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지인 Jul 08. 2022

고작 그 정도인 양호한 시어머니

온라인 세계에 떠도는 각종 막장 '시'자 썰들을 보고 있노라면, 현실감각이 없어진다.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썰과 썰 사이를 부유하다 보면, 내 삶의 안온함에 감사함을 느낄 지경이다. 정녕 이런 일이 가능한 건가, 눈을 비비며 읽게 만드는 썰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럴 때면 나는 반사적으로 영희씨를 돌아보게 된다. 그녀 정도면 훌륭하진 않더라도 나쁘지는 않은 시어머니인 걸까. 한국의 시어머니 전체를 놓고 보자면 그 중간값은 어느 정도 일까 가늠해보고는 하는 것이다. 며느리를 고되게 하는 정도, '시어머니력'쯤 되는 기준을 두고 한 줄로 세웠을 때의 중간값. 영희씨는 그 줄의 몇 번째에 서게 되려나, 중간 정도는 되려나 어림잡아 보기도 하지만 별 쓸모없는 망상일 뿐이다. 그녀가 앞에서 몇 등이든 뒤에서 몇 등이든, 며느리로서의 내 어려움은 결코 상대적일 수 없다.


"에이, 고작 그 정도 일 가지고? 너네 시어머니 정도면 양호한 거야."

그리고 거기에 뒤따르는 아무개네 '막장'시어머니의 사연들. 그러니 너 정도면 봐줄 만하니 엄살 부리지 말아라로 이어지는 말들. 기혼 여성이라면 으레 한 번쯤 들을 법한 말이었건만, 나에게는 소화가 어려워 턱턱 가슴이 막히는 말들이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듣다 보면 이 정도 시어머니, 이 정도 불편함, 이 정도 마음 상하는 일은 며느리로서 거뜬히 넘겨버려야 할 것들로 여겨졌다. 그 무게를 감내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의심도 잇따라 스멀스멀 일고는 했다. 내 고통이 '고작 그 정도 일', 혹은 더 불행한 며느리들의 사연에 기대어 위안받을 정도의 일로 치부되는 것 같았다. '이 정도' 일로는 시어머니를 문제 삼을 수 없다는 어떤 준엄한 규율, 거기에 어깃장을 놓아선 안되었다.


그러다 보니 영희 씨와의 일들을 써 내려가면서도 나에게는 늘 자기 검열의 부담이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영희씨의 말과 행동으로 상처받은 것은 나였지만, 정작 나는 그것이 혹 별 것 아닌 것인지를 끝없이 자문했다.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는지 무수한 검열을 거쳤다. 그러는 동안 내 손가락은 자주 백스페이스를 누르곤 했다. 고작 이 정도 일로 파르르 부르르 치를 떨며 글을 휘갈겨대는 요즘 애들로 치부되려나, 가족주의에 반기를 든 늙다리 MZ세대의 발악쯤으로 보이려나. 잡다한 단상이 난무했다. 그렇게 늘 한쪽 발은 '고작 이 정도'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으마으마한 시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영희씨가 내게 준 상처는 누구에게도 공감받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얼마 전까지도 영희씨로부터 마음이 상하는 일들을 겪을 때면, 나의 감정과 생각은 대개 비슷한 루트를 거치곤 했다.

그 첫 단계는 '당황'하면서 시작된다. 영희씨의 기습적인 모난 말들에, 나는 길가다 이유 없이 뒤통수를 맞은 사람 마냥 얼떨떨해지곤 했다. 얼빠진 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가늠해보며 내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복기를 찬찬히 시작한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이 있진 않았나 되짚어보면서. 이어 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다 마음속 일렁이는 뜨거운 감정이 잦아들 때쯤이면, 회의 혹은 자책의 단계로 접어든다. 별다른 악의 없이 한 말이 아니었을까, 혹시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적고 보니 흡사 범죄 피해자의 심리상태 같기도 하다. 어쨌든 피해자쯤 되는 나의 자책으로 그렇게 피날레를 장식하고 나면, 하나의 사건이 내면에서 일단락되곤 했다.


그러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날도 역시나 영희씨의 반복되는 어떤 말에 마음에 생채기가 난 날이었다. 자책으로 이어지는 루트를 기어코 충실히 거친 후, 그것도 모자라 나는 동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의 동생아, 언니에게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단다. 혹시 내가 이상한 거니, 그녀의 말에 화가 나는 내가 예민한 거니.


손가락을 바삐 움직인 끝에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그 찰나에 문득 깨달음이 덮쳤다. 내가 느낀 감정이 정당한지 끝없이 검열하고 있다는 사실. 내가 불쾌하다면 불쾌한 거고, 내가 무례하다고 느낀다면 상대가 무례한 것이 맞을 텐데. 나는 혹시 내가 예민해서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지 지나치게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종국에는 내 감정의 옳고 그름에 대한 답을 타인에게서 구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영희씨의 ,  수신인인 내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래, 그런 거다. 그런  맞다. 그런데   감정의 정당성을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 했던 것인지. 나는 '지인이  그럴만해.'라는 허락 혹은 자격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타인으로부터 오케이를 받고서야,  불편함이 나의 민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에 안도했었다. 그래, 영희씨가 잘못한  맞아. 내가 예민해서 그런  아니었어. 그런 슬픈 안도감 말이다.


이제 나는 영희씨가 불러일으키는 그 부정적 감정들을 좀 더 뻔뻔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누구나 감정을 자유로이 누릴 권리가 있다. 감정 그 자체는 옳고 그름의 잣대로 해석될 수 없다. 그런데도 나는 늘 내 감정이 예민함에 뿌리 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옳지 않은 것인지 끝없이 검증하려 들었다. 상대로 인해 내 마음이 상했고, 상처받았다고 느꼈다면 그걸로 족하다. 누구도 내 감정에 반기를 던질 수 없다.


아무개네 막장 시어머니보다는 낫다며 자위할 것이 아니다. 영희씨가 얼마나 양호한 시어머니인지, '그 정도'면 괜찮은 시어머니인지는 타인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 나 아닌 누구도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며 내 상처를 재단할 수는 없다.


그녀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함께하게  무수한 날들을 앞에 두고, 결의를 다져본다. 나는 예민한 촉수로 그녀의 무례함을  부지런히 탐지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가 나의 일상에 선사하는 횡포를 멈출 때까지 부단히 분노하겠노라고.

작가의 이전글 며느리의 살림을 지적하지 않는 예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