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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 Mar 14. 2021

화려한 수상이력, 그 이면

<미나리> 2021

<긴 글 주의> <스포 주의> <개인적 푸념 주의>


세간으로부터 찬사를 수도 없이 받아온 영화 <미나리>였다. 골든글로브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LA 영화 비평가 협회 여우조연상 등을 포함해 수많은 수상 실적들이 이어졌고 최근에는 미(美) 아카데미 6개 부문 후보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나리>에 대한 찬송가들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하도 불러대다 보니, 과도한 기대감이 객관적인 감상을 방해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여기서의 걱정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이 영화에 대한 실망감으로 변질될까" 하는 류의 걱정이었다.      

물론 나의 걱정이 괜한 염려임을 증명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화가 끝이 난 후, ‘전 세계에 있는 모든 할머니들에게’라는 글귀가 적혀있는 엔딩 크레디트 파트를 발견할 때까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못 이겨 주변 사람들에게 미나리를 꼭 한번씩 보라며 추천해주기도 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한 친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에게 <미나리>라는 영화가 갖는 의의 그리고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들을 최선을 다해 설파했다. 그 친구는 언론에서 이미 <미나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며 그 영화를 꼭 보겠다고 대답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미나리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던 시점이었다.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당최 이 영화가 왜 재밌다고 말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만남 자리에서도 그 친구는 미나리의 서사적 불분명성은 차치하더라도 애당초 영화 자체가 자신에게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친구는 내가 '예술 병'에 걸렸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을 정도로 미나리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 말인즉슨 남들이 좋다 좋다 하니 나 역시 그 흐름에 휩쓸려 좋다고 느끼는 거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 친구의 말이 처음에는 당혹스럽게 들렸지만 시간을 갖고 생각해본바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 우리는 어딘가에서든 영화 <미나리>의 화려한 수상이력들을 접할 수 있었다. 나 역시도 그러했고 처음에는 이러한 수상이력들이 영화에 대한 실망감을 배가시킬지 모른다는 단방향적 염려만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해당 이력들이 오히려 내가 이 영화에 대해 과한 긍정을 느꼈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 영화계를 선도하는 <미나리>에 뒤쳐지기 싫었던 나의 내밀하면서도 불순한 욕심이 그 용의자였다.

그 친구의 말 한마디에 시작된 고민이 일파만파 커졌고 한동안 이 글의 발행 버튼을 누르기가 꺼려졌다. 발행 버튼을 미루고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진정으로 이 영화를 사랑했는가에 대해 수도 없이 고민했던 것 같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잠시 뒤로하고, 영화에 대한 감동이 아직 메마르지 않았던 그때로 일단 돌아가 보자.     


영화 <미나리> 스틸컷


"분노와 노스탤지어에 젖어있지 않은 아름답고 보편적인 영화"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 <미나리>에 대한 기사 혹은 평론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미나리를 보며 느꼈던 영화적 체험을 개념화된 언어로 구체화할 방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두 페이지 세 페이지에 걸쳐 인터넷 세계를 서칭 하던 중, 마음에 쏙 들었던 영화 한 줄 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평이었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봉준호 감독은 영화 <미나리>에 대해 ‘노스탤지어에 젖어있지 않은 아름답고 보편적인 영화’라는 평을 남겼다. 봉준호 감독의 평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노스탤지어에 젖어있지 않다’는 평과 ‘아름답고 보편적’이라는 평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미나리>의 핵심을 관통한다.


우리는 영화 <미나리>를 보며 한 가정의 개인적이면서도 특별한 아픔들을 마주하게 되지만 이들이 누군가의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배회하지 않고 넓은 보편성으로 울려 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신파 요소에 기대지 않아서 훌륭했다”는 의미로부터 봉준호 감독의 평을 조금 확대 해석해보자면 이러하다는 것이다. 정이삭 감독은 특정 집단의 제한적 경험을 적정선에서 단순화시키고 감정적 서사의 과잉을 지양함으로써 전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담론을 창조해냈다. 즉, 어떠한 국적의 어떠한 상황의 사람이든 간에, 관객들은 미국 땅에서 벌어지는 한국 이주민들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이야기의 일부로 편입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영화는 또한 분노 혹은 소외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 프레임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인물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을 그러한 감정들로부터 해방시킨다. 소외된 사람들을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은 분노와 소외감을 주된 감정 요소로 활용하고, 영화 속 분노들이 다른 가치들을 잡아먹도록 내버려 두곤 한다. 해당 영화들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더욱 다양한 가치들을 영화 안에 담을 수 있었음에도 분노와 집착이라는 향신료로 모든 원재료들을 버무려버리는 이런 영화들을 마주하다 보면 참으로 게으르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분노와 소외감이라는 편리한 감정 도구들을 활용하여 영화를 버무려버리면, 자극적인 향신료에 버무려진 모든 음식이 그냥저냥 먹을 만해지는 것처럼 그냥저냥 볼만한 영화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나리>는 자극적인 향신료를 적게 사용하여 원재료의 맛을 충실히 살려낸 영화다. 단적으로 결말부에서 미국인들의 도움을 기꺼이 수용하여 새로운 수원을 찾아 나서는 스티브 연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영화 속 주인공들은 분노와 소외감에 얽매여 세상에 반(反) 하기보단 이들을 적절히 표출하고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문화에 적극적으로 임하려고 노력한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위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표현이 떠오르는 영화이기도 하다. 분노와 소외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의 메시지가 결말부에서만 직접적으로 언급된 듯 보이지만 사실 영화 전반에 걸쳐 드러났다.

