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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 Mar 26. 2021

누군가가 마주하는 어떠한 딜레마에 대해

무명(2018)

     

“이 바닥을 제자리걸음만 하는 지루한 곳으로 만든 배후 바로 너”     

래퍼 버벌진트가 2008년에 발매한 배후라는 곡의 가사 일부다. ‘배후는 무비판적으로 힙합을 소비하는 대중들에 냉소적 경멸을 드러낸다. 대중들과 가짜 래퍼들을 닭과 벌레에 비유하면서 그 경멸의 표현이 극에 달하는데, 이러한 비꼼은 그의 이전 앨범인 <무명> 맥을 맞닿고 있다. 버벌진트는 음악 외적인 일로 다수의 커뮤니티에서 공적(公敵)으로 낙인 찍혀 고통 받았던 경험이 있다. 일련의 경험 속에서, 그는 본질보다 겉치레에 환호하는 대중들에 누구보다도 큰 환멸을 느꼈을 것이고 곡 '배후'는 그러한 그의 생각이 간명하게 드러나는 곡이라 할 수 있다.

버벌진트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에겐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딜레마가 있다. 대중성과 예술성 그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예술가의 이율배반적인 운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본래, 예술가들은 예술 활동의 동기를 개인적인 예술혼에서 찾지만, 현대사회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얘기한다. 돈이라는 놈이 중간에 껴있기 때문이다. 돈이 지배하는 이 사회는 대중들의 평가로부터 예술가들을 자유로이 내버려 두지 않기에, 예술가들은 자기만의 마지노선을 긋고 대중들과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한다.


배후 포함한 버벌진트의 많은 곡들은 대중들을 향한 분노로 포장되긴 했어도 이러한 예술적 딜레마를 기저에 깔고 있다. 영화<무명>이 예술가들의 딜레마를 이토록 설득력 있게 묘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무명>의 주인공은 진태이다. 그들은 힙합을 매개로 우정을 쌓아왔고 함께 음악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마당에서 각자 랩을 연습하던 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둘은 랩을 멈추게 된다. 문밖에 있던 사람은 지역에서 유명한 음악 서클 makes one의 수장 채진이다. 채진은 그들의 노래가 시끄럽기만 하고 그런 노래는 아무도 듣지 않는다며 핀잔을 준다. 진태가 채진에게 대꾸를 하려던 찰나, 산이가 곧바로 채진에게 사과를 한다. 산이는 자신들도 서클에 가입하고 싶다며 채진에게 서클 가입방법을 묻는다. 그러고선 진태와 만든 믹스 테잎을 그녀에게 건네준다.

채진이 떠난 후, 진태는 산이에게 서클에 가입하고 싶다는 것이 진심이냐고 묻는다. 산이는 makes one이 누구에게나 열린 서클이라고 설명하며 makes one에도 래퍼가 있다고 덧붙인다. makes one에 속해있는 래퍼는 주성이라는 인물로, 진태는 주성이 겉치레에 치중하는 가짜와 다름없다며 자신은 그러한 서클에 절대 가입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둘은 함께 오디션을 보러 서클을 방문하게 된다. 서클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진태는 사랑 랩으로 오디션에 임하는 산이를 보며 더욱 큰 분노를 느낀다. 음악적 가치관이 맞아 함께 해왔던 사이였기에 그 배신감은 배로 컸다.

진태의 오디션 차례가 되었다. 산이의 오디션 현장에서 소란을 일으킨 탓에 모두가 날이 선 시선으로 진태를 바라보지만 진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트 위에서 랩을 한다.

“애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음악 중 절반은 얄팍한 계산을 통해 나온 가짜들...”

버벌진트의 곡<배후>의 가사다.     


영화<무명>은 버벌진트의 앨범 <무명>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되었다. 그래서 주로 버벌진트의 곡들을 사운드 트랙으로 활용하고 있고, 영화의 각 시퀀스들은 버벌진트의 곡 중 하나씩을 표현하고 있다. 얼핏 보면 영화 전체가 하나의 음악 앨범 구성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곡에 담긴 가사들을 낭독하는 느낌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영화 <무명> 시간의 예술인 음악을 공간 예술 형태로 확장시켰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감정들을 찾아낸다.     

영화 <무명>에는 주목할 만한 씬들이 제법 많다.

우선,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는 영화의 첫 번째 씬과 마지막 씬이 눈에 띈다. 두 개의 씬들이 영화의 유일한 흑백 필터 씬들이라는 점도 흥미롭지만, 그보다 두 개의 조응되는 씬에서 감독의 숨겨진 질문을 유추할 수 있다는 점이 더 흥미롭다.

