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점심메뉴: 와플, 팬케이크, 직접 굽는 소세지
노르웨이 여행 후기를 보면 아주 유명한 로포텐이나 트롬소와 같은 여행지일 지라도 딱히 맛있는 점심을 때울만한 곳이 없다는 이야기가 종종 있다. 그 이유는 노르웨이 현지의 사람들이 점심은 보통 도시락을 (앞서 소개한 오픈 샌드위치를 곁들인 도시락 matpakke [마앝파께]) 싸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부터 직장인, 은퇴를 앞둔 어르신들까지 전부 그래서 사람들이 상주하는 웬만한 곳에는 냉장고가 꼭 구비되어 있다. 좋아하는 pålegg ([포올렉] 빵에 올릴 토핑)을 냉장고에 넣어놓고 그 때 그 때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차라리 오슬로와 같이 큰 도시라면 브런치 류의 음식을 파는 곳이 종종 있을 텐데, 아무래도 노르웨이 내의 인기 많은 여행지들은 자연 경관이 주인 경우라서 현지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이 많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실제로 내가 시댁 식구들과 함께 로포텐에 놀러 갔을 때에도 아침 점심은 무조건 숙소에서 미리 해결하거나 도시락으로 싸서 다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렇다면 차가운 음식들 말고, 현지에서는 어떤 따뜻한 음식을 먹을까?
*[바플레르] 라고 읽고 와플을 뜻하는 Vaffel [바펠]의 복수형이다.
최근 한국에 시노베 (Synnøve)가 진출하면서 와플에 브라운치즈를 얹은 콤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현지에서도 많이 먹는 조합이고, 노르웨이식 와플을 그나마 가깝게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지 사람들은 노르웨이 와플을 꽤나 사랑하고 그 모양 자체에도 자부심이 있어서, 한국에 간 시노베가 판매하는 것도 당연히 노르웨이식 와플 기계를 가져갔겠거니 했는데 사진을 보니 전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주로 통통하고 딱딱한 벨기에 와플이 더 유명한데, 노르웨이 와플은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훨씬 얇고 부드럽고 기포가 많으며 잎이 여러개인 클로버 처럼 생겼다. 한 쪽을 뜯으면 하트 모양이라서 귀엽기도 하다. 위 사진에 나타난 와플 토핑은 사워크림과 딸기잼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딸기나 라즈베리와 같이 붉은 베리 잼을 얹어 먹는게 가장 흔하다. 그리고 브라운 치즈만 올려 먹는 것도 흔하고, 딸기잼과 브라운 치즈를 동시에 얹어 먹는 것도 흔하다.
질감은 촉촉하고 아주 약간 바삭하지만 부드러운 얇은 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와플과의 차이점은 맛이 달콤하지 않고 식사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밀가루, 우유, 버터, 계란 등을 섞어서 만들고 설탕은 들어가지 않지만 아무래도 잼이나 달큰한 브라운치즈를 얹어서 먹다보면 달달하게 느껴지긴 한다. 그래도 여전히 디저트가 아니라 2-3장 먹으면 든든하게 배부른 점심식사라는 점.
온라인으로 보니 한국의 시노베 매장에서는 브라운치즈를 잘게 채를 썰어서 뿌려서 주는 것 같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는 무조건 치즈 커터 (ostehøvel; [오스테호벨 / 오스테헤벨] 중간 정도로 읽는다)을 사용한다. 지난 포스트에서 소개했듯이 노르웨이 사람들은 치즈를 사랑하는데, 그래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발명품이 바로 이 치즈 커터이다.
치즈커터는 노르웨이인들이 매우 자랑스러워 하는 노르웨이의 발명품이다. 실제로 우리 신랑은 수 년 전에 처음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면서, '친한 친구가 생기면 선물로 줘야지' 하고 치즈커터를 두 어 개 챙겨왔었다. 물론 그 중 하나는 나를 주었고, 후에 우리 부모님을 처음 뵈러 갈 때도 선물로 드릴만한 특산품을 고민하면서 "치즈 커터 좀 좋은 걸 하나 사 갈까"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는 치즈를 그렇게 덩어리로 팔지도 않고 녹이지 않은 상태로 먹질 않기 때문에 필요 없을 것이라 말했지만, 그만큼 치즈 커터는 노르웨이인들이 중요시하는 아이템이다.
사실 나는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는 최신 주방 도구를 많이 보아서 처음에는 그닥 인상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 치즈 커터는 아날로그적이고 전통적이면서 사람들이 이에 대한 자부심이 크기 때문에 쉽사리 대체되지 않을 것 같다. 만약 노르웨이인인 친구가 "저, 우리나라의 특산품이야..."하면서 수줍게 작은 박스를 내민다면 십중팔구 치즈 커터일 것이다. 굉장한 우정의 증표이니 이거 도대체 어디다 쓰나 생각지 말고 신기하고 귀중하게 여겨주시라.
