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도덕, 사회적 고립
왜 극적으로 통신 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우울감과 소외감,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을까? 왜 TV 속 유명인들은 과거와 다를 바 없이 말실수를 하고, 왜 뉴스에는 조악한 범죄로 자신의 남은 생애를 훼손하는 사람들이 넘쳐날까? 왜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쉽게 분노하고, 섣불리 판단하며, 근거 없는 자기확신에 가득 차 있는가? 이 각각의 질문은 서로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방금 나열한 물음표에 대한 대답은 비슷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정과 괴로움의 연쇄는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현상들에서 하나의 공통된 원인을 추출하는 시도는 언제나 위험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사실을 꿰뚫는 단 하나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욕구에 시달린다. 이러한 욕구에 대한 섣부른 반응으로 만류귀종을 읊조린다면, 우리는 현실에 내재되어 있는 몇 가지 유의한 사실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관은 당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가지 사실로부터 오늘날 현대 사회의 일면들을 구성하는 여러 현상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사실이란, 인류가 도덕적으로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인류의 도덕성에 대해 딴지를 걸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전적으로 상대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오늘날 사람들의 건전한 상식이 훼손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도덕은 진보한다. 과거의 어떤 시대와 비교해도, 작금의 시대가 도덕적으로 가장 성숙하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어떤 영역에서의 진일보가 언제나 좋은 결과만을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어떠한 진보는, 이 세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덕성의 진보에서 어떤 짐을 짊어지게 되었는가? 일단 도덕성의 진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이 인간 사회에 어떠한 식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도덕성의 진보란 단적으로 말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의 질적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이 질적 수준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합리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을 이용해 판별할 수 있는 내용의 합의점이 확립됨에 따라 구분된다. 이는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도덕적인 주장에 얽혀 있는 근거가 그럴듯하다고 인식할 수 있는 범주의 확장을 의미한다.
합리성은 물론 시대적이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판단하는 내용이 추후에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정상-비정상의 전환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났다. 여기선 '합리적인 사람'을 '자신이 처한 시대적 여건에 맞게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 정도로 정의해두자. 만약 이러한 개념적 나열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명문화된 논의 조건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적 입장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 건전하고 성숙한 도덕적 입장들을.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도덕적으로 진보해 있다는 말의 의미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다양한 사회적 문제로 연결되는가? 하나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을 섣불리 가질 수 없다. 좋아했던 연예인이 마약이나 학교 폭력 문제로 논란에 휩싸이고, 응원하던 정치인이 부정부패로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존경하던 학자들이 논문 표절이나 성추문 등의 이슈에 옭아 매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즉, 현대 사회는 각 영역에서 모범적 인간의 전형을 가지기 힘들다. 이러한 믿음과 배신의 순환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는 계기가 된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라는 믿음이 확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세상에 대한 불신은 확장성을 가진다. 이들은 이제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명인들을 능동적으로 깎아내린다. 세상에 깨끗한 사람은 없으며, 꼼꼼히 찾아보면 누구나 도덕적 흠결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작업들이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무심코 내뱉은 말 한 두 마디, 맥락이 무시된 채 '편향된 돋보기'로 확대되어 퍼 날라지는 SNS 상의 발언들, 시대적 상황이라는 한계 때문에 발생했던 몇 가지 실수들이 오늘날 고도로 진일보한 도덕적 기준에 의거해 재판대에 오른다. 사람들은 불과 십몇 년 전만 해도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정상적인 관행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묵인했던 '상식'이었다는 점을 잊어버린다. 고대의 철학자들이 오늘날 용인될 수 없는 '노예제'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철학적 사유들이 폄하된다. 사람들은 시대를 앞서간 도덕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무시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섣부른 가치 판단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도덕적 기준은 물론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기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잘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상태인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에 따라, 사람들은 타인을 판단하고 심사하는 데 있어 엄격한 기준들을 내세운다. 소위 '걸러야 할 사람'의 목록은 점점 늘어나고, 낯선 이에게 말 거는 상황을 점점 두려워한다. 도덕적 무결함을 기대하는 정도가 과거에 비해 점점 거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깊은 관계를 회피하고, 타인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언제 그러한 기대가 뒤통수를 맞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태이다. 사람들은 점점 외로워지고, 고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인간관계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은 어떠한가? 앞서 언급했듯, 현대 사회는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을 가지기가 어렵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상의 상실과 연결된다. 게다가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하는 수많은 스피커를 접하고 있다. 즉, 우리는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는 모종의 확신을 가지기가 너무나도 쉬운 상황이다. 이 두 가지 사태가 결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쉽게 분노하고, 다른 사람을 낙인찍는다.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있는 가치 기준이 바깥의 맥락에 대한 고려를 상실한 채, 온갖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재판하기 시작한다. 커뮤니티엔 세 줄 요약으로 점철된 사회 이슈들이 도배되고, 고작 몇 줄로 요약된 인간관계 갈등만 보고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러한 확신에 별다른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이러한 확신에 찬 발언들은 다시 SNS 상으로 공유되어, 또 다른 사람들의 재판대에 오르내린다. 이러한 경향이 심해지면, 범죄적 행위에 대해서도 내적으로 합리화하기에 이른다. '이 정돈 괜찮지 않나?'라는 관대함이 '분별력 있는 자기 자신'에겐 쉽게 적용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기준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발전된 도덕성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우리는 개개인의 행복을 위해 인지적 발전을 자제해야 하는가? 단순히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또한 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쉽고 생산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겸손과 관용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자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