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튼 아카데미> 리뷰
<바튼 아카데미>의 원제는 <The Holdovers>(남겨진 이들)이다. 영화는 모두가 떠난 춥고 썰렁한 학교에 남겨진 세 사람의 이야기이다. 1970년대 미국 뉴잉글랜드 명문 기숙 사립학교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왔다. 규칙과 학습에 지칠 즈음 황금같은 2주의 휴가를 선물 받은 학생과 교사들은 저마다 들뜬 마음으로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영화는 학교에 남은 이들에게 카메라를 옮긴다.
”1970년대 당시에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는 감독 알렉산더 페인의 말답게 영화는 오래된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처럼 풍성하게 눈 덮인 학교와 추위 따위는 아랑곳 없이 그 앞에 물결이 힘차게 오르는 하천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쌓였던 눈이 녹아 물이 되어 함께 세상의 그림을 완성하듯이 영화는 서로 달라도 원류는 하나인 인간의 연대를 그린다. ”우리는 자신만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라는 인용된 키케로의 언명처럼 크리스마스 축제에서 낙오된 사람들은 서로의 힘이 되어 얼었던 눈이 녹아 물이 되듯 마침내 서로에게 스미어 세상으로 흘러 나아간다. 루저들의 승리. 이보다 더한 헤피 엔딩이 있을까?
<바튼 아카데미>를 본 많은 이들이 <죽은 시인의 사회>나 <굿 윌 헌팅>을 오버랩한다. 똑똑하지만 방황하는 문제아와 그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어른 사이에 이루어지는 치유와 성장의 스토리. 그러나 <바튼 아카데미>가 주는 더 깊은 감동은 갈 곳 없이 된 이들이 만드는 대안 가족의 치유 능력이다. 60년대 미국의 동부.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자본과 권력의 횡포 그리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험난함 속에서 ’어머니‘가 등장한다. 불안으로 흔들리는 우리의 아들 그리고 침잠으로 삶의 생기를 묻어 둔 아버지를 일으켜 세워 나아가게 하고 무대 뒤에 남는 멋진 조력자의 이름은 ’어머니‘이다. 때로 여성적 품위가 주먹보다 강한 힘이 있다.
동료 교사의 잔꾀로 잔류 학생들을 돌보게 되는 역사 교사 폴(폴 지아마티)은 잔뜩 심통이 나 있고 부자 남편과 재혼한 엄마의 신혼여행 때문에 가장 먼저 싼 여행 가방을 풀러야 하는 앵거스(도미닉 세사)도 이름처럼 잔뜩 화가 나 있다. 그리고 베트남전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이 다녔던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남겨진 이들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식당 주방장인 흑인 여성 메리(더바인 조이 랜돌프)가 있다. 자신도 아프지만 곁에 남은 남성들을 보살피고 마침내 그들을 일으키는 메리는 흔들리는 혼란의 시대를 묵묵히 지킨다. 그리고 젊은 세대가 들어서게 하기 위해 오랫동안 지켜왔던 자기의 자리를 내어주는 어른은 믿음직하다. 바튼 아카데미(Barton Academy)에서 ’바튼‘(barton)은 릴레이에서 뒤이어 오는 주자에게 넘겨주는 ’바톤‘(baton)을 의미하지 않을까?
학교에 남겨졌다는 것은 그들을 기다리는 가족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낙오된 그들의 회생 방법은 그들 스스로 서로를 품을 가족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작정하고 대안 가족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충돌은 그만큼 상대방의 다른 모습을 보게 하고 점차 그동안 몰랐던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한다. 삶은 머물면 안전하지만 부딪히고 넘어지더라도 걸어나갈 때 다른 세상을 만나고 성장한다.
영특하지만 문제아로 낙인찍힌 앵거스의 화는 가족 때문이다. 엄마와 이혼하고 정신 병원에 입원 중인 아버지는 피해망상으로 인해 멀리 자신을 찾아온 아들의 그리움을 위로하기는커녕 깊은 상처를 낸다. 부자와 재혼해 신혼여행을 떠난 엄마의 미안함의 표현은 크리스마스 카드 사이에 동봉한 얼마간의 돈이다. 게다가 사사건건 부딪히는 교사 폴은 앵거스를 더욱 문제적 학생으로 몰아간다. 그 둘의 충돌은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다. 서로 닮은 꼴통들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와 신화 그리고 문학에 정통하지만 폴의 사전에는 타협이란 없다. 완고하고 고집불통인 일명 ’왕눈깔‘ 폴은 교사들은 물론 학생들에게도 비호감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교육 방식을 바꿀 마음은 전혀 없다.
