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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Jul 03. 2024

헤어숍 말고 미용실

퇴직자가 된 뒤 가끔 나가게 되는 한낮의 마을 골목골목에서 그동안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분위기를 만나곤 한다.


대형마트나 편의점에는 각각의 주요 고객층이 있을 텐데 나 또한 출퇴근길 갑작스러운 쇼핑에는 편의점을, 조금 마음을 먹고 장보기를 할 때는 주차장 이용이 편리한 대형마트를 이용하고는 했다.

최근엔 대부분의 쇼핑을 로켓배송으로 해결하고 있으니 대형마트에도 별로 갈 일이 없어진 마당에  

가끔 갑작스레 필요해진 물건이 생기면 마을 군데군데 슈퍼마켓보다 조금 큰 규모로 들어와 있는 마트를 이용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밀가루와 오이가 필요해진 나는 장바구니 하나를 들고 열한 시쯤 문을 연다는 중형 마트에 게으른 걸음으로 방문을 해서 몇 가지 물건을 카트에 담고 느릿느릿 계산대로 갔다. 앞에는 노령의 여자분 한 분이 천천히 물건값을 계산하기 위해 카드를 다가 승인 거절이 떠서 카드를 돌려받고는 지폐를 꺼내고, 동전지갑을 열어 동전 몇 개를 꺼내 나머지 금액에 맞추어 지불을 하고, 영수증을 받아서 다시 지갑에 차곡차곡 정리를 하셨다. 계산원은 뒤에 서 있는 내 눈치를 보면서  그분이 물건 정리를 끝까지 마치고 돌아서실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분이 장바구니와 가방을 들고 계산대를 떠나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보다 더 연세가 들어 보이는 남자분 한 분이 내 앞으로 와서 계산대에 막걸리병 하나를 올렸다. 계산원은 얼른 그분에게 나를 가리키며 대기 순서를 알려주는 말을 하려고 했다.

"저기, 저분이 먼저.."라고 말하는 계산원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그분이 먼저 계산을 하셔도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계산원은 천천히 그 어르신의 막걸리 한 병을 계산해 드렸고, 봉투를 달라는 그분에게 봉투값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무료로 드릴 수 있는 봉투는 손잡이가 없어요' 하는 말을 하며 투명한 봉투 하나를 그분에게 건넸다. 그분은 손잡이가 없는 봉투밖에 없는 것에 약간의 클레임을 거는 듯한 말씀을 하시려다 그냥 멈추고 투명봉투에 담긴 막걸리를 들고 나가셨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계산원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내 물건의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한낮의 골목 마트 계산원은 그야말로 사회복지사였다.


신용카드 사용기한이 다 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월급 이체 실적이 없는 관계로 신용점수가 변동이 되어서인지 사용하던 카드 재발급이 거절되었다는 문자가 오더니 다음날엔 재발급 승인이 되었다는 조금 변덕스러운 내용이었다.

스마트뱅킹으로 카드 재발급을 신청하려다가 이젠 낮시간에 연가도 조퇴도 외출도 내지 않고 은행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직접 은행 창구에 가서 해결을 하기로 했다.


대기번호표에 나온 숫자와 창구에 표시된 번호로는 내 앞으로 일곱 명이 있었다.


은행 대기의자에 앉아 곧 내 차례가 올 것이라고 예상하며 나는 신분증을 지갑에서 꺼내놓고 있었는데 의외로 긴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조용한 은행 창구에서 각각의 상담 내용이 저절로 대기실 사람들에게로 전해져 왔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남편의 통장에서 돈을 찾기 위해 먼저 은행에 방문해서 대기표를 받아놓고 남편 도착을 기다리는 아내의 업무 처리. 약간의 기다림이 있었고 약간 복잡한 절차로 업무가 진행이 되었다.


어린 아기를 안고 순서를 기다리던 아기엄마는 약간 눈살이 찌푸려지는 언어로 우는 아기를 달랬기에 창구 안의 모든 사람들은 저절로 그 모녀에게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엄마 차례가 되었을 때 안내원이 아기를 잠시 돌보아주겠다고 말하며 그녀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아 옆으로 비껴 섰고, 잠깐의 자유를 얻은 엄마가 창구 직원과 나누는 대화 내용도 저절로 전해져 들렸다. 외국인 등록증과 통장 개설과 지원금 신청과 같은 이야기들이었는데 나로써는 처음 들어보는 낯선 단어와 절차들이었다.

 

천천히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승인 거절과 심사완료 두 가지 문자를 동시에 받은 내 카드는 심사가 완료되어 곧 배송이 시작될 것이라는 설명을 해 주는 창구 직원에게 나는 사용하기 좋은 카드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곧 내 소비 성향에 적합한 카드를 찾아내었고 여러 번의 동의 확인과 계좌 연결과 비밀번호와 주소를 입력하며 신용카드 신청 절차를 마쳤다.


