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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Jan 08. 2024

영화 <괴물> 리뷰

나와 다른 네가 괴물일까?


  영화를 보고 나면 ‘괴물’이 누구였는지 질문이 남는 영화에서 결말이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일부 관객의 상상력에 꽤 고개 끄덕여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 어두움 뒤 마주하는 푸르고 눈부신 빛으로 막을 닫는다. 동화적 혹은 기능적인 결말일까? 푸른 숲을 헤치고 달리는 아이들의 옆 모습이 드러나는 화면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보는 것만큼인 그들의 모습이다. 보지 못했던 다른 쪽을 알 수 없으니 그들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지킬과 하이드처럼 두 얼굴의 야누스(Janus)는 괴물이 아닌 우리의 실존적 모습이다.  

   

  영화는 멀리 무섭게 불길이 오르는 건물의 화재를 건네보는 한 소년의 뒷모습 실루엣으로 시작한다. 나즈막한 도심 가운데 넓게 자리 잡은 호수의 고요를 휘감싸는 공포가 앞으로 영화에서 전개될 이중적 경계의 혼란을 암시한다. 불과 물. 수많은 문학적, 예술적, 종교적 사유와 은유에 등장하는 소재이다. 대립이면서 하나이고 혼란의 뒤에 정화를 찾는 도식을 <괴물>은 영화적 사유와 미학으로 풀어놓는다.   

  

  싱글맘인 사오리(안도 사쿠라)는 세탁소 일을 하면서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를 키우며 씩씩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이즈음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아들에게 나타난다. 화장실 앞에 마구 자른 머리카락들을 흩어놓는다는지 외짝 신발로 돌아오기도 하고 텀블러에서는 흙탕물이 쏟아져나오고 한쪽 귀를 다쳐 피가 엉긴 붕대를 붙이고 온다. 질문을 하는 엄마에게 대답은 한참 지연된다.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영화적 서스펜스를 높인다. 그러다 채근에 못이긴 듯이 담임인 호리(나가야마 에이타) 선생이 자신을 괴롭히며 심지어 자신에게 돼지 뇌를 가진 인간이라는 폭언까지를 한다고. 

    

 얼핏 우리 사회에 화두로 떠오르는 교권 침해가 생각한다. 교사나 학생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자식에 가한 체벌을 곧바로 항의하는 학부모의 반사적 행동을 말한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도 비슷한 형국이다. 아들을 지키려는 모성이 교사와 학교 시스템을 괴물로 만든다. 모성이라고는 하지만 사건의 본질 여부를 짚어보기 전에 아들 말만을 듣고 격앙된 분노가 사랑을 폭력으로 변하게 한다. 그러나 당장 학교를 찾은 엄마의 항의도 만만치 않은 학교의 벽에 부딪힌다. 

  미봉책만을 내놓는 학교에 화가 난 사오리는 최근 남편의 실수로 차에 치여 죽은 손녀에 대한 슬픔을 겪고 있는 교장에게 다가가 심지어 그녀에게 인간이 아니라는 폭언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돼지의 뇌를 가진 인간이 인간이냐’고 아들이 물었을 때 그건 인간이 아니라고 사오리는 주저 없이 대답하였다. 우연히 작은 쇼핑센터에서 뛰며 소란을 떠는 한 아이의 발을 슬쩍 걸어 넘어뜨리고도 아무 일 없은 듯 차분하고 온화한 얼굴을 유지했던 교장을 보고 서늘했던 기억은 사오리가 단언한 괴물에 다름 아니긴 하다. 교장이 괴물인지 사오리가 괴물인지 모를 이 진흙탕 싸움의 결과는 폭력 교사 호리가 해고됨으로써 일단락 된 듯 하다.  


 그러나 깊게 곪은 상처의 고름을 조금 짜냈다고 안도할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더 큰 상처가 살을 파고들며 썩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괴물과 괴물의 싸움에서 정작 상처받은 호리는 설 곳을 잃은 채 길거리를 헤맨다. 영화는 호리 교사의 시선으로 옮겨간다. 알고 보니 호리 교사도 피해자이다. 사오리가 호리의 설명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교장은 해명할 기회를 주기는커녕 빠른 해결을 위해 사과만을 강요한다. 자신의 교장직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은 학교가 선택하는 합리적 방식이다. 



