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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Dec 18. 2023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리뷰

 

  끝내 고난을 넘어 승리를 얻어내는 <록키>의 영웅 서사와는 다르다. 또한 곁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인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도 다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걷는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듣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한 젊은 여성 프로복서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희망을 향해가는 따뜻한 이야기. 추운 연말, 우리에게 이보다 훈훈한 위로가 있을까?   

  

  선천성 청각 장애자인 케이코(키시이 유키노)는 낮에는 호텔 청소부로 생활비를 벌고 일이 끝나면 도쿄 어느 주변부에 있는 오래된 복싱 체육관으로 향하는 프로 복싱 선수이다. 자주 연극 무대가 삶의 공간으로 비유되듯 때리고 맞고 죽일 듯이 대들고 피흘리며 쓰러지는 처절한 링은 이 고단한 주인공의(아니 우리 모두의) 삶을 닮았다. 그러나 싸움은 홀로이되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외침과 응원이 링 밖에서 넘쳐난다.    

  

  한 사람의 고난이 결코 한 사람의 문제일 수 없는 보편성을 그리는 것은 영화의 공적 책임일지도 모른다. 과연 장애가 없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을 온전히 듣고 보는가? 그 물음에 대답을 하듯 영화는 소음들을 소리의 자리에 놓는다. 우리가 무심하게 놓쳤던 주변의 소리와 빠르거나 느리게 제각각 속도와 리듬을 달리해서 움직이는 풍경들을 펼쳐낸다. 스크린을 집중해서 응시하니 늘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세상이 보인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그 사이 수많은 세상의 소리와 풍경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 영화는 케이코가 그녀를 기다리는 ‘집’으로, ‘가족과 이웃’으로 돌아오는 귀환의 서사이기도 하다. ‘승’이 아니라 ‘패’의 경험이 일어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이다.  ‘승-승-패’인 케이코의 3전의 전적에서 마지막 ‘패’가 케이코를 좌절에서 일으켜 세우며 그제서야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케이코의 방황을 가장 근심스럽게 지켜보는 이는 엄마(나카지마 히로코)이다. 경기의 관중석에서 엄마가 그 순간 느꼈던 표현하기 힘든 마음이 카메라에 찍힌 화면에 여실히 남는다. 처음에는 제법 정상적으로 찍혔지만 점점 경기가 과열되어 감에 따라 화면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색감이 뒤섞여 색을 알 수 없는 빛들이 속도를 실어 빗살같은 무늬로 화면에서 날아간다. 엄마의 마음 졸임과 경기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말보다 진하게 느껴진다. 나중 케이코가 남동생에게 말한다. ”두려우니까 달려드는 거라고“.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든 싸움에 답이 없을 리 없다.     


  미친 듯 달려들지만 링 위의 싸움은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사람은 섬’이라는 통상적 언명은 틀렸다. 링 밖에서 그녀의 코치는 목이 터져라 작전을 외친다. 비록 코치의 고함을 그리고 링위 심판의 카운팅을 들을 수 없고 상대 선수의 반칙을 어필할 수도 없지만 죽을 듯이 달려드는 그녀 뿐만 아니라 외친들 들을 수 없는 작전 지시를 목이 터져라 링의 코너에서 외치는 코치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치열한 삶을 산다. 그녀가 승리한 이후 인터뷰를 하는 기자에게 체육관 회장이 말한다. “케이코는 눈이 좋아요...재능은 없으나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결핍이라는 부정적 조건을 이겨내는 것은 바로 인간적 결기이며 기품이다.  

   

  그러나 개인의 치열함이 시대의 변화에 맞설 수 있을까? 사양길에 있는 복싱장처럼 자신의 삶도 그런 것 같아 복싱을 그만두려는 마음을 적은 편지를 케이코가 체육관 회장에게 건네 주려 복싱장을 슬며시 들어설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자신의 경기를 다시 복기하고 있는 회장의 모습이었다. 아직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감동이 케이코를 일으켜 세운다. 회장의 아내 또한 케이코가 매일 써 내려 간 성실한 훈련과 마음을 적은 일기장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회장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소리 내어 읽어준다. 케이코가 남긴 글이 소리가 되어 전달된다. 내가 할 수 방식으로 나의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 결국 내 마음을 읽고 손을 내밀어 준다. 그게 세상의 열린 가능성이다.     


  특히나 소리가 중요한 기타리스트인 남동생 세이지(사토히미)는 누나와는 서로 건널 수 없는 사이일 것이라는 관객의 우려를 멋지게 배신한다. 동생은 막힘없는 수화로 누나의 속내를 질문하며 누나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남동생의 여자 친구는 수화를 배워 먼저 케이코에게 인사를 건넨다. 자꾸 방으로 숨으려는 케이코를 세상 밖으로 끌고 나오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간다. 늦은 밤 아파트 밖 마당에 셋이 모여 서서 여자 친구가 추는 현대식 춤을 흉내내고 즐거이 웃는 케이코의 모습에 관객은 일순 안도한다. 어느 순간인지 묵직하고 어두웠던 케이코가 웃기 시작했던 것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선수와 상대 트레이너가 완벽한 펀치 리듬의 합으로 향해가는 로드무비 이기도 하다. 그들의 소통은 판서(版書), 입의 모양, 속도와 리듬을 실은 움직임이다. 서로에게 몰입하는 두 사람의 시선의 집중과 호흡은 다른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만큼 진지하다. 처음에는 어설프고 엇박자가 나던 리듬이 예술적이리만치 깔끔하고 정확한 리듬과 소리로 완성되는 순간에는 ‘네’가 아니라 ‘그들’이 이루어 낸 ‘완벽함’에 대한 찬탄이 절로 나온다.    

 

  긍정의 파장은 점점 넓혀 세상으로 번져가는 힘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케이코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스크로 가린 입을 볼 수 없으니 직장 동료와의 소통은 단절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제 밝은 기운을 얻게 된 케이코는 생활 현장에서도 친절한 동료가 된다. 이전에는 무심했던 동료에게 침대 시트를 가는 법을 자세한 동작으로 설명해주고 마스크를 내려달라고 부탁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려 한다. 혼자가 아닌 세상에서 소통의 길은 여러 갈래로 나 있다.  

    

  케이코가 다시 힘을 얻어 운동을 하기 위해 기차가 달리는 다리 밑에 새벽에 나와 있을 때 한 또래 여성이 와서 인사를 건넨다. 지난번 케이코가 판정패한 경기의 상대 선수란다. 열심히 자신과 싸워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그녀도 다른 인부들과 함께 새벽 일터로  간다. 그녀도 케이코만큼 최선을 다해 산다. 그녀가 멀어지자 케이코의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차오른다. 결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안고 추운 새벽의 언덕을 케이코가 가볍게 뛰어오른다. 그 길에 검은 실루엣의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길을 걸으며 오고 간다. 삶을 일으키는 것은 말이 아니라 함께 걷는 작은 발걸음들이다. <Small, Slow, But Steady>. 영화의 원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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