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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Dec 06. 2022

시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44. 시간(Time)


  일상적으로, '시간'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술어들과 결합된다. 시간을 '쓴다'거나, 시간을 '가진다'거나, 시간이 '없다'거나, 시간이 '아깝다'거나, 시간을 '아낀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접근들은 한 가지 공통된 관념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소유의 관념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하나의 물질처럼, 물건처럼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무언가를 자신이 가지고 있고, 사용할 수 있으며, 남에게서 가져올 수도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시간을 정해진 단위로 쪼개서 사고파는 게 일상화된 세상에선 당연하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그 무언가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러한 귀결은 이상하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우리는 시간을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건 기껏해야 시계나 달력뿐이다. 볼 수 없으니 만질 수도 없고, 어딘가에 저장할 수도 없다. 그럼 시계나 달력이 표현하고 있는 건 문자 그대로의 시간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우리가 1초라고 말하는 것은 세슘 원자의 동위원소에서 방출되는 특정한 빛이 정해진 수치만큼 진동하는 데 걸리는 순간이다. 이러한 규정은 규약에 의해서 협의된다. 자연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이고 일정한 단위를 시간의 단위로 '채택한 것'이다. 그럼 그 이면에 있는 시간의 흐름은 무엇인가? 소수점 아래로 무한히 반복되는 그 순간의 끝은 어디쯤인가? 달력은 이런저런 기준으로 어제와 오늘을 구분한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은 한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다. 밤 11시 59분 59초와 12시 정각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차이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둘을 다른 날이라고 규정한다.


  시간의 또 다른 속성 중 하나는 그것을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온 시간을 절대로 돌이킬 수 없고, 일상적 차원에서 시간의 흐름을 늦추거나 빠르게 할 수도 없다. 그런 건 기껏해야 동영상의 재생바 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시간의 흐름에서 개개인의 인간은 완전히 무력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의 몫을 지배하고 있는 양, 이런저런 가공을 통해 하나의 제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양 믿는다. 이러한 믿음들은 어떠한 근거에 기반하고 있는가? 나아가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적합한 이해는 어떠해야 하는가?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점은, 내가 시간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수행하고자 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과학적 탐구란 엔트로피의 방향성이나, 우주의 다차원 속성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는 일련의 담론이다. 이는 말하자면 시간의 사실적 정의를 그 본질적 속성에 비추어, 보다 정교하게 다루고자 하는 시도다. 내가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시간의 '의미'이자 그 의미에 접근할 때 취해야 할 인지적 태도의 '당위'다.


  사실의 영역과 가치의 영역이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수긍하는 가정이다. 이러한 구분은 개념적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일반적인 남녀 사이에 이런저런 차이가 있다는 '사실'과, 사회적 대우의 차원에서 성별만을 가지고 이런저런 차이를 두는 '가치'는 구분된다. 전자는 가치판단이 배제되어 있고(오염된 탐구 결론을 제외하면), 후자는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즉, 가치는 일정한 판단을 도출한다. 우리가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어떠한 가치의 목록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시간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사실에 대한 탐구다. 여기선 가치에 대한 탐구를 다룬다.


  일반적으로 시간에 대한 관념이 소유, 물질에 맞닿아 있다는 점은 앞에서 지적했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가치판단의 실태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가지의 논의는 이러한 관념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시간에 소유의 관념을 투사하는 건 정당한가? 내가 보기엔, 정당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시간을 이러한 수준에서 바라보는 건, 이것을 오로지 효율과 생산성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가공할 수 있다는 믿음, 이를 사고파는 게 정당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거래할 것인지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가치에 대한 모든 '질문'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일정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전제한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책이나 동영상이 인기인 것은 이미 이러한 방법론의 근저에 시간에 대한 통념, 즉 소유의 관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단지 효율과 생산성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게 왜 부당한가? 이는 인간의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을 기계화시킨다. 그의 삶에 녹아들어 있는 모든 시간은 효율과 비효율로 나뉘고, 생산과 낭비로 구분된다. 이는 개개인의 정신에 있어 몇 가지 독특한 특성을 야기한다. 첫째로, 게으름에 대한 죄책감이 유한다. 시간이 생산성의 단위라면,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는 모든 시간은 낭비가 된다. 이러한 낭비는 사회적인 용어로 '게으름'이라 지칭된다. 게으름은 사회적인 압력과 내적으로 일어나는 죄책감으로 개인을 질식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서로를 더욱 채찍질하고 다그친다. 이러한 실태는 사회 전반에 피로감을 유발하고, 이 피로감의 누적은 정신 질환을 발달시킨다. 각종 히스테리, 혐오적 표현, 무분별한 공격성이 이러한 질환의 증상들이다. 이를 해소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휴식이다. 사람들이 게으름이라고 인식하는 바로 그것 말이다.