가장 이슈가 된 미나토 귀의 상처는 같은 반 아이 ‘요리’라는 학생과 친밀감이 없다는 증거로 아이들 앞에서 보란 듯이 요리를 괴롭히다 생긴 상처이다. 모습조차도 예쁜 여자아이 같은 요리가 풍기는 여성성은 아이들에게는 조롱과 괴롭힘의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우연찮게 이 장면을 본 호리 교사는 이 소란을 막으려 하나 저항하던 미나토가 제힘에 겨워 칠판에 부딪힌 것이다. 미나토 다리의 상처도 사건의 진상을 알려는 호리를 피하다 생긴 것이었다. 가해자인 호리와 피해자인 미나토의 공식이 와전된다. 차분하고도 예리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적 미학이 사카모도 유지의 각본과 만나 혼란과 대단한 긴장의 장력을 내뿜는다.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괴물>의 괴물 찾기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옮겨진다. ‘돼지의 뇌를 가진 인간’은 아버지가 자신을 그렇게 비하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요리로부터 미나토가 들은 것이었다. 돼지의 뇌를 가진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는 대답을 엄마인 사오리에게 들었을 때 미아토의 거짓말은 시작된다. 왠지 요리에게 마음이 가는 자신도 인간이 아닌 괴물 같았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머리카락 뭉텅이는 미나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요리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였고 텀블러의 흙탕불은 요리와 함께 나무밑에 죽어있는 길고양이를 잘 보내기 위해 흙과 나뭇잎으로 덮어 작은 화장의 제식을 하다 불이 번지자 당황한 미나토가 근처에 고인 흙탕물을 텀블러에 담아 불을 껐던 것이었다.  호리는 교사로서 애를 썼지만 그의 희생은 미나토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괴물은 미나토이다. 순수한 것이 곧 아이들의 세상이라는 믿음도 위험하다. 아이들도 때로 괴물이 된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미나토는 본능적으로 요리에게 마음이 다가간다. ‘남자는 꽃을 좋아하면 역겹다’ ‘너도 나중에 아버지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미는 가장이 될거야’라고 말하던 엄마에게 남녀의 경계가 학습이 되었으니 요리에 대한 관심을 가진 나는 괴물이 아닌가? 미나토의 한쪽 귀의 상처가 상징하는 것은 세상 소리를 듣는 것의 아픔이다. 대신 그들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세상 소리를 듣는다. 땅바닥 맨홀안에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이던 미나토의 귀의 상처 그리고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맨발이 된 요리에게 미나토가 나눠 준 요리의 외짝 신발이 애처롭다. 다름을 놀리고 괴롭히는 반아들도 그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도 모두 세상이 만든 괴물의 피해자이다.   

   

 답을 얻었나 했는데 갑자기 깊은 밤, 마을에 거친 태풍이 불어닥친다. 세상을 피해 사라진 아이들을 찾기 위해 사오리와 호리가 연대한다. 편부슬하에서 자랐던 착한 선생 호리는 무작위로 책들을 뒤져 오탈자를 찾아내는 특이한 취미가 있었다. 보이는 실수를 찾아내는 것에는 뛰어났던 그가 우연히 발견한 미나토의 글에서 요리와의 관계를 짐작하게 된다. 드디어 그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는 진짜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제 어른들에게 중요한 건 세상이 만든 괴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해야만 하는 아이들을 찾는 일이다.     


 눈을 뜰수 없는 비바람과 어둡고 깊은 수로를 지나 미나토가 오곤하던 폐전차에 이르지만 폐전차의 지붕에 난 유리의 흙을 아무리 두손으로 문질러대며 들여다 볼래야 볼 수가 없다. 쉬임없이 몰아치는 비바람 때문에 어른들의 안간힘은 허사가 된다. 혼란과 상처가 아이들 스스로 성장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미나토와 요리는 수로 깊은 속, 폐전차 안에서 ’괴물이 누구게‘ 카드 게임에 열중이다. 작은 전구들의 불빛을 머금은 전차 안은 아이들만의 공간이다. 이 게임에서 ’공격 당했을 때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라는 미나토 질문의 정답인 ’나무늘보‘ 대신 요리는 ‘요리’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다는 대답을 하는 해맑은 요리의 표정에 관객들의 마음은 아프다. 우리가 경계 밖으로 내몰고 시선을 돌리는 동안 자신을 죽은 괴물로 인정한 한 아이의 얼굴치고는 너무도 맑다.   어느 누구에게도 원망이라고는 없는 그런 맑음. 천사의 얼굴이 이러할까?  

  이렇게 <괴물>은 불편한 낯섦을 괴물로 밀어놓았던 우리의 언어적 정의에 그리고 배타적 시선에 불씨같은 틈을 낸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오탈자를 발견해 내곤하던 호리의 시선은 그의 여자친구가 비아냥대듯이 무용한 것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해서 요리를 찾아온 사오리에게 요리의 아버지가 자기의 자식을 “이 녀석은 돼지”라고 말한 단초가 사오리가 아들의 성정체성을 의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아주 작은 관심이 낯섦으로 헤매는 아이들을 구한다. 

큰불이 아주 작은 불씨에서 시작하듯이.

    

 영화의 한 에피소드를 생각해본다. 교도소의 남편을 면회 간 교장이 종이접기를 하며 ’과자도둑‘ 이야기를 한다. ‘과자를 먹고 싶지만 도둑이 그 과자를 빼앗아 갈 것이 두려워 아예 과자 갖기를 포기한다’는 아이의 이야기. 공격 당했을 때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다는 요리도, 과자 갖기를 포기한 아이도 그리고 세간의 지탄이 두려워 속내를 숨기고 사는 교장도 모두 괴물일까?

  

  어느 날 교장이 미나토를 불러세워 자신이 어릴 적 불었던 트럼펫을 함께 불게한다. 소리 내지 못한 목소리 대신 깊고 묵직한 금관의 소리가 공기를 타고 멀리 울려퍼진다. “이야기 하면 순간 불행해 질 것 같아 말하지 못했다”는 미나토에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라는 말을 교장이 건넨다. 누구나 자기다운 존재 그 자체로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물’(aqua)이라는 음악을 배경으로 환상같이 빛나는 푸른 숲을 향해 아이들이 뛰어나갈 때 그들의 환한 모습은 우리 안에 웅크려있던 우리의 ‘괴물’을 바깥 세계로 끄집어낸다. ‘괴상하게 생긴 생물체’는 괴물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재고할 때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모습, 서로 다른 마음들의 집합물인 우리 누구도 괴물이 아닌 사람이 없지 않은가?  다름이 그저 개인의 존재 가치로 받들여지는 미래의 세상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영화로 펼쳐내는 희망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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