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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Aug 20. 2024

매일글쓰기 100 | 지나가는 마음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지나가다
동사
시간이 흘러가서 그 시기에서 벗어나다.


시인은 여름의 시작을 유월이라고 하면 칠월을 지나 팔월은 지나가고 남은 계절 같다고 했다. 그래서 서문의 제목이 잔서의 날들이라고. 잔서는 남아있는 더위라는 뜻이다. 남아있는 더위, 남아있는 여름의 끝자락. 잔서의 날들인 팔월의 하루하루가 담긴 시인의 산문집을 시인을 만나기 전 책방에 미리 가서 읽었다.

시의적절 시리즈는 매일 한 편, 매달 한 권, 1년 365가지의 이야기이다. 8월의 시인은 한정원이다.




한정원의 8월, <내가 네번째로 좋아하는 계절>

전주 물결서사에서 한정원 시인을 만났다. 시의적절 시리즈는 매일 한 편의 글을 쓰는데 시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와 산문 외에 편지를, 인터뷰를, 동화를, 짧은 동화를 썼다. 한정원 시인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라서 갸우뚱할 수 있는데 어떤 사진은 글이 될 수도 있다. 사진을 보다 보면 어떤 마음으로 흘러넘치기도 하므로.

시인에게 사진은 일기 같은 것이다. 사진을 잘 찍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찍기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찍고 순식간에 찍기도 한단다. 오히려 기록은 잘하지 않는 편인데 말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더 많다고 했다. 무언가를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글로 쓰고 싶지 않을 때가 있고 언어로 꺼내기까지가 참 힘들다고. 그래서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매일 찍었다는 시인. 사진이 좀 더 컸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다. 시인의 시선과 마음을 좀 더 크게 보고 싶었다.

여름의 시간이 지나간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젖은 수국으로 가득한 길가, 풀벌레 소리와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은 좁은 골목길, 커다란 창가 앞에 앉은 고양이 한 마리, 묵직한 목소리로 낭독하는 시인, 시인 곁에 둘러앉은 사람들.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올까. 지나가는 시간과 사람들, 시인이 낭독하고 시인의 책 이야기를 드는 시간.

시인처럼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 지나가는 순간을 시인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 아니라 내가 네번째로 좋아하는 계절이라고 말하는 시인이 좋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여름이 힘들다는 이유로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시간을 뒤로하고 좋은 건 뭐가 있는지, 여름은 어떤 계절인지 좀 더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싫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나도 싫어하는 이유를 찾기보다 좋아할 만한 이유를 찾고 싶다.


시인은 쉽게 쓰는 글은 없다고 했다. 인생은 대충 살아도 글쓰기만큼은 결벽증을 가진 것처럼 썼다. 계속 고치고 또 고치면서. 그렇게 A4용지 반쪽을 쓰는데 9시간이 걸리기도 했다고. 쓰는 게 너무 힘들어서 공황이 온 것처럼 숨이 막히고 괴로울 때도 있다는 시인 때문에 애틋해졌다. 쓰는 게 편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요즘 내 마음 같아서 울컥하면서도 뭉클했다. 마음이 후루룩 쓰고 고치면서 편하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쓰는 일은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글을 쓴다는 것이 이렇게나 괴로운 일임에도 계속 쓰는 우리들이 안쓰러운 게 아니라 애틋하다. '우리'에 시인도 있어서, 내 편이라고 말해준 시인 덕분에 오늘 또 쓸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100일 글쓰기를 한정원 시인의 이야기로 끝맺을 수 있어서 기쁘다. 나의 글벗들과 100일 동안 나의 글을 읽어준 당신들이 있어 여기까지 왔다. 나에게 다정한 관심과 따뜻한 응원을 해준 당신들에게 사랑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우리의 인연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여름이 지나가는 것처럼 우리의 시절도, 인연도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나는 코끼리처럼 잊지 않고 바닷가를 홀로 걷더라도 100일의 마음을 잊지 않고 오래오래 머물러 있을 것이다. 코끼리의 콧노래가 들려오는 바다에서 우리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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