그리고 이는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가 다르게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감히 봉준호 감독의 평에 이러한 나의 사견을 덧붙여 정리한다면,

<미나리>는 “분노와 노스탤지어에 젖어있지 않은 아름답고 보편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둘러싼 대비적 사유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더 나은 거야. 숨어있는 게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거란다.” 뱀을 발견하고 이를 쫓아내려는 데이빗에게 순자가 속삭인 대사다. 해당 대사가 영화관에 울려 퍼졌던 시점이 워낙 의미심장하기도 했고 대사 자체가 워낙 와 닿았던 지라 아직까지도 대사의 숨결과 호흡이 생생하다. 그런데 영화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의미심장하게만 들렸던 순자의 대사가 더 큰 의미들을 함의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화 내내 데이빗 가족을 괴롭혔던 녀석들을 떠올려보자.

막 이사한 데이빗 가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토네이도?

병원과 멀리 떨어져 있는 트레일러의 위치?

데이빗 가족의 마지막 희망인 창고를 집어삼켜버린 불?

사실 이들은 보이는 것의 범주에 있는 녀석들이다. 겉으로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데이빗의 가족을 위험에 빠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이러한 가시적 위험 속에 숨어있는 진짜 위험은 데이빗 가족, 그들 안에 존재했다. 

고향과 멀리 떨어진 타국에서 미나리처럼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하는 이 가족은 처음부터 끝까지 갈등을 거듭한다. 그것이 오해로 인한 것이었든 가치관 차이로 인한 것이었든, 그들은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어했고 서로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서로를 구원해주겠다는 약속이 무색해져 버린 한예리와 스티브연의 사이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이삭 감독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마음으로 달려왔던 한 가족을 무너지게 한 이 비가시적 위험들을 ‘보이는 위험’들로 1차적으로 가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순자의 등장은 플롯 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순자가 초중반에 등장하고부터, 이러한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위험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고 순자로 인해 갈등들로 점철된 위험들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창고를 불태워버린 화재 시퀀스는 순자의 등장을 계기로 시작된 비가시적 위험들의 발현이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던 장면들이었다. 해당 시퀀스는 가족 구성원들이 실질적인 비가시적 위험들을 정면으로 마주했던 최초의 순간이자 이를 함께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준 최초의 씬들이었다.


순자가 플롯 상에 차지하는 중요도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이 얘기 역시 빠트릴 수 없겠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감독의 대비적 사유는 영화를 이끄는 위험요인들에만 배어있던 것은 아니다. 순자의 보이는 모습을 미루어 보았을 때, 데이빗에게 순자는 할머니가 아니다. 쿠키조차 만들 줄 모르는 순자는 데이빗에게 할머니라는 존재로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도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순자와 데이빗은 조금씩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심적으로 가까워졌다. 데이빗이 순자 마음속에 숨어있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데이빗은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순자의 냄새를 나중에 커서는 (그때 까지도 어색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냄새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순자와의 시간 속에서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믿는 영화 <미나리>였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클로즈업의 예술

영화 이론서를 집필한 벨라 발라즈는 영화가 연극의 재현에 불과하다는 관점에 지극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발라즈는 연극과 영화를 구분 짓는 4가지 요소들을 자신의 저서에 직접적으로 기술하였는데, 해당 요소들은 각각 씬의 분절화, 쇼트 별 앵글 변화, 거리의 변화 그리고 몽타주였다. 그중 발라즈는 거리 변화 요소의 정점에 있는 기술로 클로즈업을 언급하며, 클로즈업이라는 기술의 이론적 의의를 장장 수 페이지에 걸쳐 서술했다. 발라즈는 영화가 연극의 재현이라는 꼬리표에서 벗어나 하나의 예술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 요인으로 클로즈업을 꼽았던 것이다. 이처럼, 클로즈업은 영화의 풍미를 가미하는 조미료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예술을 지탱하고 있는 주춧돌이다. 클로즈업은 대중들이 영화를 관람하는 예술적 동기이자 영화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케케묵은 책에서나 볼 법한 이론적 내용들을 단락의 초장부터 언급한 이유는 미나리가 클로즈업을 애용하는 것을 넘어 영화 안에 이들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단순히 클로즈업의 빈도를 높이는데 그치지 않고 다양한 구도의 클로즈업들을 다채롭게 활용하였다. 감독은 다양한 구도의 클로즈업과 미디엄 클로즈업들을 섞어내면서,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클로즈업들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의도했다. 해당 연출은 , 발라즈의 말마따나, 영화의 기본에 대한 감독의 충실성 그리고 본질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감독의 창의성을 보여주었다.  