한낮의 은행 창구 직원은 연로하신 어르신과 이주민과 퇴직자들을 위한 안내자였다.


어느 날, 자주 다니는 헤어숍에 커트 예약을 하기 위해 네이버 예약 페이지를 열다가 또다시 굳이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동네를 산책하다 한산한 미용실에서 머리를 커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좀처럼 다닐 일이 없었던 골목길을 산책 삼아 거닐다가 눈에 들어오는 한 미용실이 매우 한가해 보였기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헤어숍이 아닌 동네 미용실.


몇십 년은 족히 흘려보낸 벽지와 의자와 거울과 집기류들이 정리된 듯 아닌 듯 놓여있는 미용실 정면으로 작게 나 있는 쪽문을 향해 서 계시던 여자 어르신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머리를 자르러 왔다고 말했고, 그 어르신은 나를 낯설게 쳐다보다 안쪽의 문을 향해서 '손님이 왔다'라고 말했다. 안에 있던 사람이 잠시 뒤 나오면서 나에게 가운데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말을 했다. 내 나이 또래의 여성분이었다.


나는 머리를 다듬어달라고 말했고, 그녀는 본시 선량하고 싹싹한 사람이지만 한 번도 요즘 스타일의 고객 응대법에 대해 접해보지 않았던 이력을 그대로 보이는 응대를 하면서 가운을 내 어깨에 둘러주고 가위를 들어 커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만 기울여야 할 때

 "고개를 조금만 기울여주시겠어요?"

하고 묻거나 힘이 들어가있않은 상태의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터치하며 움직여야 할 방향을 살며시 알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약간 굽힌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사용해서 거침없이 내 머리를 움직이곤 했다. 왼쪽으로 고개를 움직여야 한다면 오른쪽 뒷머리 부분을 밀었고, 앞으로 고개를 숙여야 한다면 뒤통수를 그 손으로 밀곤 하면서.... 그리고....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날렵한 가위질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았고 길다란 칼 같은 것으로 내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자르고는 둔탁한 가위로 다듬는 반복이 이어졌다.


'아! 잘못 들어왔구나. 내가 너무 용감했나 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괜찮아! 내 머리는 금방 자라니까 한동안 모자를 쓰고 다니다가 다음에는 단골 헤어숍엘 가야지 뭐.... '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런 애를 쓰던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그만 저절로 미소를 지어버리고야 말았다.

내 머리를 그렇게 싹둑싹둑 자르는 동안 나를 맞이하던 어르신과 미용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것을 들으며.


내 머리를 자르는, 헤어디자이너가 아닌 미용사인 그녀는 내 머리를 자르면서도 건강 염려증이 있는 동네 어르신에게 마음을 쓰시고, 휴대폰 충천을 핑계로 들어오셔서 끊임없이 이런저런 말을 붙이시다가 결국 '내, 집에 혼자 들어가 있기가 여간 적적한 게 아니어서 그런다'는 고백을 하시는 어르신의 말 상대를 해 드리고, 미용실에 손님이 없어야만 편안히 들어오셔서 이발을 하시는 숫기 없는 남자 어르신에게 편히 이발을 해 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이야기하시는 마을의 요양보호사였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머리 주변에서 왔다 갔다 하는 칼날 소리에 약간 겁을 집어먹고 있던 터였으니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여겨지던 커팅이 마무리가 되었다.

내 얼굴과 목 주변의 머리칼을 스펀지로 털어내고 가운을 벗기고 옆으로 물러 서서 내가 일어서기를 기다리는 그녀는 어쩐지 살짝 언 듯했다. 내 표정을 살피고 있다는 것이 대번 느껴질 정도로 딱딱하게 긴장된 모습이었다.


"아이고, 개운하다!"

슬쩍 거울을 보면서 나는 인사차 그렇게 말하며 일어났는데, 사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다지 머리 모양이 나빠보이지 않았으므로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약간 걱정스럽게 나를 보는 그녀에게 얼마인지 물었다.


"만원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카드를 꺼내려고 지갑을 열었을 때 내 눈에 지갑 속에 있는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 두 장이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모두 꺼내서 그녀에게 건넸다.

"뭐, 이리 싸게 받아요~ 이거... 조금만 더 받으세요~"

그녀는 내가 건넨 돈이 너무 많다며 굳이 천 원짜리 두 장을 더 받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얼른 가방을 들고 인사를 하며 미용실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스마트폰을 열자 일본 도쿄돔에서 '푸른 산호초'를 부르는 뉴진스멤버의 숏폼 영상이 추천으로 떴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지금 내 머리 모양이 꼭 저렇다.

레트로풍의 정서를 담은 뉴트로의 단발이라는 세련됨은 없지만 오리지널 레트로 그 자체의 단발 말이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엄마 손에 이끌려 들어갔던 엄마의 단골 미용실...아니 미장원에서 처음으로 잘랐던 그 단발머리가 거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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