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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 Mar 13. 2021

낡은 소리가 울려 떠날 테지

낡은 북이 울리면(2018) 단편영화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 시리즈 ‘Feel the Rhythm of Korea’의 서울 편을 본 적 있다학창 시절 음악시간 때나 들어보았을 법한 구수한 우리말 판소리에 소위 힙한’ 비트가 어우러지는데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홍보 목적으로 제작된 영상이지만 대중들에게 자못 뜨거운 지지를 얻은 모양새다천편일률적인 홍보영상을 찍어대던 과거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내적 흥을 들끓게 했던 홍보영상 속 음악 범 내려온다’ 덕에 판소리에 대한 국민적 관심 역시 증가하였다단기적 현상으로 치부하기엔 대중문화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우리 고유 소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판소리를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콘텐츠들이 다량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아마 머지않은 미래에는 판소리를 활용한 새로운 장르의 예술들을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하지만 현대식 판소리가 많아지고 이들이 귀에 익숙해질수록문득 북소리를 기반으로 한 처절함이 묻어 나오는 전통 판소리가 그리워졌다대세를 따르기 싫어하는 필자의 개인적인 반골기질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낡은 북이 울리면> 스틸컷

단편영화 <낡은 북이 울리면>은 그러한 맥락에서 필자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거친 듯 부드러운 전통 판소리 선율이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다흥겨운 힙합 비트에 자신의 몸을 실어 나르는 요즘 판소리들과 사뭇 대비된다한 청년이 노래하는 전통 판소리 선율을 듣고 있노라면 한동안 잊고 있던  정서가 다시금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한다그런데 청년의 노래가 노래를 위한 노래’ 혹은 명목상의 만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진 않는다청년의 구슬픈 노랫소리에 설명할 수 없는 암울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어린놈의 목소리에 이라는 정서가 이토록 처절하게 맺혀있을 수 있다니듣는 순간부터 즐거움을 넘어 호기심이 생긴다그러니 청년이 울부짖는 이유를 찾기 위해선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 볼 수밖에 없다.       

   

영화 <낡은 북이 울리면> 스틸컷

초반부에 등장하는 판소리 선율의 주인공은 광수라는 이름의 남학생이다광수는 어머니의 업을 물려받아 소리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어머니는 광수를 낳은 동시에 돌아가셨으며 아버지는 한 평생을 광수의 운명이 소리꾼이라고 믿으며 살아오셨다하지만 광수는 전혀 행복하지가 않다광수는 지금까지 소리꾼이라는 운명에 순응하며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로 살아왔지만 이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님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다여행을 떠나자는 친구 승환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물론 무언가를 아는 것과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에광수는 승환이와의 여행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주어진 운명에 또다시 순응한다관객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광수가 답답해 보일 수도 있겠다하지만 아버지의 억압적인 화법과 광수 종아리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회초리 자국들을 보면 광수의 입장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승환이와의 약속을 어기고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산소를 방문한 광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을 따르고 아버지의 북소리를 기다린다북이 울리기 시작하고 광수는 판소리를 시작한다눈을 감은 채로 힘없이 노래를 시작했던 광수는 조금씩 가사에 심취한다묘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와중풍경 소리가 울려 퍼지고 햇살이 밝아진다이내 광수가 눈을 뜬다.        

            

