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할 때, 종교는 상당히 독특한 구석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종교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속성의 목록들이 따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종교적인 것'이라는 게 종교 내부에서 개발되어 인간 문명에 전파된 고유한 발명품인지, 아니면 단지 인간 내적 본성에 깃들어 있던 이러한 것들을 끄집어내는 데 종교가 특히 탁월할 뿐인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종교적인 것'의 목록에서 가장 앞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속성이 '맹목성'이다. 어떤 종교에서든 맹목성은 필연적이다. 종교가 요구하는 맹목성이란 그것의 핵심 가치를 단적으로 전제할 것, 의심의 대상으로 왈가왈부하지 않을 것을 시사한다. 맹목성은 종교의 가장 근원적인 원동력이다. 모든 신앙의 단초가 되는 계율이 '일단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종교는 별안간 다양한 방식으로 맹목성을 길러내기 위해 주력한다. 맹목성은 그 특성상 지성의 일부를 희생시키길 강요한다.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 분석적으로 해체하고 정립하며 분별력을 발휘하는 게 인간 지성의 역량인데 맹목성은 이 같은 기능을 스스로 마비시키는 데 주력한다. 그 대가로 신자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안정감, 신비스러운 일체감 같은 걸 경험한다. 즉, 맹목적인 사람은 혼란스럽지 않다. 그에겐 우리가 늘상 고민하고 의심하는 것들이 대체로 분명한 것으로 느껴진다.
맹목성은 장단점이 있다. 단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말도 안 되는 부가적인 신념이나 원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아마도 종교가 분리되어야 할 삶의 다른 영역을 훼손하기도 한다. 특히 종교 범죄의 기반이 되는 것이 이 의심하지 않는 힘, 맹목성이다. 특정한 맹목성에 사로 잡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말하자면 배부른 사람이 며칠째 굶주린 사람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배부른 자는 왜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음식에 집착하는지, 도둑질과 같은 '범죄'에 종사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비난한다. 종교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들을 보며 혀를 차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맹목성에도 강점이 있다. 맹목성이 가지는 심리적 힘은 엄청나다. 맹목성은 사람을 스스로 굶어 죽도록 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몸을 불에 태울 수도 있으며, 하루에 15시간씩 한 가지 일에 몰두하게 만들기도 한다. 맹목성은 물론 종교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가치관만이 옳다는 맹목적 신념, 정치적 맹목성, '이것만 하면 성공적인 삶'이라는 강박적 맹목성, 단순히 가정되는 학문적 차원에 맹목성 등, 맹목성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된다. 그렇다고 맹목성에 종교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무언가 같진 않다. 왜냐하면 맹목성이란 어떤 것을 다른 저항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속하는 속성인데, 이는 말하자면 주어진 환경을 거스르고, 숱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지하려는 강한 경향성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맹목성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을까? 광범위하게 환경적 변화에 저항하는 인지적 힘이라는 측면에서, 자연발생적인 것 같진 않다. 아마도 가장 원초적인 문명적 산물로부터, 인위적으로 파생됐다고 보는 게 맞는 듯하다. 여기서 지시하는 건 물론 종교다.
나는 맹목성이 인간의 자연생물학적 구성과 독립적으로 생긴 어떤 초월적, 추상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인간이 아파트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근본적인 조건은 인간 종이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뇌의 기능, 팔다리를 조직하는 세포 간 연합 같은 생물적 기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라는 종의 개체를 단순히 자연세계에 방생해 놓는다고 아파트를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를 짓기 전에도 인간은 아파트를 짓는 데 필요한 능력들, 공간적 구상력이나 수학적 계산력 같은 것들을 잠재하고 있었으나, 어쨌든 아파트 설계도를 그리기 위해선 그것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개발하는 인위적 과정이 필요하다. 맹목성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자연발생적이지 않으며, 인위적인(아마도 종교적 신앙에서 비롯된) 산물인 것 같다.
