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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May 12. 2024

떫디 떫은 그로미셸

바나나

아직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서 해외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견문을 넓히는 시기였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말려도 저항하고 대들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면서 방법을 몰라 방에 처박혀 고민만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호주의 과일가게는 과일을 소쿠리에 담아놓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비닐이나 장바구니에 담아 무게로 계산한다. 요즘은 한국의 대형 마트에서도 이렇게 판다.


호주 과일은 한국에서 보던 과일과 이름만 같지 맛과 모양이 다른 것이 많았다. 딸기는 빨갛긴 해도 맛은 밍밍하거나 새콤했다. 사과는 껍질에 왁스를 발라놓은 듯 반짝거렸고 크기도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품종이었다. 생각보다 퍼석하지만 달콤해서 자주 사 먹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이 넓은 공간에 여러 종류의 과일이 쌓여있는 가게를 매일 들렀다. 맛있어 보여서 샀는데 실망한 적도 있지만 절반이 넘는 확률로 기대하지 않은 맛있는 과일을 만나기도 했다.


넓은 대륙에 다양한 기후 특성을 가지고 있는 호주의 특성상 바나나와 같은 열대과일도 케언즈와 같은 열대 지역에서 국내 배송되어 왔다. 콜롬비아, 필리핀, 베트남 등 다양한 나라에서 수입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랐다. 바나나의 모양도 우리는 캐번디시 품종이 대부분인데 호주는 손가락 만한 몽키 바나나부터 뭉툭하게 생겼지만 천상의 맛이라고 일컫는 그로미셀 품종까지 다양했다.


여느 날처럼 참새 방앗간 짓을 하고 있는데 뚱뚱하고 뭉툭한 그로미셸 종이 눈에 띄었다. 흔한 캐번디시 종만 먹다가 모양이 다른 것을 보니 호기심이 들었다. 가격이 평소 먹던 바나나의 3배가 훌쩍 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로미셀이 고급품종이라서 그렇다기보다 캐번디시보다 바나나마름병에 취약한 종이라 많이 재배가 되지 않아서 가격이 높은 것이었다.


비싼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가난한 외국인으로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한두 개로 나눠 팔지 않아서 더 망설여졌다. 다만 한국에 가면 이런 바나나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었다.

'맛있다니까 숙소에서 같이 생활하는 동생들과 나눠 먹지 뭐.'

소확행이라 여기고 15개 정도 달린 바나나 한 송이를 샀다.


집에 돌아와 노트북컴퓨터로 그로미셸 종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했다. 한국어로 검색 한 정보는 미미했지만 영어로 검색하니 제법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아직 초록색이 남아있는 바나나 중 그나마 가장 노란 바나나 하나를 깠다.

'먹어본 사람들이 천상의 맛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얼마나 맛있을까?'


한입 베어 물었다.

"퉤~"

바나나를 그대로 뱉어냈다.


떫었다. 아주 떫었다. 덜 익은 감을 베어 물었을 때 혀가 마르면서 떫은 그 느낌이었다.

달콤한 풍미를 기대하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누가 천상의 맛이라고 한 거야? 이거 먹을 수나 있는 거야?'


비싼 돈을 내고 저 큰 송이를 짊어지다시피 하여 들고 온 좀 전까지의 자신이 한심해 보일 정도의 맛이었다.


'너무 기대해서 그런가? 내 혀가 잘 못되었나?'

여러 생각을 하며 다시 먹어보아도 씹을수록 떫은맛이 심해서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비싼 바나나를 바로 버릴 수 없고 반품하러 가는 것도 귀찮아 침대맡에 장식용으로 놔두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시기라 브리즈번 시티를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침대맡 바나나는 오며 가며 보아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보기만 해도 떫을 거란 생각에 입에 침만 고일 뿐이었다.


3일이 흘렀다. 바나나에 초록색은 모두 사라지고 노란색이 짙어졌다.

'이 정도 놔뒀으면 오래 뒀다. 다시 먹어보고 영 아니면 전부 버리자.'

여전한 맛이면 바나나를 거금을 3일 동안 방안을 데코레이션 값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바나나를 깠다. 3일 전에는 억세던 바나나 껍질이 부드럽게 까졌다.

'딱딱하던 바나나가 부드러워졌네'

아주 조금 베어 물었다. 

'어!'

기대하지 않았던 강렬한 단 맛이 느껴졌다.


한입을 덥석 물었다. 

'음~'

입안이 바나나의 풍미로 가득 찼다. 달콤함이 혀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춤췄다.

'분명 지나가던 개도 쳐다보지 않을 맛없는 바나나였는데...'


게눈 감추듯 바나나 하나를 해치우고 다음 바나나를 깠다.

'우걱우걱'

배가 고프지도, 입이 심심하지도 않았는데 잠시만에 바나나 두 개가 사라졌다.


바나나 송이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앉아서 놀고 있던 셰어 식구들에게 바나나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 자리에서 까서 먹어본 동생들이 엄지를 척하고 세웠다. 더 먹을 사람들을 위해 몇 개를 더 주고 남은 것들을 챙겨 방으로 들어왔다. 


'바나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단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며칠 전과는 전혀 다른 바나나가 되어버렸다.

'그래, 땡감(떫은 감)도 숙성시켜 홍시나 곶감으로 만들긴 하지.'

첫날에 과감하게 처리한다고 바나나를 반품을 하거나 버렸으면 이런 맛을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처음 사 왔을 때 바나나는 딱딱하고 아직 푸릇한 색도 덜 빠진 바나나였다. 시간은 이 바나나를 짙은 노란색의 먹음직한 외형을 가졌을 뿐 아니라 알맹이까지 달콤한 풍미를 가진 천상의 맛을 지닌 바나나로 만들었다.


명확한 목표가 없어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으며 어설픈 자기 고집이 가득하며 이룬 것 없어 늘 초조한 떫은 청년에게 그로미셸은 시간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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