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모르기 위한 첫 번째 노력
나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워서 클래식과 친하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모은 CD나 LP를 주말에 틀어주시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클래식을 들을 때면 감은 눈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과 음악만이 나와 함께 했다. 특히 교향곡이나 콘체르토에서 서로 다른 악기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특히 바이올린의 목소리를 찾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클래식은 "멋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학창 시절에는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밝히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MP3에도 클래식은 넣어 다니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다. 그냥 아버지 세대가 즐기는 그런 고리타분한 음악을 좋아한다고 또래 친구들한테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친구도 없었다. 그 친구들도 나처럼 숨긴 것일지도 모르지만.
학창 시절 나는 동방신기, 소녀시대, 빅뱅 등 나와 같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좋아했던 아이돌의 노래를 들었다. 물론 좋아서 들은 거고 이들의 노래는 아직도 좋다. 최근 15주년 앨범을 발매한 소녀시대의 무대를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등학생 때는 락 음악을 들었다. Boys like girls, My chemical romance 등 그 당시 내가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미국 밴드의 팝스러운 락 음악을 좋아했다. 이렇게 클래식을 외면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장르의 음악들만 자주 듣다 보니, 정말로 클래식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클래식을 되찾은 것은 수능이 끝나고 나서였다. 학교나 학원을 가지 않고 집에 오래 있다 보니 아버지가 들으시는 클래식 음악을 다시 많이 듣게 되었다. 하루는 내 방을 대대적으로 청소하다가 바이올린 케이스에 먼지가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기분이 이상해서 바이올린을 열고 가장 가까이 있던 악보를 연주했는데 가슴이 뛰었다. 4-5년 정도를 켜지 않아 실력이 현저히 줄고 실수도 많았는데도 내 연주가 스스로 황홀할 정도였다. 대학에 합격하고 고등학교 내내 모았던 용돈으로 조금은 좋은 바이올린을 사고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들어갔다. 사춘기와 함께 이별했던 클래식 음악과 재회한 것이다.
대학생 시절엔 또 대중가요와의 이별을 고했다. 생각해보니 아이돌 노래는 너무 유행을 타는 것 같고 노래가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새로 데뷔하는 걸그룹들이 서로 조금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학교가 홍대와 가까워서 버스킹도 자주 접하고 인디밴드 공연을 보러 가다 보니, 인디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때부턴 난 "음원차트 음악은 잘 모르고 인디 락을 좋아한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이때 빠졌던 가수들은 몽니와 브로콜리 너마저, 짙은, 검정치마 등이 있다. 특히 몽니 콘서트에서 받았던 충격과 김신의 보컬의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소위 "대 2병"이라 불리던 대학생 시절 제2의 사춘기에는 인디라는 새로운 장르와 만나느라 대중가요와 헤어졌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엔 떠나왔던 대중가요를 다시 찾아갔다. 조금씩 바빠지고 다른 관심사가 많이 생기면서 새로운 음악을 찾을 시간이 없었다. 트렌드를 놓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음원차트를 챙겨 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인 태연이 솔로 데뷔를 했고, 그녀의 노래는 늘 음원 차트에 있었다. 아이유 노래도 더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노래 또한 음원 차트에 항상 있었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은 모두가 좋아하는 노래구나,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바로 한국 대중가요다, 하고 다시 정의를 내렸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다른 장르의 음악들과도 함께 만났다. 문어발을 걸치면서 과거의 음악들을 모두 찾아다녔다. 한 때 좋아했던 음악들이 이제는 모두 그 시절의 장면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다 보니 깨달은 것은 굳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를 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고 싶어서, 지금 좋아하는 1순위의 음악이 뭔지 정하고 싶어서 굳이 여러 음악들을 2순위 혹은 3순위로 밀어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들으면 되는 게 음악인데.
지금 누군가 나에게 무슨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냥 음악이면 다 좋다"라고 답한다. 나는 음악 장르에 어떤 것이 있는지 다 알지도 못한다. 사실 재즈는 아직 좋다고 느낀 적도 없다. 그래서 다 좋다고 말하는 건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답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앞으로 내가 어떤 음악을 또 좋아하게 될지,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음악 장르 중 어떤 음악이 또 싫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려고 노력해왔지만, 그냥 모르겠다고 생각하고부터 더 많은 음악을 좋아하고 즐기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했던 노력이, 사실은 내가 좋아했던 것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기도 했다. 이제는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로 있으려 한다.
나를 모르기 위한 첫 번째 노력이다.
요즘에는 심지어 시크릿 쥬쥬의 엔딩곡도 가끔 틀어놉니다. 공포영화 곤지암을 보고 너무 무서운 나머지 찾아 틀어 놓았던 시크릿 쥬쥬였는데, 엔딩곡이 자꾸 생각나네요.ㅎㅎ
PS. 추천하고 싶은 노래나 장르가 있다면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