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영천댐 마라톤대회
영천댐 주차장에 차를 댄다. 오전 7시 30분이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6시를 좀 넘긴 시간에 집을 나선 보람이 있다. 대회 행사는 9시 10분부터라고 하니 2시간을 차에서 보낼 생각이다. 집에서 챙겨 온 책을 꺼낸다. '청춘의 독서'라는 이 책은 유시민 작가가 자신의 딸이 고등학생일 때 쓴 책이다. 젊은 시절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든 생각이 적혀있다. 따로 시간을 내고 읽으려면 잘 읽히지 않아 자투리시간을 채울 용도로 가져온 것이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통해 유한계급(Leisure Class)이 과시를 위해 소비를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 본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글을 보며 기독교 세계관에 구멍을 뚫을 이론으로서 당시 갈릴레오급의 지탄과 멸시를 견뎌야 했던 그를 떠올린다. 책을 몇 장 넘기다 보니 피곤함이 몰려온다. 알람을 9시로 맞추고 눈을 감는다.
아무도 없을 것 같던 양 옆 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그들도 나처럼 대회장에 일찍 와서 차에서 대기한 모양이다. 마침 9시 알람이 울린다. 대충 짐을 챙겨 대회장으로 발을 옮긴다. 가볍게 조깅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화장실 줄은 이미 쭉 늘어서있다. 대회코스를 미리 뛰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을 따라 조금 걸어본다. 꽤 오르막이 높다. 영천댐 저수지가 보이는 위치까지 올라가서 몸을 간단히 푼다. 머릿속은 복잡하다.
'50분보다 빨리 들어올 수 있을까?'
'뛰면서 속도를 계속 체크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로 다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다. 짐 맡기는 곳이 있지만 대회장에 차를 대어놓으니 굳이 맡길 필요가 없다. 반팔, 반바지차림에 핸드폰은 두고 워치만 차고 출발선으로 이동한다. 10시에 맞춰 하프 선수들이 출발한다. 사회자의 폼이나 말투가 2주 전의 청도반시마라톤에서 보았던 그 사회자로 보인다. 괜히 반갑다. 10km 선수들도 도열한다. 중간쯤 서있다가 45분 페이스메이커 풍선이 앞에 보이기에 그 옆에 가서 선다. 50분 안에 들어오는 것이 목표이지만 꿈은 커야 하는 것이다. 최대한 따라가 볼 생각을 한다.
출발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와치 시작버튼을 누른다. 쌀자루 입구를 열자 쌀이 쏟아지듯이 사람들이 앞으로 튀어나간다. 오르막도 거침없이 나가는 선두그룹을 보면서 악착같이 다리를 놀려본다. 나의 노력과 점점 커지는 심장박동 소리가 무색하게 45분 풍선은 점점 멀어져 간다. 엄청난 오르막을 다 올라온 1km 지점에서 이미 힘이 다 빠져 있다. 현재 뛰는 폼을 유지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45분 풍선은 수백 미터 앞에서 조금씩 더 멀어지고 있다.
하프 참가자들 중에서 대회를 포기한 사람이 하나씩 보인다. 싱글렛 입은 여성분이 걸어서 돌아오는데 배를 만지며 무안해하는 것을 보니 화장실 이슈가 아닌가 싶다. 경치를 보면서 걸어가고 있는 하프 주자도 보인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뛰고 있는 입장에서 저들은 얼마나 편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뒤에서 조금씩 다가와 종국엔 나를 추월하는 사람을 보면 더 빨리 달릴 수 없는 자신이 답답하기도 하다.
3km 지점을 지나고 나니 오르막이 다시 느껴진다. 그래도 첫 오르막을 경험하고 나서라 이런 잔잔한 오르막은 그리 힘들지 않다. 내 주변에 남은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속도로 계속 발걸음을 떼고 있다. 1년 전에 1시간 내외의 주자일 때는 주변 주자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이 바뀌었고, 6개월 전에 55분 주자 일 때는 내가 조금씩 사람들을 따라잡아 능동적으로 바꿔나간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지금은 이대로 결승점까지 순위 변동 없이 갈 것 같은 느낌이다. 와치는 켜고 있지만 눈길을 주지는 않는다. 속도가 빠르면 빠른 데로 무리한다는 느낌이 부담을 줄 것 같고, 속도가 느리면 느린 데로 빨리 가야 한다는 압박이 들 것 같아서이다.