영화 <낡은 북이 울리면> 스틸컷

영화의 플롯을 이끄는 주요 골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관계다우리 모두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갈등을 겪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우리네의 갈등과 영화 속 부자의 갈등은 이상하게 결이 달라 보인다. “무엇이 이들의 갈등을 특별하게 만들었을까?” 영화를 보며 계속 들었던 생각이었다누군가는 이를 단순한 부자 갈등관계로 보았을 테다예술에서의 신구(新舊갈등이라 보는 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어쩌면 갈등관계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어떠한 방향에서 갈등을 바라보는지는 관람자의 자유겠지만필자는 갈등 자체보단 갈등관계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갈등 주체들을 하나하나 탐구해볼 필요가 있었다캐릭터를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상이하게 해석될 여지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광수와 승환이의 관계가 평범한 친구관계라 생각되지는 않았다승환이의 스킨십에 당황해하고 승환이 앞에서 덥다고 이야기하는 광수의 모습에서 유추해 보건대광수는 승환이에게 연인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즉 광수가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광수의 아버지 조태종은 어떠한가광수가 아버지의 붉은 반점들을 발견하는 숏들과 에이즈 병동 입원 신청서를 보여주는 인서트 숏에서 알 수 있듯광수의 아버지는 에이즈 환자다에이즈 환자 집단과 동성애자 집단 간에 필요충분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 단체에서도 인정했다시피 에이즈 환자들 중 상당수는 남성 동성애자다즉 주인공 부자(父子모두 동성애자라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이를 바탕으로 부자의 갈등을 바라보면 조금은 누그러진 시선으로 인물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화 <낡은 북이 울리면> 스틸컷

조태종의 엄한 자식관은 어쩌면 사회 통념으로부터 소외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원망그리고 광수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했을지 모른다샘 맨데스 감독의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프랭크라는 인물이 떠오른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프랭크는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은폐하기 위해 남성다움이라는 페르소나에 집착한다퇴역군인이라는 사실에 프라이드를 갖는 모습이나 집안에서 권위적인 위치를 고수하려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구체적인 상황에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조태종의 성향과 매우 닮아있다최민영 감독이 <아메리칸 뷰티>에서 캐릭터 구성에 대한 모티브를 얻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인물 구성상의 유사성이 보이는 것은 분명하고 두 영화의 연출 방식 모두 관객들의 사고 확장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꽤나 흥미롭다. <아메리칸 뷰티>의 결말부에 프랭크는 스스로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하면서 처음으로 진실된 눈물을 흘린다프랭크의 진솔한 고백 씬을 떠올리다 보면조태종의 이후 행보가 자연스레 궁금해진다영화는 이에 대해 어떠한 답을 관객들에게 건네주었을까.

이를 생각해보며 영화를 관람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요소가 될 것 같다.               


영화 <낡은 북이 울리면> 스틸컷

현대판 판소리를 들으며 필자와 같이 낡은 북소리를 그리워했던 사람들은 광수와 광수의 아버지 이야기 앞에서 허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낡은 북에서 나오는 낡은 소리가 누군가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였겠지만 누군가에겐 삶 그 자체를 막는 족쇄였을 뿐이니 말이다낡은 북이 울릴 때마다 광수는 눈물을 머금고 판소리를 해야 했다그것이 아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든 엄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든 광수는 노래해야 했다광수의 아버지 역시 낡은 북을 울리기 위해 매번 스스로를 숨겨야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낡은 북은 낡은 소리가 배어있는 철창이자 집착이었을 테다. 그래도 암담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낡은 북에서 나오는 낡은 소리들은 북 근처를 맴돌다가 결국 멀리 퍼져나간다광수와 광수 아버지그들의 삶을 옭아매는 족쇄들 또한 그러하리라고 믿어본다.  


영화 <낡은 북이 울리면>에서 주목할 부분은 플롯에만 국한되지 않는다해당 영화는 단편영화임에도 감정 선을 매우 섬세하게 묘사하여 짧은 시간 동안 관객들이 주인공 각자의 삶에 깊이 머물 수 있도록 도와준다더불어 시골적인 색채와 독특한 카메라 구도들이 적절히 혼합되어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단편영화는 많은 영화인들이 거치는 입문과정으로 새로운 역사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영화 <낡은 북이 울리면>을 관람하다 보면 '새로운 줄기의 태동을 목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의 완성도가 높다.


<낡은 북이 울리면>의 배우 혹은 제작진들이 언젠간 대작 장편영화의 구성원으로 등장하는 날을 기대해본다.




영화 <낡은 북이 울리면> 리뷰 낡은 소리가 울려 떠날 테지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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