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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Jun 22. 2024

악은 세상 너머에 있는 것일까?

<존 오브 인터레스트> 리뷰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잔혹한 장면 하나 없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작품이다. 유대인을 전면에 내세웠던 <쉰들러 리스트>, <사울의 아들>등 과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와 인간의 딜렘마에 대해 질문한다. 그럼 어떻게 그토록 참혹했던 역사적 비극을 전달할까? 보이는 건 천국인데 보이지 않는 지옥이 보인다. 올해 평단에서 찬사를 받았던 감독 조너던 글레이저의 마법이다.       

  감독은 비극적 역사적 사실과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며 결국 우리 인간의 윤리적 결핍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죄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린다. 윤리나 도덕적 의식 없이 제도나 권위에 순응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죄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 15가지의 죄목으로 전범 재판대에 오른 아이히만은 ’나는 법으로 정해진 명령에 따라 수행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실제 인물이었던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는 후일 ’나는 거대한 학살 기계의 톱니바퀴였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아렌트가 재판에서 본 것은 악마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들어지는 유기적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난해한 범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 내 이웃의 고통에 무심했던 일상도 죄이다. 담 너머의 고통을 의식하지 않는 차가운 영혼을 가진 이들이 악의 그늘에서 산다.    

 

 어둡고 깊은 심연에서 휘젓는 거대한 괴물의 소리가 그러할까? 고통 속에 죽은 망령들의  웅얼거림일까? 영화는 약 2분여 넘게 무거운 저음향만이 깔리는 오프닝 암전으로 시작한다.  암흑이 걷히자 눈이 부시도록 환한 장면이 열린다. 급진적 반전이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리고 푸른 숲과 잔잔히 흐르는 강물에 하얀 살을 드러낸 가족들이 평화로이 피크닉을 즐긴다. 그리곤 화려한 색상의 꽃과 푸른 잔디, 과실이 영글어 가는 관목들이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이층 저택으로 그들이 돌아온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인 독일 장교 회스는 부지런하게 아름다운 집 가꾸기에 바쁜 아내 헤트비치(산드라 휠러)와 다섯 아이를 둔 행복한 가장이다. 영화는 대부분 이 가족의 일상을 담는다. 지옥 같은 홀로코스트의 잔혹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천국의 모습이다. 일명 아내는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다. 가난한 노동 계급 출신이지만 17세대부터 꿈꾸어 온 삶을 이루어 낸 아우슈비츠에 대한 사랑이 그녀에게 넘쳐난다. 담장 너머 대학살의 비극과 비명은 그녀와 가족들에게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실제로 당시에 그곳에서 살았던 독일인들은 그 환경에 금세 익숙해져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 아닌 너에 대한 무심함이 그렇게 인간의 영혼을 석화시킨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나치 군사 조직이 관리하는 아우슈비츠 주변 40제곱 미터의 지역을 의미한다. 폴란드인들을 몰아낸 토지에 수용소를 짓고 농지로 활용하여 이익을 얻어내는 공간이다. 회스 소장의 저택은 그곳에 위용 있게 자리 잡혀있다. 철조망이 박힌 회스 저택의 담장 하나 사이에는 유대인 수용소가 있다. 그러나 영화는 단 한 장면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수용소의 참상을 들이대지 않는다. 단지 담 너머로 들려오는 고통스런 비명과 총소리 혹은 엄마의 품으로부터 떨어지는 듯한 아이의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소리 그리고 높은 굴뚝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붉은 불길과 검은 소각 연기가 그 장소의 참혹함을 암시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리와 장면에 소름이 끼친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에 너무 쉽고 편하게 이입하고 공감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감독의 우회적 전략이 놀라웠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정공법보다 에둘러 가는 우회적 스타일로 역설을 최대치로 성취하는 영화적 전략은 ‘대비’이다. 어둠과 빛, 천국같이 빛나는 집 바로 옆 보이지 않는 지옥. 잔악한 아우슈비츠의 최고 수장이지만 가정에서는 다감한 가장. 강박증적으로 빛을 끄고 어둠으로 집의 하루를 끝내는 악마인가 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백색의 옷과 구두로 치장하는 천사 코스프레. 동물을 사랑하고 라일락 관목조차 꺽지 못하게 하는 자연주의자. 이웃에게는 친절한 이웃. 장교들의 파티장에 누가 왔는지를 궁금해 하는 아내에게 화려한 파티장을 가스실로 쓰면 천고가 너무 높아 질식시키기엔 어렵겠다고 대답하는 그는 살인 기계에 다름 아니다. 세계 2차 대전 막바지 400만 폴란드 유대인을 50여일 만에 소각한 그의 능력은 그의 이름을 붙인 프로젝트가 있을 만큼 대단하다. 군대 책임자들을 모아 소각로를 1000도씨로 높혀 태우고 식히고 다시 채우고 재로 만드는 과정을 24시간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는 내용을 모르고 보면 영락없는 대기업의 전략회의이다.   

