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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Jun 28. 2022

며느리의 살림을 지적하지 않는 예의


주부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 가는 안주인.
한집안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사람의 아내.


시어머니 영희씨는 '주부'다. 시가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가는 안주인 맞고, 집안의 제사를 충실히 아-주 충실히 맡아 받드는 아버님의 아내니까, 100퍼센트 '주부' 맞다. 그녀는 경력만 40여 년에 가까운 주부 9단이며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나로 말하자면, 우리 집 살림살이에 애쓰고 기여하고 있으니 주부라고 치고, 살림 실력으로 그 등급을 굳이 매겨보자면 1.5단 어디메 즈음 되려나. 이렇다보니, 영희씨는 나의 사수를 자청하여 살림 비책을 하사해주시고는 한다. 내가 내려주는 귀한 말씀들이 며느리 너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될 지어니!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귀한 말씀 대부분은 내 살림에 대한 지적과 취조다. 듣는 이에게나 우리 집 살림에나 별 영양가 없는 소리라는 얘기다. 내 집에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남으로부터 평가당하고 지적받는 일. 그런 일이 덮칠 때마다 합리성에 기대어 이해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녀의 말들은 합리라는 틀로는 해석할 수 없었다.


나는 되도록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려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시아버지는 우리 집에 올 때면, 집이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하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고는 한다. 그가 감탄사를 연발할 때면 곁에 선 영희씨는 늘 묵묵부답이다. 상대가 듣기 좋은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저주에라도 걸린 걸까. 그녀는 단 한 번도 정돈된 살림살이에 대해 일언반구 한 적이 없다. 그녀로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암묵적인 동의를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꾹 닫힌 듯 보이는 그녀의 입은 유독 주방에서만 자주, 많이 그리고 바쁘게 움직인다. 주방에 들어서 끼니를 준비할 때면 그녀는 꼭 나를 따라 주방으로 온다. 두 팔 걷고 주방 일 할 것도 아닐 텐데, 그녀는 굳이 옆에 서서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본다. 등이 뻣뻣해지며 손이 뚝딱거리기 시작한다. 고장 난 것처럼 갈 곳 잃은 두 손과 눈동자. 그녀는 그 틈을 쉽게 파고든다. 주방은 속된 말로 그녀의 나와바리다. 내 허점이 주방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한 그녀는 주방의 오야붕으로 군림한다. 그녀에게 나는 말단 꼬붕쯤 되려나. 손이 느리다,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나와봐 내가 하는 게 낫겠다로 이어지는 오야붕의 횡포에 나는 어물쩡 옆으로 물러선다.


주방의 꼬붕, 주부 1.5단 며느리는 밥을 안칠 때 정수기 물로 밥을 안치는데, 영희씨는 왜인지 그게 아주 못마땅하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그건 아주 '별난' 방식이다. 수돗물로 해 먹어도 안 죽는다, 우리나라 수돗물이 얼마나 깨끗한데. 영희씨는 내가 밥을 안치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단 한 번도 저 귀한 조언을 빼놓지 않았다. 매번 신기하리만치 똑같이 말한다.


죽을까봐 그러는 거 아니고요. 수돗물 깨끗한 줄도 아는데요, 수돗물을 컵에 따라 마시지는 않듯 전 그 물로 밥을 해 먹고 싶지 않은 거예요. 어머님은 왜 생수 사다 드세요? 깨끗한 수돗물 드시지.


하고픈 말, 해야 할 말들은 꼭 자기 전에 생각난다. 뭐 그 자리에서 생각났어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겠지만. 그런 나는 매번, 그 말에 어수룩한 대답을 해야 했다. 어 그게, 저는 원래 이렇게 해요.


우리가 사는 해외에서도, 밥을 지을 때면 어김없이 '그냥 수돗물 쓰지 별나다'를 시전 하셨다. 그곳은 물이 좋지 않기로 유명해 주방에서는 생수를 써야만 하는, 그런 곳이었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로써 우리나라 수돗물이 깨끗해서, 단지 수돗물을 예찬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그저 밥 짓는 며느리의 모습이 꼴사나웠다고 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정수물로 밥해먹는다고 하늘이 두쪽 나는 것도 아닌데, 영희씨는 내가 밥을 안칠 때마다 요란이었다.