4km 팻말이 보이는 지점에서도 1위가 반환해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5km 지점에 반환이 있으니 선두권과 나는 2km보다는 더 가까운 거리차이다. 곧 1등의 모습이 보이고 그에게 "파이팅"을 외친다. 점점 힘들어지는 나에게 외치는 파이팅이기도 하다. 1등은 엄지를 척 내밀고 반응을 해준다. 2위, 3위 계속해서 주자들이 보일 때마다 파이팅을 외치다가 반응이 별로 없자 이내 흥미를 잃는다. 역주한다고 힘든 그들이 파이팅에 대답해 줄 의무는 없는 것이다. 나를 제외한 주변 주자들 중에서는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이 없어서 더 소심해진다.
급수대를 지나며 물 한잔 마시고 나니 반환이 나온다. 반환 후 뒤에서 오는 주자들을 정면으로 보며 먼저 드는 생각은 '속도를 줄이면 이들에게 따라 잡힌다'이다. 이때부터는 대회는 축제가 아니라 경쟁자들과의 싸움이다. 아까 1위와 만났던 자리까지 오니까 옆 도로에 사람들이 많이 줄어있다. 어림잡아 계산해도 1시간 10분 안에는 들어가지 못할 주자들이다. 걷다 뛰다 하는 어르신, 아이손을 잡고 뛰는 엄마, 발을 나란히 하고 뛰는 연인들을 보면서 아까의 소심함을 버리고 파이팅을 외친다. 반은 반응을 해주고 반은 그냥 스쳐가지만 상관없다. 내가 뱉은 파이팅이 나의 페이스도 처지지 않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5km 반환점이 보인다. 이제 2.5km가 남은 것이다. 여기서는 5km 참가자들과 섞인다.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과 함께 뛰려고 참여한 5km 주자들은 대부분 걷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행복함이 가득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속도를 줄이지 않기 위해 정신력으로 달린다. 이쯤 오니까 뒷심을 발휘하는 주자들이 나를 추월해 나간다. 1km 지점에서는 내리막이 시작되자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속도를 올린다.
아직 골인지점이 보이지 않으니 아무리 내리막이라도 전속력 질주는 망설여진다. 나와 비슷하게 달리는 사람들도 5km 주자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달린다고 애를 쓴다. 저 멀리 골인지점이 보인다. 200미터도 안 남았다. 질주로 마무리하기 위해 최대 속도로 뛴다. 예상해 둔 최단 경로로 사람들을 뚫고 골인할 생각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경로 끝인 골인점 10m 앞에서 5km 커플 주자 중 남성이 카메라를 주머니에서 꺼낸다. 커플은 피니시 사진 포즈를 잡는다고 속도를 줄인다. 기껏 올려놓은 속도를 갑자기 줄일 수 없으니 경로를 급하게 바꾸면 사고가 난다. "어어어어" 하면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듯하게 만들어진 커플과 다른 주자 사이의 공간을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지난다. 다행히 골인점을 무사히 통과한다.
"47분 19초"
내 실력보다 무리하게 달려서 그랬는지, 긴장해서 그랬는지 아랫배가 살짝 아픈 느낌에 화장실로 바로 달려간다. 출발 전에 비해 아주 한산한 화장실이 낯설다.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도 몸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무리하고 있다는 신호였나 보다. 소득 없이 화장실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1시간 내외로 달리면 누구나 힘든다. 나처럼 질주하는 사람이 있고, 여유롭게 달려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이제 끝이라서 그런지 걸어오는 사람만 없다. 그렇게 결승선을 통과하고는 모두 힘이 들어 헥헥거린다.
결승지점 옆에서 다 왔다며 힘내라고 응원을 좀 하다가 메달과 간식을 받으러 이동한다. 유산균 음료와 초코파이, 초코바가 든 간식 비닐을 받아서 하나씩 까먹는다. 달콤함이 입에 퍼지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하프 선두들이 들어온다는 사회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피곤한 몸을 스트레칭해준다. 이제 1시간 15분을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차를 타고 나오는데 입구에 정체가 없다. 마지막까지 깔끔한 대회라는 인상이 남는다.
10km 기록이 생각보다 잘 나와 기분이 좋다. 뛸 때는 죽을 것 같더니 성적을 받고 나니 너무 대견하다. 이 맛에 10km를 뛰는 사람들은 누구나 힘들게 뛰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