  


  살인 기계에 불과한 악마도 자신과 가족의 생존에는 병적으로 집착한다. 가족이 낚시하고 카누를 타고 물놀이를 하는 강물에 섞여 떠내려가는 사체의 일부와 소각된 재들에 자신과 아이들의 몸이 오염 될세라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의 몸과 자신의 몸을 강박증적으로 씻어댄다. 피에 묻는 군화는 급히 하인이 씻어내고 눈처럼 흰 정장을 차려입어 악의 그늘을 지운다. 그러나 정작 씻어낼 수 없도록 영혼에 오염된 어둠은 그의 집안을 휘저으며 늘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검은 개가 상징한다.     


  환경의 유기물인 만큼 악마는 도처에 있었다. 회스의 아내 헤트비히 또한 부지불식 악마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한시도 쉬지 않고 가꾸고 심고 유대인 수용소에서 차출된 하인들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이 천국을 일구어냈다. 직접 키운 채소와 과일이 식탁에 오르고 붉고 노란빛을 뿜는 꽃들의 빛이 선명한 정원, 한 곳에 샤워기가 장치된 사각형의 작은 수영장에는 아이들이 더없이 행복하게 뛰논다. 바로 담장 너머 갇힌 공간 벽에 매달린 호스에서 뿜어내는 독가스에 죽어가는 유대인의 참상이 유비된다. 헤드비터는 벌거벗겨져 고통 속에 죽어가던 수용자들이 입었을 모피 코트를 입고 거울 앞에서 전신을 비추어 보고 코트 주머니에서 찾아낸 진한 핏빛 립스틱을 아무런 거부감없이 발라본다. 그 순간 담 너머로는 총격 소리와 소음이 들리고 있다.   

  

  성취한 죽은 사람의 유품과 발견해 된 치약에 숨긴 다이아몬드를 이웃 여자들과의 한담에서 자랑하고 유대인 하녀에게는 너 같은 건 아무도 모르게 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협박을 내뱉었던 그녀가 후일 남편의 전범 재판에서 그저 나는 가정주부에 불과했다는 항변으로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렇다. 그녀는 그저 남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인생을 즐겼을 뿐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죄를 응징할 방법은 없다. 그녀의 집을 방문했던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려본다. 딸의 성공적 삶에 여느 부모처럼 기뻐하지만 이층 침대에서 보이는 소각의 불길 그리고 처참한 소리들을 견디다 못해 작은 메모 하나 남기고 홀연히 딸의 집을 떠난다. 차마 볼 수 없었던 비극이 가슴 아프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가 택한 것은 외면이었다. 그녀를 닮은 내가 보인다.      


  ”그냥 썩게 놔두라“(Let it rot). 이 영화의 구상을 들은 감독의 유대인 아버지가 한 말이다. 그렇지만 조너던 글레이저는 회피가 아닌 목소리를 낼 용기를 선택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마틴 에이미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지만 감독은 감당하기 힘든 이 비극적 역사를 처음에는 영화로 만들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감독이 우연히 발견한 한 소녀의 이야기에서 악에 질식당하는 세상을 구할 희망을 찾고 영화를 만들 용기를 가진다.      

