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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Apr 02. 2024

'때늦음'이란 것이 있을까?

영화 <리빙: 어떤 인생> 리뷰

 아주 진부한 질문일지 모른다. ‘만약 당신이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라면 무엇을 하겠는냐는...’.실감나지 않는 충격과 슬픔이 우선이겠지만 많은 경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말을 전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느라 무심했던 잊었던 생에 대한 뼈아픈 후회. 미국 유명 작가 딕 브라운의 2컷 만화의 우화성은 예리하다.-“why me?”(왜 저입니까). “why not you?”(왜 너는 안되니?).- 폭풍우 속에서 조난의 위기에 처한 주인공이 신께 외치자 신이 보내는 대답이다. 누구에게나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1952)를 리메이크한 <리빙: 어떤 인생>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본을 쓴 것이다. 50년대 영국이 배경인 영화에서 한 초로의 남성이 시한부에 처하자 삶의 방향을 재설정한다는 영화의 골격은 단순하다. 그러나 휴머니즘적 시선이 강한 세계적 작가가 각본을 쓴 만큼 영화는 풍랑같은 역경에 다친 주인공의 태도를 통해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고결한 품위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극한에 닥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모두가 영웅이다. 

    

 주인공 윌리엄스(빌 나이)는 시청 상급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점잖은 나머지 건조하기까지 한 그는 런던행의 같은 기차를 타고 출근하는 직원들과도 눈인사 외에는 소통이 없는 범접 불가능 상사이다. 공장의 톱니바퀴같이 일정한 메뉴얼에 따라 일하고 출퇴근을 하는 그에게 부하 여직원인 마거릿(에이미 루우드)이 붙인 별명은 하물며 ‘미스터 좀비’이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연옥이 가장 고통스럽다는 상징은 버젓이 현실에 존재한다.     


  그가 하는 최소한의 말은 사무적인 것 뿐이다. 타인이 들어설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벽은 그의 모든 행동만으로도 알 수 있다. 아무런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포커 페이스가 바로 윌리엄스의 얼굴이다. 시청 사무실 그의 커다란 책상 앞이 놓이 서류대에는 그의 앉은 키보다 높은 서류들이 숨막힐 듯 쌓여있다. 그중 직접 찾아와 공터에 아이들 놀이터를 만들어 달라는 가난한 여인들의 읍소와 그녀들이 준비한 서류들도 그 많은 서류들 사이에 낑겨져 잠식당하고 만다. 전시적 성과와는 먼일은 타 부서에서도 마찬가지로 기피하는지라 아이들의 놀이터는 영원한 미제로 밀려난다. 그러하니 부하 직원들도 활기는커녕 서로 말을 아끼며 그의 눈치만 본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제목이 떠오른다. 그곳은 ‘죽은 공무원의 사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윌리엄스는 의사로부터 그의 시간이 6개월에서 9개월 정도 남았다는 진단을 듣는다. 아무런 징후없이 그의 몸을 갉아 들어온 암은 지금까지 죽은 듯 살았던 그의 삶을 은유한다. 윌리엄스는 내심 충격을 받지만 분가만을 꿈꾸며 쑥덕거리는 아들과 며느리에게조차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다. 아들에 대한 서운함이 아니라 아들은 아들의 삶을 살기에 바쁘다는 아버지의 배려심이다. 가장 힘들 때 나의 힘듦을 털어놓지 못하고 기대지 못하는 가족은 죽은 가족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친절이 아니라 경계 밖에 가족을 내어놓는 배타적 미덕이라고나 할까? 후일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하지 못했던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식 뒤에 남아 서럽게 운다. 늘 곁에 함께 했지만 가깝고도 멀었던 거리감과 단단한 벽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면 그건 기적이다.     