와플과 관련해서 잠시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오슬로에 있는 Haralds Vaffel 라는 가게이다 ([하랄즈 바플레르]라고 읽는다. 웹사이트: haraldsvaffel.no/). 현재 국왕인 Harald V* [하랄]의 이름을 따서 노르웨이 정통 와플을 판매하는 곳이다. 맛도 맛이지만 이야기가 재미있는데, 가게 주인은 몇 년 전 가난한 학생이었고 소소한 용돈을 벌기 위해서 본인이 사는 1층 아파트의 창문을 열고 거기서 와플을 그냥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와플이 동네 사람들 입소문을 타면서 유명해졌고, 지금은 어엿한 가게가 되어 소르베와 아이스크림까지 같이 파는 소소한 로컬 아이콘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가게와의 친분이나 관련은 없지만, 비건 와플 옵션도 있고 소르베도 여러가지라서 유당불내증이 있는 나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가게라서 만족도가 높다 (웬만한 카페에서 쌓아놓고 파는 와플은 보다 차갑기도 하고 일반 우유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혹시나 이 글을 본 누군가가 노르웨이에 놀러온다고 해도 직접 노르웨이식 와플 기계를 구해서 만들어 먹기 어려울테니 추천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고 싶다면 웹사이트에 기본 와플 레시피가 나와 있다 (haraldsvaffel.no/oppskrift). 그러나 레시피 기준이 와플 25개 용이니 주의하시길!
*역대 국왕 중 Harald이라는 이름을 가진 5번째 사람이라서 Harald the fifth (로마자 V)이다.
*[판네카케르 / 판네카께르]라고 읽고 Pannekake[판네카케 / 판네카께]의 복수형이다.
보통 팬케이크는 통통하게 만들어 여러 장 쌓아 놓고 베이컨과 메이플 시럽을 곁들여 먹는 북미식의 팬케이크가 가장 유명하다. 반면 노르웨이식 팬케이크는 아주 얇게 후라이팬에 구워서 후다닥 잼 발라 먹는 맛이다. 두께는 크레페의 여러 장 중 한 장을 떼어 먹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접시 위에 팬케이크를 한 장 깔고 중간에 길게 블루베리 잼을 바른 뒤에 돌돌 말아 먹는다. 사실 와플과 팬케이크 반죽을 만드는 데 엄청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데, 와플 반죽보다 액체 재료 (달걀과 우유 등)를 더 많이 넣고 묽게 만들어서 후라이팬에 휘리릭 돌려 얇게 바싹 얼른 구워 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팬케이크를 만드는 데는 설탕이 조금 들어가서 맛이 와플보다 더 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항상 언제나 예외없이 블루베리잼을 발라 먹는다. 경험상 그게 제일 맛있기도 하다. 실제 생블루베리를 곁들여서 같이 먹어도 맛있다. 하지만 블루베리는 항상 흔적을 잘 남기기 때문에 (^^) 팬케이크를 먹고 난 뒤엔 꼭 거울 확인이 필수. 개인적으로 노르웨이식 팬케이크를 판매하는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자주 보지는 못한 것 같은데, 그만큼 이 메뉴는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다. 보라색이 되는 입술 때문일까...?
이건 반드시 점심 메뉴는 아니지만, 해가 길어지는 요즘 점심과 저녁의 경계 즈음에 자주, 또 쉽게 먹는 음식이라 소개하고자 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의 큰 종특 중에 하나가 "해가 나면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해가 오후 3-4시에 지는 겨울 계절이 긴 만큼 다들 햇살에 목말라 있는 탓도 있고 (ㅋㅋㅋ) 여름에는 밤 열한시, 심지어 북쪽 지방에서는 하루 종일 아예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걸 최대한 즐기는 문화가 발달한 탓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같은 초여름, 날씨가 좋은 날에 사람들은 공원에 가서 직접 바베큐를 해 먹는다. 한국어를 배우는 신랑이 많이 했던 실수 중 하나가 "점심으로 구워 먹었어요" 라는 말인데, 노르웨이에서는 야외에서 직접 소세지나 꼬치 따위를 구워 먹는 "BBQ 하기"가 그만큼 흔해서 목적어 없이도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서는 여름에 모든 공공장소인 공원과 숲, 산에서 바베큐를 할 수 있다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이는 자연은 우리 모두 공통의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겁고 비싼 바베큐 그릴을 장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지 슈퍼마켓에 가면 아주 쉽게 일회용 그릴을 구매할 수 있다. "Engangsgrill" 이라고 쓰인 것을 찾으면 되는데, 발음은 [에엔강스그릴]이고 영어의 one-time-grill 이 세 단어에 각각 합치하는 노르웨이어를 붙여 놓은 것과 같다.
