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일찍 들어왔네?" 내가 생각했던 시간보다 조금 빨리 집으로 들어오자 주방에 서있던 아내가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건넨 인사말이다. "응, 원래 저녁 약속 잡을 뻔했는데 취소됐어." 난 손을 쓰지 않고 양 발로 구두를 벗으며 대답했다. 아직 아내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싱크대 앞에 서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을 것임을 짐작으로 알 수 있다. 아내도 내가 어떤 모양으로 신발을 벗고 있을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신발장에 구두 잘 올려놔." 늘 있는 퇴근의 모습이다. 이러한 퇴근길이 몇 번이었을까? 결혼한 지 15년이 되었고 이는 5천 일이 넘는 날이니까, 그중에 절반만 잡아도 아니 1/3이 이런 날이었다고 쳐도 거의 1천8백 번에 해당한다. 오늘과 같은 방식의 퇴근길 인사는 1천8백 번쯤 했을 것이다.
"저기 테이블에 있는 그림 좀 볼래?" 이제 아내는 주방에서 나왔고, 거실로 들어온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1천8백 번쯤 하던 인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와! 이거 뭐야?" 난 검은색의 네모진 샘소나이트 백팩을 벗어 소파 옆에 던져놓고 거실의 테이블로 걸어가 작은 캔버스에 있는 귀여운 흰색 강아지 그림을 보며 물었다. "그거 둘째가 그린 거야. 방학에 부모님 댁에 가서 봤던 해바라기 그림이 마음에 들었나 봐. 할머니가 해바라기 그림이 있으면 집에 좋은 기운이 들고 또 재물도 들어온다고 얘기해서 우리 집에도 돈 많이 들어오라고 자기 식대로 그렸대." 초등학생인 아들 녀석이 집에 좋은 기운이 들어오라고 그린 것이라는 말에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이 날부터 지금까지 거실에 놓여있는 플렉스 강아지
해바라기 그림처럼 황금색을 기본적인 배경색으로, 귀여운 흰색 푸들이 플렉스가 쓰인 금 목걸이에 멋진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림이었다. 배경의 1만 원짜리 돈에도 금칠을 해두었다. 부모님 댁의 해바라기 그림에서 본 황금색이라든지 전체적으로 환한 느낌의 포인트들은 다 들어있는 것 같았다. "둘째 어디 갔어?" 해바라기 그림을 자기식으로 해석한 귀여운 아들을 칭찬해 주려고 찾았는데, 축구하러 나가고 없었다. 그리고 이 날부터 지금까지 이 그림은 우리 집 거실 책장에 놓여있다.
아이의 말처럼 한국의 부모님 댁에는 해바라기 밭이 그려진 액자가 있다. 비단 우리 부모님 댁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해바라기 그림이 있으면 좋은 기운이 들어온다고, 특히 재물이 들어온다고 생각하여 걸어두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친척들 집에도 있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도 봤던 그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집에 좋은 기운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좋은 의도이니 그러려니 하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좋은 기운을 기대하고 나쁜 기운을 막는 어떤 막연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사례로 생각하게 된 또 다른 예를 보면, 한국을 떠나 베트남에 와서 지내면서 가게마다 놓여있는 제단을 보고 놀란적이 있다. 종교적인 자유가 제한될 것이라 생각되는 공산국가에서, 재래시장이든 현대식 백화점이든 상관없이 가게 입구, 또는 별도로 마련된 구석진 공간에 초와 향을 켜고 음식을 놓을 수 있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관우라든지 부처님 같은 조각이 놓여있고, 심지어 성모 마리아나 예수님과 같은 조각이 놓인 곳도 있었다.
베트남 쇼핑몰의 한 귀금속 판매점 매대 하단에 있는 작은 제단
처음에는 그저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에서의 독특한 문화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려서부터 이런 것들을 많이 본 적이 있다. 동네 가게의 문 위에 걸려있던 북어라든지, 새해가 되면 붙여야 한다고 하던 '입춘대길'이라는 글자도 마찬가지의 효능을 기대하며 걸어두었던 것일 게다. 부모님 댁의 해바라기 그림이나 둘째가 그려놓은 플렉스 강아지도 다 마찬가지의 것이지 않을까?
늘 같은 날들이 반복되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우리의 인생. 나의 노력,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늘 만나는 그저 그런 하루에서 내가 예측할 수 있는상황들을 기대하지만, 가끔씩은 내가 의도치 않았고 도저히 설명되지도 않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하는 것이 세상을 사는 모두의 인생인가 보다.
둘째의 그림이 우리 집에 좋은 기운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날 퇴근하며 귀여운 플렉스 강아지를 보고서 한참 동안 미소를 지은 것도 생각하지 못한 기쁜 일이었으니, 좋은 기운 하나를 불러들인 것은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