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보내는 편지(2019)
공포의 연속이다. 피범벅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것도. 잔악무도한 살인마가 등장하는 것도. 파란 로우 키 조명의 으스스한 귀신이 숨어있는 것도 아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을 휘감은 페이소스는 단연 공포다. 타임 킬링 용이라 생각하고 영화를 봤다면, 영화의 깊이에 빠져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혹스러움에 누군가는 영화에 혹평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회성으로 보고 버리는 영화보다 생각할 거리를 가져다주는 영화의 가치가 더 빛나는 세상이다.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의 향기가 만연한 이 영화를 킬링타임용이라 칭하며 가볍게 넘기기엔 아쉬움이 앞선다. 공포 장르 역사에 새로운 발자취를 남긴 단편 영화 <신에게 보내는 편지>다.
전반부 줄거리
영화의 주인공은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여고생 '배희'다. 집안일을 도맡아 할 정도로 효녀였던 배희는 언제부턴가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다. 배희는 이상한 소리가 학교 수영장에서부터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수영 수행 평가를 준비해야 되지만, 물속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 때문에 배희는 오늘도 선생님께 거짓말을 하고 수업에서 열외 한다. 그래도 수행평가를 준비해야 했던 배희는 동네 수영장에서 연습하기 위해 그곳에 전화를 해보지만, 사람이 많은 수영장은 영 내키지가 않아 끝내 전화를 끊어 버린다. 배희는 결국 학교 수영장에서 홀로 연습하기 위해 친구 사물함에서 수영장 키를 훔쳐 수영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잠수할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고, 연습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그때 수영장 키를 담당하던 친구가 등장한다. 친구의 이름은 '고은'으로, 전부터 계속 배희의 눈에 밟혔던 아이다. 고은이는 배희에 이어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도 잘했지만, 수영에 더 재능을 보이는 친구다. 이전에 배희의 엄마가 학교 수영 수업을 참관하러 왔을 때, 수영하는 고은이의 모습을 보고선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과 닮았다며 배희에게 고은이의 이름을 물어본 적이 있다. 배희는 고은이에게서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용기를 내어 고은이에게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고은이는 수영장으로 들어가 배희에게 수영하는 법을 알려준다. 수영을 하기 위해선 잠수를 해야 한다고 고은이가 재차 말하지만, 배희는 이상한 소리가 여전히 무섭다. 고은이는 장난을 섞어 배희의 머리를 물속으로 집어넣는다.
그 순간 배희는 이상한 소리에 파묻혔고 꼭꼭 숨겨놓았던 자신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은 공포 앞에서 배희는 손만 허우적댄다. 누가 목을 조르는 것만 같다. 그게 엄마인지 고은이인지 배희는 분간이 잘 안 간다.
공포영화의 지루한 클리셰?
우리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와 끝없이 펼쳐진 우주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들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밖의 것들을 두려워한다. 익숙지 않은 상황을 항상 경계하며 살아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의 dna가 내재된 덕이다. 다수의 공포 영화는 이러한 인간의 공포 감지 본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공포 영화의 클리셰라 불리는 여러 요소들이 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공포영화가 애용하는 클리셰 중에서는 제한적 서사 화법이 대표적이다. 제한적 서사 화법이란 관객들의 인지 범위 수준을 주인공의 인지 범위 수준과 동일하게 만들어, 주인공이 아는 정보 이상을 관객들이 알 수 없게끔 만드는 서사 전개 방식을 뜻한다. 공포영화의 제한적 서사 화법으로 인해 관객들은 사건을 둘러싼 전반적인 상황과 주인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주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대부분의 플롯을 마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공포를 경험한다. 이를테면, 공포 영화 속 주인공이 옷장 속을 열어보려 할 때,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것은 옷장 자체가 무섭기 때문이라기보단 주인공과 동일하게 옷장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영화 속 주변인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모습이 우리의 두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은 그들에게 해를 가한 주체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와 같이, 공포 영화는 인지 범위의 한계를 활용하여 서스펜스를 조성하고 이렇게 조성된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이것들을 클리셰라 부르는 이유는 인지 범위의 한계를 활용하는 공포영화의 패턴이 너무 흔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영화 <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앞 선의 공포영화 클리셰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영화가 아니다. 공포 영화의 클리셰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발 더 나아간다. 먼저, 영화 <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벌어지는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화의 플롯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는 인지 범위의 한계를 활용한 공포 조성 방식을 영화 전체의 인과관계 구조로까지 확장시킨 것이다. 기존의 다른 공포 영화들의 공포 조성 방식이 사건 혹은 사건을 일으킨 주체까지로만 제한된 것과 분명 차별화된다.
