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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Dec 30. 2023

기념일에 대한 소고 3

요즘 들어 문득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라는 것이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느낌은 단지 똑같은 대상의 다른 측면을 본다던가,

유사한 상황에서 다른 인상을 받는다던가 하는 수준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예컨대 여러 사람의 눈앞에 하나의 벽돌이 있는데,

누군가는 그것의 구멍을 보고,

누군가는 그것의 닳고 닳은 희멀건 모서리를 보고,

누군가는 붉은 옆면을 본다는 의미에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거주 세계의 단절은

그런 피상적인 차이보다 더 근원적인 간극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설령 우리가 과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동일한 물리적 조건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마도 그와 구분되는 맥락에서, 사람들 사이에 놓인 거주 세계의 차이는

물리적 차이가 아닌 의미론적 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세계에서, 인류는 진정 달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세계에서, 기후 변화 문제는 과학자들의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의 세계에서 돈은 최고의 가치고, 그를 위해서 윤리적 쟁점을 무시하는 건 정당합니다.

그 외에도 '재미'만 있으면 무엇이든 괜찮아지는 세계,

위선과 기만을 혐오하면서도 무지에서 비롯된 무례를 솔직함으로 치장하는 세계,

당장 추위와 허기에 생존을 위협받는 세계와 

하루의 '특별한 경험'을 위해 천만 원을 쓰는 세계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무언가를 비판하고자,

이러한 세계 사이의 상이함을 대비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사람들 사이에 산재한 진정한 차이의 스펙트럼은

양 극단 사이로 드넓게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크리스마스는 소박하되 행복해야 하는 날이지만,

누군가에겐 단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출근일이듯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저마다의 세계에 살면서도,

외견상 서로 공감하거나, 동일한 범주에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거주 세계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전반적인 간극은 선명함 만큼이나 깊고 아득하진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러한 행태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저

그러한 개별 세계 사이의 차이가 심원하지 않다는 걸 뜻하던가요.

어쨌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거주 세계의 차이가 일종의 스펙트럼이라면,

80억이 넘는 사람의 수에 비견될 정도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크고 작은 차이를 담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진정한 문제는 그런 구체적인 개인과 개인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집단과 집단 사이, 혹은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발생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국가와 국가 사이, 사회운동가와 일반 대중 사이처럼 말입니다.

정당이나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 종류의 노력에 경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끝내

납득할 수 없는 차이에 질려서, 자기들만의 반향실을 구축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렇듯 차이는 종종 극적이고, 심지어 절망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같은 생활 세계에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서로 마주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극히 공포스러운 일입니다.

어쩌면 호랑이나 곰과 동거하는 것보다도 더, 말입니다.


또 다른 시간적 세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2024년에도 거주 세계 사이의 간극은 여전할 것입니다.

저는 더이상 그러한 세태에 낙관적인 희망을 가지진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은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없겠지요.

우리는 저마다의 세계에서 나름의 법칙과 상식을 가지고,

눈앞에 놓인 곤경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바람직한 삶의 행태에 왈가왈부하거나,

하나의 좌우명, 하나의 신조에 몰두하거나,

이른바 동기부여를 위한, 어떤 교훈과 주장이 담긴 글이나 말들은

하나 같이 기묘한 작업에 종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들은 무엇을 논하고 싶은 걸까요?


모순적이게도, 사회라는 것은 결국

내가 타인에게 나 자신이 믿는 긍정적인 영향을

온전히 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믿음 덕택에,

그 상호작용의 지평이 존속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사회엔 수많은 세계가 거리를 거닐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종종 공동의 세계로 접어드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니까요.

걔중엔 단순한 착각 이상의 무언가도 있으리라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어떤 기념일도 따로 챙기지 않는 저에게,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냐고 누군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땐 대답이 궁색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따뜻하고 안락한 주변으로부터 행복감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적막과도 같은 고요함 속에서,

그럴듯한 생각을 떠올리는 데 만족감을 느낍니다.

누군가의 기념일은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것이 바람직하지만,

누군가의 기념일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속에서,

그러나 평안한 행복을 느낍니다.

특정한 행복의 양태를 '정신적 자기위로'로 취급하며,

결국엔 너도 이른바 '보편적 즐거움'의 기회가 주어지면,

그것을 향유할 것 아니냐고 냉소를 짓는 이들에게

저는 그와는 대조되는 거주 세계의 존재를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거주 세계의 차이는

단순히 누가 알려주거나 책에서 읽는다고 인식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 궁리하고 관찰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체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선,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다는 말은 그저

뻔하고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마치 운동을 하는 게 건강에 좋다던가,

다른 사람에게 항상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굴어야 한다는 말처럼요.


일련의 흐름에 따라, 끝으로 물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저는 그저 저만의 세계에서, 어떤 독백을 감행하고 있을 뿐인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주 세계의 일부는 우리에게 맹목적으로 주어집니다.

마치 눈앞의 벽돌처럼요.

하지만 우리 세계의 많은 부분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는 개인이 마주한 문제에 대해 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귀속시킨다거나,

별안간 '노력'만을 강조하는 어떤 무지몽매함을 염두에 둔 생각은 아닙니다.

어쨌든 우리는 벽돌을 치워버릴 수도 있고, 쌓아갈 수도 있습니다.


연말이 또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그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작년에도 그랬듯이요.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이번에는 어떤 이벤트가 일어날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떤 일상을 조성하는 게 마땅한지 생각해 보는 것이겠지요.

올해는 다르다며 연초부터 특별한 결심에 몰두하는 일은

그래서 대개 실패하는 듯합니다.

그러한 결심의 기회는 매년 찾아오기 때문에,

연초라는 특별함에 추동된 동기 부여가 시간이 지날수록 바래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 년의 시작이라는 특별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출생이라는 삶의 시작에 비하면 말입니다.

기념일이라는 고유함은 실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와 똑같은 시간 단위인 '오늘'이 이어지는 일상의 흐름에 비하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회의주의뿐일까요?

진정한 인식은 극단적인 특별함과 견주어,

달력에 산재해 있는 기념일들의 가치를 폄하하는 냉소에 있는 걸까요.

시지프의 삶에 도취된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삶은 고통이다'는 표어의 의미는 곧장 명확히 드러나겠지요.

그는 여전히 시지프의 삶이 고통이라고 단정 짓고 있지만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심신을 지키기 위한 좋은 전략일진 몰라도,

사회나 그 사회의 미래에 기꺼운 미덕은 아닐 것입니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고, 수많은 사람이 지나갔듯 저 역시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불어오고, 또 하루가 흘러갑니다.


그렇기에 여느 하루와 다를 바 없는 심정으로,

또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내일을 고대하며,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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