앞서 지나가듯 언급했지만, 맹목성은, 만약 내 추측이 타당하다면, 설령 종교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오늘날엔 종교에 국한되어 나타나는 속성은 아니다. 이는 단순히 맹목성이라는 심리적 속성이 인간 사회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일견 종교와 배치되어 보이는 학문 일반에서도 숱하게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학문의 일부도 '종교적인 것'이다. 이 맹목성은 주로 학문 분과들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향해 있다. 그것은 아마 논증될 수도, 이른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도 없는 그런 영역이다. 다만 학문이 맹목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이것이 학문의 가치를 떨어트리진 않는다. 맹목성 그 자체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또 다른 종교적인 것은 '겸손'이다. 겸손은 하나의 처세술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나의 실제 능력을 축소하여 발언하는 게 어떤 경우엔 사회적 평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소위 '동양적 가치관'에서는 그렇다. 그렇다고 해도, 겸손이라는 특정한 태도의 양상은 마찬가지로 종교에서 연원한 것처럼 보인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면, 자연상태에서 겸손이 필요한 경우는 사실상 없는 듯하다. 생존과 결부되는 실용성의 관점에서 겸손은 오로지 사회문화적 환경에서만 그것의 유용성이 돋보인다. 하지만 겸손이 요구되는 하나의 예외적 가정이 있는데, 그것은 자연세계 바깥의, 혹은 인간 존재를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어떤 대상에 대한 경외심이 요청될 때다. 경외심 자체는 반드시 종교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없다. 벼락의 힘을 마주한 인간은 종교적 관념을 동원하지 않아도, 단순히 경외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겸손은 맹목성과는 다르게 종교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는 종교 내부에서 겸손을 대체할 만한 성정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존경이다. 종교는 신을 존경하면서, 동시에 겸손하진 않을 수 있다. 나보다 우월한 존재를 인정하는 게 나를 의도적으로 낮춰야 할 근거로 작용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겸손은 종교적 미덕으로 받아들여지며, 종교적 가치 목록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많은 문화권에서 일반적인 덕목으로 인정된다.
이 글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할 종교적인 속성은 '연대의식'이다. 이 연대의식은 모든 자연적 구성물에 대한 연결의 관념을 뜻한다. 유일신 종교에서 모든 대상을 '신의 피조물'로 엮고, 불교에서 '연기설'에 입각해 존재를 해석하는, 이러한 맥락에서의 연대의식 말이다. 연대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맹목성이나 겸손이 그러하듯, 연대감 역시 오늘날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기 위해 특정 종교를 동원할 필욘 없다. 오히려 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물리적 연결성이라는 발전된 관념을 제공하며(기후변화 문제가 이에 해당한다), 지구 차원에서 이뤄지는 정치경제적 협동이 연대감의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 근간의 정당성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인권'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종교에서 연대감은 어느 정도 필연적 귀결이다. 특히나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종교에선 더더욱 그렇다. 맹목적인 전제를 공유하는 집단은 소통과 공존을 위한 동일한 맥락을 부여받은 셈이다. 이는 좁게 보면 종교적 구성원들끼리 그렇고, 넓게 보면 그 종교 세계관에서 지칭되는 모든 대상을 향한다. 기독교적 박애주의가, 불교적 인연이 이러한 넓은 차원의 연대감을 예증한다.
아마도 생각할 수 있는 '종교적인 것'들의 목록은 더 많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맹목성과 겸손, 연대의식은 그들 중 일부다. 사실 내가 이 종교적인 것을 언급한 이유는 '종교'와 '종교적인 것'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여러 속성들은 아마도 모든 문화권에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권장될 만한 속성일 수 있다(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종교적인 특성은 학문 일반이나 무신론에 입각한 삶에서도 숱하게 발견된다. 반면 현대의 종교(각각의 체계, 분파들) 그 자체는 이러한 종교적인 속성을 갖추지 않고 있을 수도 있고, 자체적으로 권장하고 있지도 않을 수 있다.
내 생각엔 몇몇 사람들이 너무 단순하게, 혹은 간단히 종교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주장은 요컨대 과학적 발전이 보다 고도화되고, 기술적 수혜가 지구촌의 생산 체계를 완전히 지배하게 된다면, 그 근본조차 불분명한 종교라는 발명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전망, 낙관적이라고 해야 할지, 비관적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이 전망은 종교적인 것의 영향력을 간과하고 있다. 종교적인 것과 종교는 어느 정도 분리되어 나타날 순 있지만, 단절될 순 없다. 어떤 종교적 관념도 거부되는 세계에선 상술한 종교적인 것들 역시 거부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로선 종교적인 것들이 광범위하게 거부되는 세계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학문의 일부가 종교적 속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지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내 상상력이 갖는 한계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예상이 옳다면, 이는 종교 범죄를 일삼는 속칭 '사이비 종교'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는 낙관론에 대한 결정적인 염려로 작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