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호기심
내 생각에 호기심은 대체로 좋은 것이다.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욕구는 그 사람의 인지적 성장에 있어 근본적인 동력원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뇌는 새로운 지식을 배울 때 특정한 시냅스의 연결을 강화하거나, 새로운 시냅스 연결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한다고 여기는 막연한 과정이, 실제로 우리 몸에 해부학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마치 육체적 운동을 하면 관련 부위의 근육 밀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종종 어떤 호기심은 이러한 긍정적 결과를 지향하기보단, 단순히 기계적으로 튀어나오거나 장기적인 의미의 '학습'으로 이어지지 않는 듯하다. 이를 테면 수학 문제를 푸는데, 5초간 봐도 풀이나 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곧바로 답안지를 뒤적이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사람은 적혀 있는 답을 보고 '아하!' 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겠지만, 본연의 의미의 학습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당장 느껴지는 원초적인 자극을 해소한 데 불과하다. 팔이 가려워서 그 부위를 긁은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호기심을 상술한 호기심과 분리해서 지칭해보자. '위장된', '비생산적인', '동물적인' 등 다양한 형용사가 붙을 수 있겠지만, 여기선 '가짜 호기심'이라고 지칭하겠다.
이 가짜 호기심과, 말하자면 '좋은 호기심'을 구분하기 위해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향할 법한 '인지적 성장', '장기적인 의미의 학습'(이하 '학습')에 대해 규정할 필요가 있다. 지향점을 분명하게 해야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의 건전성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습이란 무엇인가?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하나는 생산성이다. 학습은 생산성을 가진다. 생산성을 가진다는 건,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당신이 'A는 B이다'라는 정보를 얻었다고 가정해보자. '물은 H2O이다.' 같은 정보를 말이다. 이런 정보를 획득한 당신은 다음과 같은 호기심이 들 수 있다. A가 B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그 방법은 신뢰할 만한 것인가? 혹은, A는 왜 C나 D가 아니고 하필 B인가? 이러한 호기심은 특정한 정보로부터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가능한 대안을 상상하며, 사고의 확장을 초래한다. 또 이러한 과정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데, 즉 어떤 사안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분별력이라고 한다. 생산적인 학습이라는 건 배우는 과정에 있어 분별력을 적용하고, 그 능력을 강화한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지속성이다. 학습은 지속성을 가진다. 학습이 지속성을 가진다는 건, 지식을 단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당신이 지속적인 학습 과정에 있다는 건, 어떠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억하고, 그와 관련된 다른 정보를 접할 때 두 정보를 연결하며, 그런 식으로 하나의 전체적인 상을 구성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지속성이 없는 학습은 모든 것을 '공식화'하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즉, 'A는 B이다' 이상의 무언가를 도출해내지 못하고, 그저 그러한 공식을 수집하는 데 만족하는 것이다. 모르는 수학 문제가 나오면 그 답만 확인하듯이 말이다.
학습은 좋은 호기심을 기반으로 진행된다. 말하자면, 좋은 호기심이란 앞서 학습이 가지는 두 가지 차원을 긍정적으로 산출하는 그러한 호기심이다. 이는 나쁜 호기심이란 생산성과 지속성을 결여한 호기심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생산성이 결여된 호기심은 스스로 답을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외적인 도움에 의존하며 그 이상의 의문을 품지 않는다. 지속성이 결여된 호기심은 단적인 맥락에 의존한 학습만을 추구하며, 자칫 독단적 진리를 구축해가는 고집스런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더 나은 학습 방식은 좋은 호기심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나쁜 호기심을 장려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좁게 보면 수직적, 권위적 조직 문화를 가진 기업부터, 넓게 보면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가 그렇다. 모든 문제에 정답이 있다는 발상과, 그 조직이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 규범 같은 것들이 절대적이고 지켜져야만 한다는 요구가 나쁜 호기심만을 인정한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좋은 호기심은 쓰잘 데 없는 데 시간 낭비하는 물음,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태도의 일환으로 전락한다. 나는 '요즘 학생들(혹은 신입사원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 개인적으로 우습다고 생각한다. 자기 성찰을 결여한 문제의식은 같잖다.
다른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환경의 피해자들이 많은 질문을 생성하며 스스로 '좋은 학습자'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산발적으로 물음표를 찍고, 곧장 마침표를 찍은 뒤 얼마 안 가 그 문답 자체를 잊어버린다. 이러한 사태를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어제 배운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충분히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있는 질문을, 오늘의 학습 과정에서 타인에게 던진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배웠다고 믿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며, 호기심의 충족을 통한 학습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실태는 책을 읽을 땐 뭔가 재밌고 깨닫는 느낌이 들었는데 막상 다 읽고 나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던가, 수업 중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고 생각했는데 학기가 끝나고 남는 게 없다는 한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나쁜 호기심은 좋은 호기심으로 발전할 수 있다. 또한 좋은 호기심은 나쁜 호기심으로 후퇴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그의 호기심이 다양한 제약과 반발에 부딪히는 상황이 반복될 때 일어난다. 자의적으로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을 규정해버리는 교사나, 타인의 호기심을 '눈꼴사납다'고 여기는 삐뚤어진 인격의 소유자 등에 의해서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호기심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학습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데 그 안에 일정한 학습량을 소화해야 하는 경우에서의 산발적 호기심, 주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문제의식, 답변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만의 질문 방식 같은 건 좋은 학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눈치를 봐가며 호기심을 가지라는 게 아니라, 상황에 걸맞은 학습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굴종의 차원이 아니라 배려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문제다. 자신의 지식 체계를 발전시켜가는 건 긍정적인 일이지만, 그 체계를 현실과 유리되어 자기만의 외딴섬을 구축하는 관심에만 연결하는 건 긍정적인 자기상이 아니다. 인간은 어쨌든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