  그의 ‘대비’의 마법이 가장 빛나는 것은 한 소녀의 등장 장면이다. 회스 가족의 집과 일상은 눈부시고 강렬하지만 이 소녀를 비추는 빛은 옅고도 은밀하지만 적외선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이 흑백 열화상의 장면은 감동이다. 위험을 무릅쓴 한 소녀가 어둠을 틈타 한쪽 어깨에 걸러 맨 늘어진 가방에서 한알 한알 사과를 꺼내 유대인들이 노동하던 장소에 박아 놓는다. 그 사과들에서 연한 빛이 난다. 이 사과 한 알이 그들의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기를 그리고 희망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선한 마음이 어둠 속에서 약하게 일렁인다. 무섭고 잔혹한 세상이지만 한 소녀의 고귀한 용기가 세상의 빛이 된다. 그렇지만 슬픈 건 그 ‘선’이 세상의 ‘악’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과 한 알을 가지고 싸우다 들킨 유대인이 강물에 처박혀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담 너머로 들린다. 

-("죽어가는 자들은 마지막 소원으로 음식을 청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먹을 것을 줍니다") ("They say that the dying ask for food as a last wish. They give you to eat.") (<DICTEE> by Theresa Hak Kyung Cha).     


 소녀는  당시 12살의 실제 인물이었던 알렉산드로 비스트로니라는 폴란드인 이다. 그녀가 사과를 놓다 구덩이에서 발견한 유대인이 작곡한 작은 종이 악보를 가져와 연주한 ‘햇살(sunbeams)이라는 곡과 피아노와 그녀가 입은 옷과 독일인을 피해 밤길을 달리던 자전거 모두 실제 소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 이어 늘 회스가 잠이 들기 전 아이들의 침대에서 ‘헨젤과 그레델’을 읽어주는 장면이 오버랩 된다. 헨젤이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에 놓았던 빵조각이 새의 먹이가 되었듯이 사과는 절망 속에 희망을 심는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이야기는 아이들이 마침내 마녀를 불 속에 넣어 태워죽였다는 잔혹 동화이다. 천사와 악마, 피해자와 가해자는 두 얼굴을 가진 지킬과 하이드이다. 

     

  헤드비터의 어릴 적 성이 ‘헨젤’이었다 하고 헨젤이 집으로 오는 길을 찾아 헤매듯 집안을 헤매는 몽유병을 가진 어린 회스의 딸이 동화같이 아름다운 그 집에 산다. 어린 아들의 장난감은 죽은 유대인의 금이빨이고 형은 동생을 더운 온실에 가두고 가스가 새어나오는 소리를 흉내 내며 동생을 놀린다. 어른들의 탓으로 동심에 물든 ‘악’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 반대의 편에서 감독이 소녀의 ‘선’을 들여놓는다. 악과 선의 줄다리기 같은 장력에서 누가 이기는 가에 대한 대답은 영원히 지연될 것이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선’의 편에서 감독이 응원의 깃발을 흔든다.     


  아카데미 시상 무대에서 유대계 영국인 감독은 자신의 수상 소감이 유대인의 정서를 건드릴 것을 각오한 듯 손을 약하게 떨면서 자신의 신념을 말했다고 한다. 그는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로 이 영화를 만들었고 학살범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타인의 고통에 아파하는 마음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비난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독은 희망의 사과를 심었다.     


  마지막 장면 회스가 어두운 계단을 내려오며 헛구역질을 하지만 이미 다 소화가 된 악이 토사물로 남아 있을 리 없다. 어쩌면 그도 자아 혐오와 같은 복잡한 감정이 남아있는 불완전한 악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음 장면 그래도 남은 역사의 흔적을 자원봉사자들이 줍고 모아 전시하는 일로 분주한 전시장의 현재가 보여진다. 무서운 건 남겨진 우리들의 망각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내놓고 반성하며 무릎을 꿇었다고 세상이 나아질까? 끊임없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는 세상에서 무고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는다. 그리고 영화의 끝, 암전된 스크린 뒤에서 들리는 불편한 소음들이 우리의 안락함을 다시 건드린다. 여전히 세상은 혼란스럽고 기괴하며 잔인하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이 가자지구의 학살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 그곳으로 멀리 갈 필요도 없다. 가난했던 시절을 벗고 이제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으로 고향에 남겨진 가족과 자신이 이룰 꿈을 위해 이주 노동자가 그리고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 탈북민들이 찾아오지만 그건 나와는 무관한 그저 뉴스거리이다. 그리고 더위 속에 내 집 앞의 쓰레기를 치우는 노동을 당연한 듯 무심하게 지나치는 나의 일상이 무슨 죄란 말인가? 이런 나에게 감독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과연 과거의 악마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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