첫 번째 그리고 마지막 씬이 단순한 반복 구조를 띄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 둘은 서로를 보충해주며 새로운 의미들을 파생시키는 관계에 있다. 두 개의 씬은 닭이라는 모티프로 연결되어있는데, 영화의 첫 번째 씬은 닭장을 옮기는 주체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 씬은 닭과 닭장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준다.

마지막 씬에서, MAKES ONE의 공연을 보기 가기 위해 트럭을 기다리던 관객은 트럭이 도착하자 트럭 위에 있는 닭장으로 들어간다. <무명> 앨범의 오마주로 느껴지는 장면으로, 영화 속 닭들은 무비판적으로 힙합을 소비하는 대중들을 의미한다. 유사한 관점에서 본다면, 닭장 안으로 들어가는 진태는 현실이라는 벽 앞에 자신의 마지노선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었던 예술가들을 시사한다.

이쯤에서 영화의 첫 번째 씬과 비교해보자. 첫 번째 씬에 따르면, 닭장을 싣고 가는 인물은 채진이다. 여기서 영화는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대관절, 채진은 누구이기에 닭들로 비유되는 예술가들과 대중들을 자신의 공연장으로 옮기는 것일까. 단순히 그녀를 다른 인물들과 동일선상에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옅은 미소를 띈 채, 닭장을 옮기는 채진의 모습은 예술가들과 대중들을 이용하는 무언가로 대체될 법하다.

필자는 채진이라는 인물이, 예술가와 대중 사이를 엮는 연결고리이자 이들을 현혹하고 타락시키는, '자본'과 등치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이라는 단어는 너무 막연하니, 우리 사회에서 자본의 존재를 대변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주체를 떠올려보자. 스치듯 떠오르는 집단이 하나 있지 않은가? 채진의 이니셜이 CJ인 것은 이와 완전히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힙합의 순수성을 망친 주범으로 CJ의 쇼미 더 머니를 뽑는 의견이 왕왕 나온다)              

수미상관을 이루는 씬들 외에도 영화에서 이목을 끄는 장면은  있다. 영화는 네 명의 인물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감독은 진태의 음악적 딜레마에 영향을 주는 외부 양상들을 표면적인 인물관계로 형상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감독의 의도는 오디션 직후의 벤치 씬에서 정점을 찍는다.

해당 숏은 컷 없이 진행된 롱테이크 숏으로, 이 장면에서는 진태가 화면 왼편에 고정된 채로 대화 상대만 계속 바뀐다. 대화 상대는 채진, 주성, 산이 순으로 변하며 각 인물들은 오른쪽 외화면에서 등장하여 진태 옆에 앉고선 진태와 몇 마디를 나누고 좌측 외화면으로 걸어 나간다.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본 숏의 연출은 진태의 내적 혼란을 정밀하게 묘사하며, 각 인물들과 진태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서로를 바라보는지 설명해준다. 영화는 마지막에 홀로 앉아있는 진태의 모습을 매치 컷으로 과거의 모습과 대비시키기도 한다. 이 역시 씬의 몰입력을 한층 가중시키는 설정이다. 또 해당 숏은 처음에 피사체와 일정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이후에 대화가 진행될수록 그리고 인물이 바뀌어갈수록 조금씩 카메라와 피사체 간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진태와 각 인물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묘사하기 위해, 혹은 진태가 겪는 심리적 혼란이 격화되고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이러한 시네마토그래피를 활용한 듯하다.

연극적인 연출임에도 본 숏은 영화의 흐름상 전혀 어색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각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력도 한 몫 하였겠지만 진태의 특이한 행동들에 의문을 갖도록 꾸준히 서스펜스를 조성한 감독의 계산 역시 큰 역할을 해냈다.

해당 씬은 영화 <무명>이 귀만 즐겁게 해주는 영화가 결코 아님을 증명한다. 영화 전체를 조망하는 벤치 씬은 <무명> 영화적 가치를 완성하는 중요한 퍼즐이라 할 수 있다.               

<무명>은 언뜻 보면 러프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영화지만 그 안에 빠져들수록 치밀한 계획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 안에서, 영화는 예술가들의 운명이라 해야 할지, 비극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는 누군가의 딜레마를 혁신적으로 조명한다. 한 번쯤은 <무명>을 통해 그들의 딜레마에 대해 직접 고민해보는 것도 우리의 삶에 큰 의미로 자리 잡지 않을까 싶다.



영화 <무명> 리뷰 누군가 마주하는 어떠한 딜레마에 대해 - 1부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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