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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Mar 21. 2024

디딤석을 만들며

경계를 넘쳐 흘러내린 흙의 견고한 변신


봄철 해빙기와 장마 끝자락의 늦여름이면 산을 깎은 분양지의 산과 닿은 경계면으로 흙이 흘러내린다.

먼저 이 집에 살던 사람은 트랙터를 마당에 올려서 흘러내린 흙을 다시 산으로 퍼서 넘기는 공사를 했다고도 한다.


축대를 쌓는 방법도 있겠지만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해보아야 내 키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치형의 경계면을 벽으로 둘러쳐서 막아버리는 번거로운 공사를 하기보다는 흘러내리는 흙이 저절로 경사를 만들 수 있도록 경계면 중간중간에 모래마대를 놓아보기로 했다.


수업자료를 만들 때 참고하기 위해 이용하기 시작한 핀터레스트는 이 작은 뜨락을 가꾸기 위해서도 더없이 유용한 참고가 되고 있다. 경사면을 활용해서 식물 배치를 하고 있는 사진 한 장에서 힌트를 얻어서 작은 계단형의 경사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긴 한데 아마도 몇 번의 계절이 더 지나서야 안정된 형태가 나오게 될 것 같다.


마당에 넘치게 된 마사토를 모아 담다가 예정에 없던 마당놀이를 시작했다.


디딤석 만들기.


그것 또한 핀터레스트를 통해 얻은 아이디어였는데 알리익스프레스를 통해 싸게 구입한 콘크리트 몰딩에 로켓배송으로 받은 시멘트와 마당으로 흘러들어온 마사토를 섞은 반죽을 부어서 굳히면 그럭저럭 괜찮은 정원디딤석이 만들어진다.


거창하게 몰탈 몇 포대를 교반기에 섞어서 여러 장을 찍어내는 그런 작업이 아니다. 비료포대를 깔아 둔 바닥 위에 다 합쳐보아야 5리터가 될까 말까 한 양의 흙과 시멘트를 섞은 뒤 물을 부어가며 약간 질게 반죽을 하면 두 개의 틀을 채울 수가 있는 양이된다. 그러니 하루에 두 장의 정원석을 만드는 별로 힘들 것 없는 꼼지락 마당놀이인데 만드는 과정이 차츰 손에 익어서 첫날 만들었던 두 장에 비해 다섯째 날 만든 두 장은 제법 모양이 매끈해져 있다.


틀에 반죽을 고르게 붓고 잠시 후 틀을 들어 올릴 때 짠! 하고 나타나는 모양을 보면 쿠키반죽을 틀로 찍어내거나 초콜릿 몰딩에서 잘 굳은 하트 모양 초콜릿을 꺼낼 때, 아니면 반듯하게 잘 굳은 비누와 향초를 몰딩에서 꺼낼 때와 다르지 않은 짜릿한 기쁨이 생기곤 한다.


오래 전 어느 날 집 상담을 하던 첫 시간에 구성원들이 스스로 불리고 싶은 가명을 정해서 자기소개를 할 때였다.

나는 그때 나를 '달개비'로 소개했다.

왜 '달개비'인가 하는 질문에

'달개비는 내가 애를 써서 돌보아주지 않아도 추위만 피하게 해 주면 쑥쑥 잘 자라서 작고 예쁜 꽃을 피우니까'라는 대답을 했었다.


 순간순간 참으로 많은 책임감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상담을 받다 보면 상담사가 나에게 '지쳐있다. 매사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지 말고 지내라'는 말을 해 주곤 했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지낼 수는 없는 직업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때의 내 답이었다.


힘들게 애를 써도 가시적인 결과물을 기대할 수 없는 어떤 직업군의 사람들에게는 결과물이 바로바로 눈에 보이는 일련의 작업이 힐링이 된다고 했다. 반려식물 키우기도 그중 하나인데 추운 베란다 한켠에서 기본적인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도 쑥쑥 자라서 작지만 커다란 꽃무리를 보여주었던 달개비에게서 위로를 받았던 시절이었다.

한편으로는 또 그렇게 힘들게 지내왔던, 그러니 '조금 내려놓으시라'는 충고를 듣던 그 시간들이 지금까지도 스스로에게 대견스럽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천천히, 바쁠 것 없는 조용한 시골의 초봄 한 낮, 여기저기서 물 오른 나뭇가지가 꽃망울들을 모으고 있는, 한쪽 구석에 놓아둔 고양이 사료를 열심히 채가며 소란스럽게 지저귀는 산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서툴게 디딤석을 만들고 있다.


비와 바람에 쓸려내려온 흙이 시멘트와 물을 만나 모양을 갖추어 쓰임을 찾아가는 일을 조금씩 천천히 하는 지금의 시간도 나는 꽤나 마음에 든다.


어제 흘러내린 흙에 물과 시멘트를 섞어 오늘의 내가 모양을 찍어내면 내일의 시간이 그것들을 차차 견고하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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