그 두 남자의 치기 어린 기싸움을 지켜보는 이는 메리이다. 그들의 식사를 위해 주방에 남은 메리는 원래 바튼 아카데미에 입학한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 학교에 요리사로 취직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사고사 한 남편의 불행에 겹쳐 대학갈 돈이 없어 베트남전에 징집되어간 아들은 전사한다. 가난 때문에 군대에서 받은 보조금으로 대학을 가겠다는 아들의 꿈을 지켜주지 못했던 메리는 어쩌면 바튼을 떠나는 것이 슬픔을 잊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에 남아 남겨진 이들의 먹을거리를 챙긴다.
영화는 사고뭉치 학생과 해결하려는 교사의 좌충우돌 사건들의 연속이다. 이들의 본격적 충돌과 화해의 실마리는 학교를 떠나 앵거스의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보스턴의 병원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이루어진다. 앵거스는 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체육관으로 도망치다 골절을 하기도 하지만 마지못해 떠난 여행길에 연못에서 스케이트도 즐길 만큼 서서히 둘 사이에서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한다. 또한 골절을 한 앵거스는 병원에서 보험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주는 대신 현금으로 처리하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자 간호원 앞에서 폴을 엉겁결에 ’대디‘라 부르며 폴을 위기로부터 구한다. 교사 폴이 자신으로 인해 학생 관리 실패의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덤 앤 더머‘의 케미를 이루며 자잘한 사건들을 경험하는 사이 서로에게 감춰진 상처들을 보게 되니 어느 사이 공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세상에 아프거나 딱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무관심이 문제지 사실 미움도 관심의 한 형태이다. 한 예로 여행길에서 우연히 옛 대학 친구 부부를 만난 폴이 거만을 떠는 그들 앞에서 기죽지 않으려고 허풍을 떨자 그것을 받쳐주는 앵거스의 재치는 단순한 휴먼 코미디에 그치지 않는다. 우수했지만 가난했던 학생 폴은 권력과 돈을 가진 부모를 둔 학생 대신 컨닝의 누명을 쓰고 하버드에서 쫒겨날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현재의 답은 과거에 있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그들이 얻은 건 서로에 대한 이해이다. 앵거스는 폴의 몸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가 트리메틸아민뇨증이라는 대사장애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외사시(外斜視)인 폴이 어느 쪽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가도 알게 된다. 반면 폴은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항우울제를 앵거스도 복용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의 도입부, 학교에서 한 사건이 있었다. 한 어린 학생이 더 힘이 센 학생의 지나친 장난으로 인해 한쪽 장갑을 잃어버리자 나머지 장갑도 흘러가는 계곡에 던져 버림으로서 아이는 외짝 장갑의 결핍을 지워버린다. 사연을 모르는 이가 보면 차가운 두 손은 처음부터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춥지 않은 척 허세를 떨지만 그사이 마음과 몸은 얼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화해를 얻고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기다리는 건 앵거스 엄마의 날선 항의였다. 앵거스의 병원 방문이 전남편이 입원한 병원을 뛰쳐나오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 엄마는 그 책임을 교장에게 따진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걱정하는 건 아들이 아니라 전남편이 입원할 병원을 다시 수소문해야 할 자신의 번거로운 수고였다. 이 상황에서 폴은 모든 것을 자신의 귀책으로 돌린다. 앵거스가 학교에서 퇴학당하면 사관학교를 가서 베트남전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희생이 앵거스만 구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도 구한다. 그의 몸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는 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인물처럼 썩어가던 자신의 삶이었다. 비록 상황에 내몰리기는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삶이 썩어가고 있었던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다.
그때 폴의 퇴장이 안타까웠을 관객을 위로하듯 메리가 다시 등장한다. 그녀는 빨간 리본으로 예쁘게 장식한 두툼한 빈 노트를 폴에게 선물한다. 폴이 새로 보게 될 세상 이야기를 담게 될 넉넉한 여백이다. 아무리 가르쳐도 ’no 잼‘인 학생들이게는 죽은 역사였던 카르타고의 역사를 이제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할 카르타고의 산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폴이 학교 밖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메리는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일상으로 돌아온 앵거스와 학생들의 식사를 준비한다.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굳건함이 든든하다. 그저 마켓에서 사서 아들은 먹였던 차가운 앵거스 엄마의 음식이 아닌 온기가 담긴 사랑의 음식. 그녀 또한 슬픔을 디디고 일어나 동분서주하는 활기를 되찾는다. 메리가 버는 돈은 곧 태어날 여동생의 아기를 위해 쓰여질 것이고 다시는 가난 때문에 어린 목숨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은 죽은 나무 곁에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로 자라날 나무를 심는 것이다. 메리(Mary)의 사랑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성(性)과 인종을 초월하고 푸르게 성장할 나무를 키워낸 것이다. 불운을 행운으로 바꾸게 하는 요정이자 때로 시니컬 하기조차 한 이 뚱뚱한 멋진 흑인 여성의 이름은 ’메리 램‘(Mary Lamb). ’양처럼 순한 성녀‘를 뒤집은 유쾌한 전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