  위로를 구할 친구조차 없어 외롭고 막막하던 윌리엄스는 처음으로 무단 결근을 하고 무작정 해변 휴양지로 떠난다. 생전 처음의 일탈이다. 썩은 듯 고인 물에 물꼬가 트이니 희망이 스며든다. 살 희망이 아니라 잘 죽을 희망. 아이러니 하게도 전혀 남이었던 두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쓸쓸한 회한에 치유를 선물한다. 우연히 들른 바닷가 카페에서 만난 젊은 극작가 서더랜드(톰 버크)에게 그가 수면제를 찾고 있음을 우연히 듣게 된 윌리엄스가 그에게 내놓은 것은 치사량의 수면제였다.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던 윌리엄스에 놀란 청년은 그에게 일탈을 권한다. 떠들썩한 바의 술과 음악, 그리고 낯선이들과의 만남, 바의 피아노 앞에서 그가 부르고 싶었던 고향의 민요를 부르고 새 모자를 쓰기도 해 보지만 물에 기름 뜬 듯 어색하다. 오히려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삶이 그를 울게 한다.

  일탈이 그에게 답을 주진 않았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우연히 길에서 시청일을 그만두고 카페로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난 직원 마거릿을 만난다. 복지부동 했던 다른 직원들과는 달리 통통 튀듯 활기차게 자신의 생각을 유머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던 여성이다. 그녀의 솔직함과 생기를 보기만 해도 좋았던 그는 추천서를 써달라는 그녀의 청을 쾌히 승낙하고는 그녀와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밤 늦도록 인형잡기 기계앞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 웃는다. 그의 삶에서 잃고 있었던 웃음과 순수함을 마거릿으로부터 얻게 된다. 더불어 그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답도 얻는다.       


  그리곤 시간이 훌쩍 뛰어 그의 장례식 장면. 영화는 신입 직원 피터 웨이클립(알렉스 샤프)의 기억으로 그의 마지막이 그려진다. 윌리엄스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와 에너지로 미루었던 일을 처리해나간다. 그저 귀찮은 것을 던지듯 서류 더미 사이에 박아놓았던 놀이터 청원서를 꺼낸다. 종일 책상과 의자를 지키고 있었던 윌리엄스가 아니라 직접 발로 뛰고 행동하는 윌리엄스로 거듭난다. 비가 와서 질척거리는 현장을 찾아와 그 버려진 공간이 가난한 주민들이나 아이들에게 얼마나 열악한 환경인가를 실지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개인적 이익은 없고 귀찮기만 한 일에는 관심 없는 고위 관료를 찾아가 박대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부탁을 하여 놀이터 설치를 허락받기에 이른다. 윌리엄스에게 박력과 활기가 넘쳐난다. 삶의 끝에서 삶을 다시 얻었으나 그걸 ‘때늦음’이라 일갈할 수 있을까?   

  

  이렇듯 죽었던 인간이 온기가 있는 인간으로 부활하는 기적을 신이 아닌 인간이 이룬다. 그가 진정으로 살았던 그 짧았던 시간이 남은 이들에게 따뜻했던 인간으로 그를 기억하게 한다. 그의 장례식에 직원들과 동료들은 물론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모여 그가 어떻게 그의 남은 시간을 타인을 위해 의미있게 채웠는가를 회고한다. 그가 마지막 숨을 조용히 거둔 곳은 아무도 없는 흰눈이 쌓인 춥고도 고요한 이 놀이터 그네였다. 춥지만 따뜻했을 죽음이 상상된다. 그가 그리도 그리워하던 고향 스코틀랜드의 민요 <the rowan tree>를 부르며 어린 시절의 고향과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는 그의  얼굴에 눈물이 아니라 미소가 번진다. 병도 구원도 내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피터와 그의 연인이 된 마거릿 그리고 그가 사랑을 남긴 이웃들이게 훈훈함을 불어넣었다. ‘때늦음’은 후회가 아니라 새롭게 살아낼 희망이라는 응원을 심고 짧고 굵었던 윌리엄스의 삶이 그렇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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