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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Dec 30. 2022

기념일에 대한 소고 2

유독 많은 일이 일어난 듯한 한 해였습니다.


'역대급' 무더위와, 그에 견줄만한 한파가 계절의 양극단에 자리했습니다.

이런 사태는 앞으로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사람들의 의지를 북돋는 문구가 미디어 상에서 유행하는 한편,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의 참사가 이태원에서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으며, 상상하기도 힘든 재난이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바뀌기도 하고, 세계 규모의 암호화폐 거래소가 망하기도 했습니다.

물가와 금리가 오르고, 부동산 문제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긴 시간이 흐른 뒤에, 2022년이 어떠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에 무어라 답하는 게 좋을까요?

우리는 지난 시간들을 어떻게 기억하는 게 좋을까요?



부분의 의미는 전체의 상(像)에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순간들 역시, 인생의 긴 여정에 비추어 볼 때야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내일이 되면 끔찍했던 것으로 변모될 수 있습니다.

지난날 우울하고 힘들었던 순간이 먼 미래를 지탱해줄 밑거름이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러한 평가들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변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작 '현재'의 우리 자신은 스스로 무슨 의미를 구축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난한 투쟁을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미로 속에 갇힌 개미처럼, 미로의 완성본은 알지 못한 채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벽을 더듬으며 어딘가로 향할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미로 속 개미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결말의 다양성입니다.

미로 속 개미는 미로에서 탈출하거나, 탈출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말을 맞이할 따름입니다.

반면 인간은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길의 끝자락에서,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물론 어떤 이의 죽음은 그가 살아온 삶의 의미와 유리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천재지변에 의한 죽음이나, 불가피한 사고로 인한 죽음, 또 어떤 면에선 자살 역시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야기에 내재된 가치가 빛바래지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죽음의 형태가 어땠을지언정, 그 삶이 어땠을지언정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고, 그 기억이 가져오는 영향력을 내 삶에 허용한다면

그리하여 그의 이야기를 내 삶의 일부로 편입시킬 수 있다면

이야기는 계속되고, 끝내 온전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기념하고, 또 기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념한다는 것은 곧, 기억하는 일입니다.


저는 제가 '지식의 저주'라 이름 붙인 독특한 사태를 종종 경험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잘못을 했는데, 그것이 잘못인지 몰랐다면

그것을 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 잘못을 억제할 수단을 마련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건 여러분의 잘못이 아닐 겁니다.

잘못은, 책임을 묻는 일은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나 적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때리는 게 잘못이라는 걸 진정 모르는 아기에게, 폭력의 책임을 물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반면 여러분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사려 깊고, 선량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여러분이 어떤 게 잘못인지 알고 있다면

그것을 했을 때의 여러분은 '잘못한 사람'이 됩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이렇게 책임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렇게 귀찮고, 괴롭고, 저주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기억하지 않는 삶은 편할지 모릅니다.

이태원 사태가 일어난 지 두 달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벌써부터 그 참사를 언급하는 게 '지겹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군대에선 여전히 죄 없는 청년들이 시답잖은 사고나 부조리로 죽음에 이르지만

군대는 으레 그런 곳이라며, 그 모든 죽음을 '일상' 정도로 정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언급하면 '틀딱'이라고 욕하고,

고작 몇 년 지난 기억을 되새기는 일에 구질구질하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 몇 년이 더 지나면 핼러윈 행사 같은 축제를 왜 이렇게 통제하지 못해서 안달이냐,

무슨 독재국가냐며 SNS 상으로 궁시렁대고, 술집에서 볼멘소릴 하는 이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매년 6월 25일이 되면, 총탄이 빗발치고 폭격 소리가 울려 퍼지는 전장을 전전해야만 했던

이름 모를 병사들의 기분을 상상하곤 합니다.

땀과 흙, 피로 범벅이 된 몰골로 무거운 총을 매달며 달리는 그들의 감각을 가늠해보곤 합니다.

사망자 수로나 서류상에서 집계되는 그들의 이야기는

자국을 비하하고, 앞서 간 이들을 조롱하고, 자신이 완전한 자유 속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오늘날의 세태에서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까요?

그들이 편입된 이 사회의 이야기에, 그들의 자리가 온전히 마련되어 있나요?

다른 이야기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들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들을 기념하고 있나요?


기념일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특별함, 행복, 희소한 즐거움, 축제나 축복 같은 걸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한 가치들이 귀해진 세상이라 그런 것이겠지요.

저는 이러한 세태 자체가 문제라 생각하고 싶진 않습니다.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고,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자격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동시에 저는 귀찮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며, 종종 저주스럽기까지 한 '기억하는 일'이

고통스럽고, 참담할지언정 마주해야 할 것들을 마주하고자 하는 '용기'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2022년이 어땠냐고, 한 마디로 요약해주길 요청하는 누군가에게

엄청난 무더위와 한파가 동시에 들이닥친 해였다고,

스포츠 스타들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한편,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치기도 했다고,

지구촌 한 지역에선 전쟁이 지속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선 대통령이 바뀌기도 했다고,

그리고 또한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있었던 한 해였다고 말할 수 있기를 저는 소망합니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짤막한 언어적 매개로 요약되어선 안 된다고 덧붙이면서요.



어쩌면 내년에는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쩌면 더 많은 것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책임에 시달릴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미래를 각오하는 일은 불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편한 결심 속에서 숭고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인간성'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또한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인간성을 추구하는 게 미덕인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수많은 투쟁을 앞두고 있는 이들에게,

용감함을 지향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고자 하는 여러분에게,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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