클로즈업은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력에 그 감동의 여파가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클로즈업이 지배하는 연출 방식을 택했다는 것은 정이삭 감독이 배우들을 얼마나 신뢰하였는지를 방증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이삭 감독의 신뢰에 배우들이 보답이라도 하듯, <미나리>의 배우들은 완벽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윤여정, 한예리 그리고 스티브 연은 말할 것도 없고, 앨런 킴으로 대표되는 아역배우들 역시 최고의 연기력을 뽐냈다. 정이삭 감독의 의도된 프레임들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플롯이 이어지면서 각 인물들의 심경변화가 미세한 표정연기로 묘사되었고 능수능란한 배우들의 표정연기는 관객들이 인물들의 감정 선에 철저히 동화되도록 만들었다.

정이삭 감독은 애초부터 클로즈업이 주가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까?

그리고 완벽한 연기력과 완벽한 캐릭터 조응이 이 영화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배우 선정에 있어 정이삭 감독의 절실함이 돋보이는 일화가 하나 있어 소개해보고자 한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정이삭 감독은 배우 한예리가 이 영화에 출연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녀의 드라마 촬영일자가 미나리 촬영일자와 겹쳤던 것이다. 정이삭 감독은 이에 대해 암담함을 느꼈었는데, 한예리를 대체할 배우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부터 한예리라는 배우를 염두에 두고 영화의 캐릭터를 만들었고 다른 배우가 이 배역을 맡는 순간 영화의 흐름이 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한예리 배우가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게 되면서 미나리에 출연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정이삭 감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해당 일화는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정이삭 감독이 캐릭터 구상에 얼마나 많은 애를 썼으며 이에 맞는 배우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미나리> 속 모든 캐릭터 구성에 있어서, 정이삭 감독은 동일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고 그 결과물로 영화 <미나리>가 나온 것일 터. 실로 어떠한 극찬도 아깝지 않은 정이삭 감독의 노력과 그 결과물이다.

영화 촬영 과정에서 배우들과 감독이 꾸준히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플롯의 방향성을 수정해나갔다는 일화 역시 꽤나 흥미롭다. 배우 감독이라는 직업적 관계를 초월하여 그들은 함께 <미나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과정들 자체가 영화계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보니 더 대단하게 여겨지는 것도 있고 이런 세세한 부분들이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미나리>를 더욱 훌륭한 영화 작품으로 변모시켰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화려한 수상이력, 그 이면


영화에 대한 생각이 길어지다 보니 이렇게 말이 길어졌다.

참 멀리도 돌아왔다.      


다른 리뷰들에 비해 본 리뷰가 유독 길다는 사실을 알아채면서부터, 혹은 이 글을 마주하면서부터, 나의 답을 지레짐작한 이들도 있겠다.

어찌 되었든, 글의 서두에 언급한 나의 개인적 고민에 대한 답은 단연 “그렇다”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미나리에 대해 비판적인 리뷰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나에게 일침을 날렸던 그 친구를 생각하면 이들의 존재가 그리 낯설지 만은 않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는 물어볼 수도 있겠다.

'나 역시 그저 수많은 수상이력의 후광효과에 취해서 휩쓸리듯 미나리를 좋은 영화로 평가한 것 아니냐고'.

혹은 '기생충의 영광을 미나리가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비이성적 선호는 아니었냐고.'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한동안은 이러한 물음들 앞에서 흔들렸었다. 솔직히 외부 요인들로부터 나 자신이 완벽히 자유로웠다고 답할 자신이 없었다. 또, 단순히 상단에 서술된 분석적 사고를 통해서만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챈 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의 고민 끝에, 내가 잊고 있던 하나의 명백한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한예리와 스티브연이 서로를 향해 울부짖었을 때,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을 막고자 무거운 몸 뚱아리를 옮기는 윤여정의 필사적 행동들을 보았을 때,

그리고 미나리를 보며 스티브연과 앨런 킴이 나긋한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했었다.

<미나리> 속 수많은 씬들은 각자의 유기적 연결 속에서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주었고

나를 조금이나마 변화시켰다.  

단순히 이 본문 전반에 걸친 분석적 사고를 거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후광효과나 기대감이 영화평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났음에도 영화관에서 자리를 뜨지 못했던 나 자신과

각각의 씬 앞에서 느껴졌던 그 진실한 감정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한다. 그 수많은 수상이력들이 없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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