처음에 예열하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사용법도 간단하다. 공원이나 산에 편평하고 잔디가 낮거나 없는 입지를 찾은 뒤, 동봉된 받침대 위에 그릴을 올린다. 연기도 나고 안전 이유도 있으니 먹을 자리에서 2-3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불을 붙이는 것이 좋다. 점화 후 20분 정도 기다리면 컸던 불이 조금 잦아드는데 그 때 준비한 소세지 (노르웨이어로 "pølse"라고 쓰인 것. [폴세 / 펄세] 중간으로 발음한다)나 꼬치와 같이 많이 두껍지 않은 고기류, 혹은 원하는 채소를 올리면 된다. 화력이 꽤 강하지만 일회용이다보니 처음 고기를 굽기 시작하고 2-30분 후에는 새로운 차가운 고기를 올리지 않는 것이 좋다.
Engangsgrill도 구비했으니 이제는 재료를 준비할 차례. 케첩이나 머스터드와 같은 소스, 양파나 할라피뇨 피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세지와 돗자리를 가지고 공원으로 가면 누구나 아주 간단하게 바베큐를 꾸릴 수 있다. 코로나 이전 여름에는 친구들을 만나거나 누군가의 생일일 때 이렇게 소소하게 둘러 앉아 음식을 구워 먹는 것을 정말 많이 했었다. 개인적으로 그릴에 구워 먹는 것으로 정말 추천하고 싶은 것은 버섯. 물론 본인은 애초에 버섯을 좋아하기 때문에 취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버섯을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만으로 간을 한 뒤 공원에 가서 그릴에 구워 먹으면 정말. 진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다. 후라이팬에 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요.
구운 소세지는 가져온 토핑을 이것저것 곁들여서, 길다란 빵인 핫도그 번과 함께 먹거나 lompe [롬페 / 롬뻬]에 얹어서 먹는다. Lompe는 감자와 약간의 밀가루를 섞어 만들어진 노르웨이의 얇은 빵 종류이다. 전통적으로는 아주 높은 온도로 달궈진 손잡이가 없는 동그란 무쇠 후라이팬에 만들지만, 아무래도 감자 반죽이다 보니 점도가 낮고 잘 부서져서 만들기가 까다롭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가게에서 파는 것을 사서 먹고, 그래서 차가운 음식이다.
주로 위 사진 처럼 소세지를 얹은 뒤 동그랗게 말아서 먹는데, lompe 자체는 꽤나 밍밍하고 딱히 인상적인 맛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기름지거나 바삭거리지 않으며 약간의 쫄깃함과 밍밍한 감자맛이 느껴지는 얇은 반죽이랄까. 이 lompe는 꼭 야외에서 구운 소세지와만 먹는 것이 아니라 삶은 소세지 등을 올려서 간편하게 먹기도 한다.
노르웨이에서 바베큐 하기가 이렇게 흔하지만 반드시 주의할 점이 있다. 이 일회용 그릴을 1년 내내 사용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화재주의경보가 활성화되면 바베큐를 금지하는데, 이는 해당 지역 정부 홈페이지에서 확인해야한다. 예를 들어 지금 오슬로는 4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야외 바베큐 가능기간이라고 한다 (출처: oslo.kommune.no/brannvern-ildsted-og-feiing/bal-og-grill/).
뿐만 아니라 이 그릴을 버릴 때도 조심해야 한다. 일반 쓰레기통이 아니라 일회용 그릴을 버리는 전용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전용 쓰레기통은 보통 커다랗게 "Brukte Engangsgriller" (사용된 그릴) 라고 쓰여 있고, 어느 공원이나 있기 때문에 찾기 어렵지 않다. 다만 버리기 전에 반드시 그릴에 약간의 물을 뿌린다던지 해서 불을 완전히 끄고 온도를 낮춘 뒤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점심으로 샌드위치, 와플, 팬케이크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다. 어딜 가든 여러가지 먹거리를 판매하는 레스토랑도 많고, 햄버거나 달걀 볶음, 소세지, 토마토 빈 따위를 한 접시에 내온 미국식 점심을 제공하는 카페도 꽤 많으며, 케밥이나 팔라펠(falafel)과 같은 길거리 음식 등은 더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래도 빵을 기반으로 한 샌드위치류를 가볍게 먹는 것이 가장 흔한 점심이며, 주말에 느긋하게 와플이나 팬케이크를 가끔 만들어 먹는 것. 게다가 보다 따뜻하고 갖추어진 '요리'는 저녁에 먹는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어떤 요리를 먹는지, 그리고 명절 음식은 어떤지 다음 번에 더 소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