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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스 Aug 24. 2022

용돈 받아서 드리는 선물

독립과 종속의 경계에서

얼마 전 부모님께 77만 원짜리 음식물 처리기를 사드렸다. 


'월급'을 받기 시작한 뒤 명분 없이 드린 선물들 중엔 가장 비싼 물건이었다. 부모님께서는 너 나가는 돈도 많을 텐데 뭐 그런 걸 사냐, 선물로 음식물 쓰레기통을 주는 거냐고 살짝 투덜거리셨지만, 처리기를 받은 뒤에는 냄새도 안 나고 너무 편한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미생물 죽일까 봐 조마조마하는 거 귀찮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도 신나게 색상을 고르시는 것을 보면서, 지금까지 제대로 된 선물도 자주 못 드린 내가 못난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선물'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진 않지만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편한 삶을 드린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다. 



새내기 때부터 과외를 하면서 부모님께 받는 용돈을 끊었다. 당시에는 나름 어른이 되어 내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한다고 뿌듯해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다. 과외를 한 두 개 하면서 내 용돈은 충당했을 뿐 굵직한 지출은 모두 부모님이 해결해주셨다. 등록금, 가끔 필요했던 비싼 옷, 부모님과의 여행 경비, 집에서 해결하는 식비 및 생활비 등은 당연하게도 내가 감당하지 않아 부모님께서 부담하신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좋은 식당을 발견해서 함께 갈 때나 주말 아침마다 함께 조조 영화를 볼 때조차 나에게 계산을 맡기신 적이 없는데도 나름대로 경제적 독립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귀여울 정도로 철이 없었다. 


석사를 시작하면서는 수입이 조금 늘었다. 여전히 과외 및 알바를 할 뿐이었지만 연구 조교나 수업 조교를 하면서 받는 월급은 과외비보다 조금 많았고,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유학을 위해 본 영어 시험 등록비, 성적표 발송비, 대학원 지원 비 등은 내가 모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내가 모은 돈으로 어머니와 홍콩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합격 이후에는 과외와 알바를 늘려서 월급 수준의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모두 다 했다. 부모님께 식사도 몇 번 대접했다.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딸이 유학을 앞두고도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본 부모님께서는 조용히 내 통장에 비상금을 챙겨주셨다. 


유학 이후에는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학교에서 생활비를 지원해주었지만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20만 원 남짓이었기 때문에, 대학생 때부터 들었던 적금까지 깨면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도 부모님께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오기 전에는 몰랐던 지출이 생각보다 많았고, 세금을 제한 학교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에서는 생활비가 모자랄 때 과외를 늘리거나 단기 알바를 했는데, 미국에서는 추가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는 제약 때문에 늘 적자였다. 분명히 돈이 부족하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는데, 부모님께서는 딸내미 보고 싶어서 우리가 부르는 거라고 하시면서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어주셨다. 


지금까지는 부모님께 어떤 선물을 드려도 마음 한편은 찝찝했다. 늘 내가 드리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았다. 모처럼 모은 돈으로 어머니와 홍콩 여행을 갔을 때도, 딸내미가 여행 보내주니까 엄마가 맛있는 거 사줘야지, 옷 사줘야지, 하면서 쓰신 돈이 사실 더 많다. 조금 힘들 때면 귀신 같이 눈치채시고 통장에 비상금을 넣어주시기 때문에, 유학 중에 부모님 생신이나 기념일 겸 돈을 보내드리면 그저 받은 용돈에서 조금을 다시 돌려드리는 기분이었다. 


"용돈이어도 받는 순간 그건 너의 돈이고, 그걸로 주는 선물도 너의 마음이 담긴 진짜 선물이야."


부모님은 늘 감동이고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용돈으로 드리는 선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오히려 부족한 상황에서 선물을 샀다고 부담스러워하시는 건 아닌지. 늘 마음이 불편했다. 


유학 3년 차가 되면서 비로소 국제기구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월급'이란 것을 받게 되었다. 주 20시간밖에 일하지 못해 풍족하진 않지만, 드디어 제대로 된 경제적 독립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첫 월급으로 패딩, 화장품, 스킨케어 기계 등을 사서 한국에 갔다. 딸이 드디어 월급 타서 부모님 선물 사드리는 거라고. 이건 정말 다른 사람이 노동의 대가로 준 돈으로 산거라고 신나게 자랑을 했다. 하지만 한국을 다녀온 내 손에는 내가 사 간 선물 보다 몇 배는 더 되는 부모님의 선물들이 들려있었다. 쏟아지는 내리사랑에 정신을 못 차리는 치사랑은, 늘 능력이 부족해서 경쟁에서 진다. 


이번 선물은 드디어 나만 드리는 선물이었다. 미국에서 온라인으로 보내드렸기 때문에 내 손에 또 다른 선물을 들려주시지 못했다. 10년 간 추구해 온 경제적 독립과 부모님께 의 보답을 드디어 시작한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다. 경제적 독립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나는 정신적으로 부모님께 완전히 종속된 상태이다. 외동딸을 유학 보냈다니 부모님이 참 아쉬워하셨겠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가장 아쉬운 것은 바로 나다. 부모님의 팬을 자칭하며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는 나에게 떨어져 사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한 미래였다. 미국에서 커리어를 발전시킬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미국 정착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것 또한 부모님 때문이다. 한국에 갈 땐 함께 있는 순간을 단 1초라도 더 눈에 담고 저장하고 싶어서 어머니와 함께 잔다. 어머니께서 "엄마 할 일 많으니까 제발 너 방에 돌아가"라고 하시면 그제야 아쉬워하며 내 방으로 온다. 


나는 눈물이 많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늘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닌 이상 나의 약한 모습은 잘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은 척 살다가도 부모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나를 어루만지면 눈물이 난다. 좋아서든 슬퍼서든. 내가 글썽이면 아버지가 우시고 그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가 우신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지금도 살짝 눈물이 난다. 역시나 나는 부모님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영원히 하지 못할 것 같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살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더라도 나는 늘 부모님께 종속되어 있고, 그럴 수 있음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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