다수의 예술 영화감독들은 종종 서사적 인과관계를 불분명하게 설정함으로써, 관객들의 능동적인 작품 해석 활동을 유도한다. 그런데, 이러한 아방가르드 영화들은 가끔 그 정도 조절에 실패하여, 관객들은 영화의 감정선에 이입하지 못하고, 영화는 그 자체로 대중들과 유리되어 홀로 떠다니는 섬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신에게 보내는 편지>속 서사적 불분명성은 영화의 감정선을 방해하지 않는다. 영화의 서사는 관객들이 느껴야 하는 공포감을 억제하지 않고, 되려 공포감을 한층 강화시켜 영화에 대한 흥미를 유지시킨다. 각 숏들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영화가 끝난 뒤 관객들의 입에선 분명 “대체 이게 뭐야!”라는 어이없는 실소가 아니라 “이게 뭐였어...?”라는 호기심 가득한 감탄이 나올 것이다.
영화<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외딴섬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원유는 관객들에게 불분명한 인과관계를 무작정 주입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배희라는 학생의 집착과 강박이라는 뚜렷한 주제의식을 제시한 뒤, 주제의식을 수식하는 미사여구로 서사적 불분명성을 이용했다. 명확하게 제시된 주제의식 덕분에, 관객들은 불명확한 인과관계의 바닷속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관객들은 주제의식을 바탕으로 영화의 몇몇 부분에서는 비교적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고 몇몇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상상력을 통해 불완전한 플롯을 완성시켜야 했다. 인간의 창의성은 무한한 자유 속에 놓일 때보다 제한된 틀 속에 갇혀있을 때 더 극대화된다는 한 사회학 연구결과처럼, 영화 <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특정한 주제의식을 하나의 틀로 구축해놓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안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했다. 관객들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하는 동시에 관객들의 흥미를 끝까지 붙잡는 것은 난제에 가까운 일이지만, 영화는 명확한 경계선과 울타리를 세우는 방식으로 일거양득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영화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관람할 때는, 할리우드식 기승전결 그리고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영화가 만들어 놓은 판 안에서 느껴지는 자기만의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
각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력도 영화가 남긴 여운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배희 역의 천하영 배우는 13회 상록수 다문화 국제 단편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여자연기상을 거머쥐었을 정도로 열연을 펼쳤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력 역시 이에 뒤지지 않는다.
영화가 배희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지옥이라 비유되는 배희의 내면세계는 낡고 축축한 느낌의 지하실로 구체화된다. 그 안에서 내리쬐는 한 줄기의 빛을 갈망하며 방황하는 배희의 절박한 행동들은 배희라는 인물의 세계관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지하실 내부에서, 극한의 상황에 놓인 배희의 모습은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을 연상케 한다.
두고두고 뜯어볼 게 많은 영화다. 공포 영화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영화는 공포의 연속이었지만 영화 관람을 마친 후, 온몸에는 아름다움을 향한 전율만이 남아 있었다. 새로이 볼 때마다 보이는 것이 더 많아지는 영화 <신에게 보이는 편지>. 리뷰를 마친 뒤에도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볼 생각에 필자는 가슴이 떨린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1333474&memberNo=16396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