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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 Feb 25. 2024

대학생의 졸업 기념 현수막에 대한 단상

#50. 성취, 미신


  졸업 시즌에 들어서서 그런지, 대학교 내부나 그 근방의 길가에 대학생들의 졸업을 기념하는 현수막들이 잔뜩 걸려 있다. 그것들에 새겨진 모든 글귀나 디자인을 유심히 관찰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른바 '주접'의 형태를 띠고 있는 듯하다. 물론 웃자고 그렇게 해놓은 것이리라. 어쨌든 현수막의 내용과 형식에 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또한 자신의 존재를 전시하여 관심을 이끌어 내고, 그 존재감을 과시하여 공고히 하고 싶어 하는 욕구 자체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타인의 관심을 갈구한다.


  그런데 아마도 독특하다고 생각되어야 할 것은, 여기저기에 난삽하게 현수막을 매달아 놓으며 무언가를 기념하거나 축하하려는 세태 그 자체일 것이다. 이러한 세태의 독특성은 비대한 자아의식을 전시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인 SNS의 존재와 일회용성 현수막의 남용으로 인한 쓰레기 문제를 결합해서 생각할 때, 보다 분명하게 인식된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자기중심적 과몰입을 글로벌 이슈로 대두된 지 오래인 기후 변화에 그나마 나은 방향으로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이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이들은 구태여 발짝 더 나간다. 이들은 물질적 구성물(조만간 쓰레기가 될)에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새기고, 그것을 벤치와 기둥, 나무들 사이를 비집어 설치해 자랑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하다.


  현수막 쓰레기 문제에 관한 일차적 문제의식은 선거철에 남용되는 홍보성 부착물들 때문이었다. 선거철이라는 제한된 시기에만 사용될, 사실상 일회용품에 불과한 것들을 대량생산하여 해당 지역의 온갖 장소에 도배를 해놓으니, 선거가 끝난 뒤엔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것들을 누가 보관하겠는가? 아마 당사자 자신에게도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번잡함, 낮은 수준의 시민 의식을 동경했는지 대학생들도 이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을 선거에서 뽑아달라고 현수막을 걸어 놓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걸어 놓는 기간조차 선거 후보자들보다도 짧다. 단지 덕지덕지 붙어 있는 현수막 더미 속에서도 자신을 표출하려는 전시 경쟁과 그 미관상의 혼잡함으로 졸업 시즌을 장식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이념 아래 이 모든 번잡함과 부덕함을 감수한다. 그 목적이란,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고 자신의 존재를 물질적 형상으로 내세우기 위함이다. 나는 그 성취의 가치를 저울질하여, 어떤 경우엔 그런 요란법석한 기념이 정당하고, 어떤 경우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어떤 성취적 가치를 지니던 간에, 그것을 '기념하는 방식'이 미개하다는 것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와 아주 유사한 세태를 곧장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원시인 부족장의 큼직한 동상 세우기, 혹은 거대한 무덤 만들기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원시인들은 부족장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러한 작업들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수행의 근저에 깔린 믿음은 이런 작업들이 어떤 주술적인 효과를 야기할 것이라는 것, 즉 부족장을 닮은 거대한 동상이 '실제로' 부족장의 힘을 충만케 하고, '객관적인' 존재감을 증대시켜 줄 것이라는 주술적 믿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단순하고 순진한 생각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에서 원시인들을 비판하거나 비웃을 순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나름의 접근 가능한 최선의 지식과 상황 조건 속에서, 그들이 도모하는 바의 최대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와 결과물이 숭고할 수 있는 것이고, 문화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태를 오늘날 재현하려고 할 때, 사태는 비로소 미개하고 야만스러워진다. 특히나 이런 주술적 믿음의 원시적 추구가 우리의 생활 조건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문제에 부정적으로 기여할 때, 더욱 그렇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그런 주술적 믿음과 행태가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비효과적인지 알 수 있는 수많은 지식의 원천에 접근할 수 있다. 사실, 이른바 지성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대학교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표가 바로 이런 종류의 탈주술화,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역량의 고취일 것이다. 그럼에도 바로 그런 교육 기관을 졸업하면서 그 졸업을 기념하기 위해 제사장과 주술사의 이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졸업 기념 현수막에 적힌 헌사가 대학교 학적의 차원에서 볼 때, 사실상 그들의 묘비명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혹자는 이에 뱁새눈을 뜨며, '대부분의 사람의 일생에서 한 번뿐일 성취의 순간을 그런 식으로 기념하는 게 그렇게 잘못이냐', 혹은 '현수막 쓰레기가 아무리 많아 봐야 다국적 기업들, 중국의 공장들이 쏟아 내는 쓰레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 기후 변화에 별 영향도 없을 텐데, 그렇게 비판적으로 접근해야겠냐' 라는 식으로 말할지도 모르겠다.


  기념할만한 성취나 순간, 사건에 대해 왜 어떤 사람들은 그저 좋은 지인들과 괜찮은 식사를 같이 하는 것 정도로 멈춰 설 수 없는 걸까? 왜 사람들은 기껏해야 SNS에 자신의 성취를 게시하는 선에서, 일면식도 없는 불특정 다수의, 그러나 온당한 격려와 관심을 받는데서 그칠 수 없는 걸까? 도대체 현수막을 거는 것이 그들이 이뤄낸 성취의 가치에, 혹은 그 이후의 당사자의 처우에 어떤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고 그러는 걸까? 그들 자신조차 다른 사람들의 현수막과 남의 자기 전시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따라서 이는 어느 정도 자폐적 행태라고 볼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엔 다를 것이라는, 나는 '더 특별하다'는 근거 없는 믿음의 발로가 경쟁적으로 나타난 결과가 바로 이러한 세태인 것이다.


  또한 쓰레기의 비중에 관해 덧붙이자면, 그런 종류의 합리화가 용인될 수 있다면, 당신이 비판하는 모든 공장과 다국적 기업들도 똑같은 합리화에 의존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어차피 내 공장에서 쓰레기와 오염 물질을 줄여봐야, 다른 공장들에서 똑같이 쏟아내는 총량에 비하면 별 거 아니니, 그냥 양껏 버리련다는 논지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타인에게 어떤 당위를 요구하고자 한다면, 그전에 최소한 자기가 그 당위를 실천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황금률조차 온전히 체화하지 못한 채 졸업하는 대학생들이 있다면,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어려운 시국이고, 암울한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냥 그런 문제 상황들을 옆으로 치워둔 채, 당장의 자기 자신이 바라는 즐거움과 욕구 분출에 전념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요즘 대학교가 직업 훈련소처럼 변모했다지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본인의 삶, 선택에 관해 적절히 고민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갖춘 채 졸업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인식에의 얄팍한 동조 내지 최소한의 반성이나마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이 글을 21세기의 도취적 주술사와 제사장들에게 헌정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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