화가 조금은 밉다. 항상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필자의 개인적인 기질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물론 밉다는 것은 이 영화가 싫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노매드랜드>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은 여전하고 또 여전하다. 이러한 필자의 극단적인 해석까지 포용할 수 있는 영화라서 더욱 그렇다.


자오 감독이 마블 세계관을 이끌 감독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메가폰을 잡을 작품은 마동석 배우의 출연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영화 <이터널스>다. 과연 그녀가 <로데우 카우보이>, <노매드랜드>로 이어졌던 그녀만의 감성을 이터널스에도 그대로 적용시킬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노매드랜드>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녀가 그녀의 감성을 아무리 양보한다 하더라도, <이터널스>마블 영화의 전형성을 따르진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그래서 기대된다

자오 감독의 이후 행보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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