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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Dec 30. 2021

기념일에 대한 소고

어려웠던 올해도 이제서야 지나갑니다.


사람들은 삶의 곳곳에서 다양한 고통과 어려움을 마주합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시련을 더 나은 내일의 징표로 삼곤 합니다.


지금 조금만 더 버티면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

이렇게까지 힘들었으니까 나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사람들은 고통에서 의미와 대가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정작 정말로 어려운 시간을 지나온 사람의 앞날에 마련되어 있는 건 또 다른 시련입니다.

고통은 끝나지 않고, 어려움은 계속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의 끝자락에서 의미를 발굴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합니다.

고통은 고통이고, 괴로움은 괴로움일 뿐입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있는 소비지상주의와 쾌락주의는 그런 맥락에서 사람들의 절망감을 대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물건을 쇼핑하고 시간을 소비하면서 비루한 세월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사색과 숙고로부터 오는 갈등이나 괴로움을 감각적 쾌락의 지층 밑으로 밀어 넣습니다.

마치 애당초 삶에 어떠한 초라함이나 어려움도 없었다는 듯이요.

그러나 삶에 조금이라도 진지한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니, 삶에 대한 기대를 내던진 사람들 역시 내심 알고 있습니다.


올해가 힘들었던 것만큼이나 내년도 힘들 거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내년에 힘들 만큼이나 내후년도, 삶이 끝나기 직전까지도 우린 대체로 어려운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요.


물론 삶에 고통과 어려움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고 행복을 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구원은 없을 겁니다.


인생의 긴 여정에 비추어보건대, 우리는 지극히 찰나의 순간에만 호사를 누릴 뿐입니다.

그 경험으로부터 눈이 멀어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시련을 '감당할만한 것'으로 바꾸는 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낙관의 연금술은 환상일 뿐입니다.

낙원이 도래했다고 믿는 건 가능하지만, 낙원이 실제로 도래하는 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세요.

지금도 여전히 굶어서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과학자들은 이 불의한 시대를 '인류세'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지구에 끼친 해악이 지구의 기나긴 지질시대 연표의 끝자락을 장식할 정도라면서요.

범죄는 사라지지도, 그다지 줄어들지도 않고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서로를 미워하고 분노하기에 바쁩니다.

혹은 현실을 왜곡하거나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세계를 연결하는 글로벌 연결망을 제공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나 연결되어 있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국의 불행은 얼마나 해결됐으며, 가족과 친구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깊어졌습니까?

사람들은 예의 바른 얼굴을 앞세워 서로를 기만하기 바쁘고,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는 부각되지 않고 다만 조롱거리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것이 과장 같다면 환경운동, 성평등주의, 빈부격차 등의 이슈에 얽혀 있는 대중의 냉소를 끈기 있게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정치인들은 좌우 가릴 것 없이 네거티브만 일삼고, 진영논리에 매몰된 사람들은 타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을 뒤로하고 그저 서로 사랑하며, 소박하게 삶을 꾸려가는 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을 미래 세대나 의식 있는 사람들의 축복으로부터 기대하진 마세요.

그들은 '소박하지만 만족스런 삶'이 눈 돌린 모든 문제를 감당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으니까요.


내일은 '일 년에 한 번뿐인' 연말입니다.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뿐인' 기념일을 챙기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달력에 새겨진 기념일을 기대하고 축하하느라 실은 '일 년에 두 번인 날'은 단 하루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일 년에 한 번뿐인 것만큼이나 12월 30일도 일 년에 한 번 뿐입니다.

다른 모든 날과 마찬가지로요.

오히려 매번 다른 방식으로 지나가는 평범한 날짜들과는 다르게, 오로지 기념일만이 매년 동일한 구성으로 마련됩니다.

크리스마스는 항상 캐럴과 트리, 상투적인 인사말과 사랑이라는 주제가 세계 곳곳에서 피어나는 날입니다.

연말은 내년의 행복과 번영을 기약하며 기대와 축복 속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이지요.

반면 12월 30일에 어떤 이슈가 도래할진 그날이 되기 전까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기념일의 가치를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희소성'의 측면에서 추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닳고 닳은 반복과 재현에서 찾고 있는 것이겠지요.


기념일은 특별한 행복이 예비되어 있는 날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즐거움이 우릴 반기는 날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기념일을 챙기려는 이유는 의외성을 발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교하게 잘 짜여진 행복의 기성품을 만끽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말로 특별한 삶의 이벤트는 출생과 죽음뿐입니다.

저는 생일이나 기일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출생의 그날과, 죽음에 이르는 그날의 특별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놓인 무수한 기념일들은 아마도 우리네 삶의 균형을 잡아주기 위한 푯말 같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뻔한 이정표라고 해서 그 가치가 바래지는 건 아닙니다.

매년 비슷하게 반복되는 크리스마스나 연말이 대체로 즐겁듯이 말입니다.


반복이 가치를 앗아가지 못하는 건 기념일 뿐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무수한 고통과 시련을 앞두고 있습니다.

괴로움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괴로움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삶은 괴로움을 극복한 게 아니라 도망자이길 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은 끝나지 않고, 그것은 내년에도 반복될 겁니다.

우리의 삶으로부터 요구되는 투쟁은 죽을 때까지 반복될 것입니다.

그 투쟁은 우리에게 구원도, 행복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문제로부터 싸워나가야 합니다.

반복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투쟁 역시 반복해야 합니다.

싸우지 않는 인생은 괴로움에 질식되거나 삶으로부터 도망치기 마련입니다.

어느 쪽이든 온전한 삶도, 온전한 죽음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상투적인 인사말을 뒤로하고,

저는 제가 좋아하는 말로 이 보잘것없는 생각들을 끝맺고자 합니다.

어려운 한 해를 앞두고 있는 이들에게,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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