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올라 눈을 감는다. 무대 전면의 천장에 매달린 벌집 모양의 LED 조명이 감은 눈 속에서 잠깐 그 형태대로 붉게 보였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을 살짝 다물고선 좌우로 입술을 비비고 있다. 의도적으로 한번 비벼보는 것이다. 꺼끌꺼끌하게 일어선 입술이 느껴진다. 터서 갈라진 그 얇은 아랫입술의 조직을 입 안으로 밀어 넣고선 앞니로 끊어냈다. 막 요리되어 나온 따뜻한 음식 위에서 하늘거리는 가쓰오부시처럼 얇은 입술이다. 이제 그 얇고 질긴 입술 조직을 앞니로 두어 번 짧게 씹고서 혓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날이 건조하지도 않은 한 여름인데 왜 입술이 다 터져있을까? 바빴던 회사일 몇 가지를 떠올려 본다.
혓바닥 위에 올려놓은 입술을 침과 함께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어 삼킨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내 입술을 먹으며 생각해 보니 성찬식 할 때의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 같다. '예수께서 떡을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내 몸이라 하시고...... 이런 내가 내 몸을 먹어버렸네.' 계속해서 집중하지 못하고 잡생각이 떠오른다. 다시 노래에 집중해 보자. 나는 생각을 멈추고 눈을 뜬다. 나의 작은 성가대는 노래 부를 준비를 마쳤다. 우리의 앞에 있는 지휘자가 악보를 보라고 손짓을 하기 전, 나는 입술의 두께만큼 혀를 살짝 내밀고서 입술 위아래에 침을 바른다. 다른 성가대원들의 악보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쟤가 걔야."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우리 반의 반장이었던 친구를 따라 교회 성가대 연습실에 처음 발을 들였다. 같은 교회에 다니던 그 친구가 혼자 성가대에 가입하기 민망하니까 함께 들어가자고 얘기해서 따라온 것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것은 아니다. 사실은 나도 이 성가대에 관심이 있었다. 그렇게 나와 함께 교회의 기다란 나무 의자에 앉아 두리번거리던 내 친구는 나에게 반주하는 여학생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저 여자애가 어제 말했던 걔야. 어때?" 단발머리에 교복과 비슷한 느낌의 셔츠와 치마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이가 보였다. "어, 진짜로 예쁘네."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나도 그 애를 알고 있다. 반장인 친구처럼 나도 그동안 그 애를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내 친구는 얼마 전에 저 여자애를 사이에 두고 남자애들 몇 명이서 싸움을 했다고 말했다. 이 얘기는 처음 들었다. 다들 저 여자애를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확실히 예쁘게 보인다. 더군다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은 실제보다 미모가 더 뛰어나 보이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이렇게 성가대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였다. 당시의 성가대는 모두 고등학생으로 이뤄져 있었고, 연습실에는 내 또래 30명 정도가 있었다. 한 중학교의 음악 선생님이던 성가대 지휘자 선생님은 새로 들어온 나를 환영해 주면서 테너, 베이스 중에 하고 싶은 파트를 선택하라고 했다. 처음엔 친구와 함께 테너 자리에 앉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뒤에는 베이스로 이동을 했다. 이날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선생님이 나누어 주는 악보를 보고선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로 파트를 나눠 노래를 불렀다. 학교에선 파트를 나눠 노래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남고를 다니던 내가 여자애들과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도 없었으니, 일요일마다의 성가대는 학창 시절 기억 중 즐거운 활동이었다.
이때 이후로 중년인 현재까지도 여전히 성가대를 하고 있으니, 무언가 전문적일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아직도 악보에 쓰여있는 글자와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것이 많다. 베이스인 내가 늘 보아야 하는 낮은음자리표의 계이름을 읽으려면 지금도 검지 손가락으로 하나씩 꾹꾹 눌러가며 읽어야 한다. 노래도 마찬가지여서 최대한 돋보이지 않고 남들에게 묻어가려 노력하는 성가대원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비전문적이고, 심지어 배우려 노력도 않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것이 나 스스로도 의문이긴 하지만 실제 그렇게 지내고 있다. 회사에서, 더 넓게는 사회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선 보다 더 전문적이고, 보다 더 돋보이려 하고 있지만, 그와 반대로 여기 성가대에서는 그저 동참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처음 성가대를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 지휘자 선생님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학교 선생님 앞에서는 다들 주눅 들어 조용하던 친구들도 교회의 지휘자 선생님 앞에서는 아이들과 떠들기도 하고, 심지어 선생님께 대들기도 하며 조금은 더 편한 느낌으로 노래를 연습했다. 그리고 학교에서와는 다르게 우리가 노래를 못하거나 파트별로 음을 잘 익히지 못해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지휘자 선생님은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아침이라 노래가 잘 안 되지? 고등학생이라서 공부하느라 다들 지치셨나? 그래도 성가대에 서면 좀 웃고, 반짝거리는 사람처럼 보이게 해 보자고. 자! 다들 입술에 침 한번 바르고, 억지로라도 스마일 해봐." 그러면서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본인 입술 앞에서 쫙 벌리고, 또 립스틱 바르는 제스처를 하곤 했다.
지난 일주일, 한국으로 짧은 출장을 다녀오기도 하고, 본사의 대표와 화상 회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 다음 주에 이곳 베트남에 방문하는 본사 임원을 상대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고, 무엇보다 맡고 있는 업무에서 좋은 실적을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든 더 바쁘게, 더 열심히 살아내려 하며 입술이 터진 것이다. "아멘." 하고 대표 기도하던 분의 마지막 단어가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이제 성가대가 노래를 시작할 차례이다. 눈을 뜨고 "크흠"하며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회사 일에 대한 생각은 버리고, 여기에 집중하자. 지휘자를 바라본다. 성가대 앞에 서있는 지휘자는 우리에게 억지로 더 웃는 표정을 크게 지어 보이며, 악보를 들어 올리라는 사인을 보낸다. 그리곤 반주자에게 손짓을 했다. 피아노의 첫 음을 듣고, 딴생각을 하느라 잠시 잊었던 내가 시작할 음을 기억해 낸다. 지난주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난 거칠어진 입술을 뜯어내 삼켜버리고, 입술이 반짝거리게 침을 살짝 바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