  둘째로, 수행의 기준이 천편일률적으로 변한다. 오늘날 대학의 인기 있는 학과와 그렇지 않은 학과를 보라. 각종 이공계열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입시 전쟁을 치르고 있고, 철학을 비롯한 인문계는 통폐합의 위기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계를 정비하고 공장을 가동하는 기술을 배우는 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의 삶에 대해 이해하고, 사회의 올바른 작동 방식에 대해 토론하는 건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스스로 불행하고 불의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불행하고 불의한 사태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고 믿는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부정적 지표가 문제라고 혀를 차면서, 그러한 현실을 초래한 모든 요인들을 더욱더 강조하고 부추기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상식 속에서 이 물리적 세계를 감싸 안고 있는 '시간'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그것은 재산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재산은 더 많은 재산을 위해 사용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에 투사되어 있는 일반적인 관념이 왜 문제인지에 대해선 충분히 말한 것 같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안은 시간의 부분을 '사건적 삽입'이라고 보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의 전체는 거대한 도서관이며, 각각의 생애는 저마다의 책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단위의 사건들을 하나의 책자로 만들어 그 책장을 채워간다. 유년 시절 선생님을 속이기 위해 정교한 거짓말을 고안했던 일, 친구들과 웃고 떠들던 지난밤의 기억, 좌절된 도전과 끝나버린 성공 같은 것들이 하나의 단위가 되는 것이다. 즉, 생애는 모든 부분적인 이야기의 총합이다. 시간은 그 책 속의 문장을 구성하며, 사건을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 삽입하는 과정이다.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이다.


  시간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에 어떤 장점이 있을까? 궁극적으로, 시간적 결과물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다양화된다. 당신은 게으른 선비의 이야기를 좋아할 수도 있고, 평생을 투쟁하면서 사는 투사의 이야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여름밤의 추억과 같은 순간들을 원할 수도 있고, 어떠한 어려움 앞에선 봄이 오기 전의 겨울나기와 같은 내러티브를 동원할 수도 있다. 이야기의 힘, 그것의 성격을 내 삶의 순간들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고난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유의 관념 속에선 무직으로 사는 6개월의 생애는 낭비와 비효율로 점철된 게으름의 온상이 된다. 이야기의 관념 속에서 그 시간은 휴식이 될 수 있고, 추억이 될 수 있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전조나 과거의 일들을 정리하는 휴지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마치 소설 속 인물이 과거를 회상하며 소설 속 내용들을 한 차례 정리하고 가듯이 말이다. 당신은 죄책감을 강요받지도 않고, 생산성의 요구에 등 떠밀 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건, 이야기의 성격을 규정하는 건 그 이야기의 주체인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좋은 이야기'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 같은 게 없기 때문에, 저마다의 삶을 꾸리는 데 있어 자율성이 극대화된다. 요청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서사적 정합성 정도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중 어느 이야기가 더 좋은 이야기인가? 그런 걸 구분해낼 수 있는 기준 같은 건 없다. 누군가에겐 어린 왕자가 인생의 책이 될 수 있고, 죄와 벌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로맨스를 좋아할 수 있고, 누군가는 느와르를 좋아할 수 있다. 그렇다고 로맨스와 느와르 사이에 장르적 우열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삶이 항상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요청하는 것은 아니다. 위인적인 전기만이 좋은 이야기인 것은 아니 듯 말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 어떤 이야기 속에선 주인공이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 속에선 엑스트라이기도 하다는 사실, 어떤 때는 선하지만 어떤 때는 이기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입체적인 등장인물이자 그런 이야기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어떤 단적인 문제에 대한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임신 중절은 어떻게 해야 하며, 사형 제도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들은 그것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특정한 이슈에 대한 태도를 즉각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특정한 이슈는,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이 삶과 세상에 있어 부분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술한 시간에 대한 고찰은, 말하자면 그러한 모든 주장들의 이면에 있는 근간 중 하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일종의 무의식에 대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설령 '시간은 서사적 단위여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공감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즉각적인 삶의 변화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내가 권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한 관념을 의식의 한 구석에, 가능한 오랫동안 담아두며 인간을, 세상을 관찰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시도가 인지적 시야의 저변을 넓혀주는 훈련이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또한 바라건대, 좋은 삶의 단초로 기능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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