지인이 엄-청 깔끔 떨고 별나네, 그렇게 별나게 구니 살림이 힘들지. 아! 살림살이가 힘든 이유는 내가 별나서였다. 다른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그저 내 성정이 별나서. 오늘도 가르침을 주는 주부 9단 영희씨의 말씀. 수돗물로 밥 팍팍 짓고 대충 살았어야 했는데, 이런 모지리. 영희씨는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현자다.


그녀가 열-심히 못마땅해했던 주방 살림은 또 있었다.

일회용 행주와 수세미.

아침 식사는 전무했고, 퇴근 후에는 간단히 끼니를 때우거나 외식, 배달을 주로 이용했던 우리에게 주방 살림을 관리하는 일이란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었다. 많아봐야 일주일에 두어 번 개장하는 주방을 관리하는 데 시간을 뺏기고 싶지는 않았다. 행주를 하얗고 깨끗하게 푹푹 삶아내는 일, 수세미를 잘 빨아 말리고 적절한 때에 새것으로 교체하는 일 따위는 우리의 이번 생에선 요원한 일 같았다.


주방의 오야붕 영희씨는 나에게 말했다.

행주 삶는 거 후루룩 하면 금방인데, 이렇게 일회용으로 행주를 쓰고 버리고 해?

아, 아주 일회용은 아니고요. 여러 번 써요, 굉장히 여러 번...


살림만 하는 그녀에게 행주 삶는 일이란 후루룩 뚝딱 정도 되는 일이겠지만, 나는 주기적으로 행주에 정성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회사 다니며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던 시절에도 여력이 없었던 일은, 아이가 생기고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녀에게는 일회용 행주를 써대는 내 모습이 헤프고 철딱서니 없어 보였나 보다.


그녀에게 또 하나의 눈엣가시였던 일회용 수세미 역시 툭하면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잠깐이라도 그녀가 수세미 쓸 일이 생기면, 그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너네 집엔 다른 수세미 없어? 다음부턴 저거 사지 마. 잘 닦이지도 않는 데다 아깝게 몇 번 쓰고 버리고 말이야.


영희씨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우리 집 찬장에는 아직 뜯지도 않은 일회용 수세미 한 박스가 채로 들어 있었다. 그 일회용 수세미의 내력을 말하자면, 엄마가 손수 구매해 우리 집으로 배송시킨 것이었다. 일전에 우리 집에 들렀던 엄마가 며칠 째 쓰지 않는 수세미를 보고는 그 바람에 주문해 보내준 것이다. 설거지할 일도 자주 없는데 드-럽게 한 수세미 오래 쓰지 말고 그때그때 새 걸로 쓰라며, 편하게 살라며 보내주었더랬다. 어찌 됐든 우리에겐 편하고 위생적이었던 수세미 사용법은, 영희씨가 우리 집 주방에 들어설 때마다 들르는 필수 잔소리 코스가 되었다.


그녀는 내가 키친타월을 뜯어 쓰는 일에도 열심히 관여한다. 주방 일을 하다 키친타월이 필요해 몇 장 뜯고 있노라면, 그녀의 말이 어김없이 뒤따른다. 왜 그렇게 많이 뜯어. 키친타월로 안 닦아도 돼, 지인이는 가만 보면 키친타월을 너무 많이 쓰더라, 그냥 행주로 닦아라. 왜 이렇게 깔끔을 떠니.

이어 라떼는-으로 시작되는 말잔치가 이어진다. 라떼는 말이야, 이렇게 깔끔 떨지 않아도 안 아프고 안 죽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하는 거지, 이렇게 깔끔을 떨고.

그녀의 눈길을 등지고 주방에 서 있노라면, 내 주방에서 키친타월을 뜯어 쓰는 일도 눈치를 보게 된다.


그녀가 '헤프다'라고 표현하는 나의 살림법은 그간 자주 지적의 대상이 되었다. 한 번은 입구가 널찍한 재활용 페트병에다 영희씨가 된장인지 고추장인지 무언가를 담아준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도 훨씬 더 지나 우리 집에 온 그녀는 뜬금없이 그 페트병을 찾았다. 다 먹고 버렸노라 했더니, 그런 통 구하기가 쉬운 줄 아느냐며 '헤프게' 버렸다고 일장연설을 들어야 했다.


그녀가 마시고 남은 500미리짜리 생수통을 내가 버릴라 치면, 나는 또 헤프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녀는 내 손에서 낚아챈 그 페트병을 물로 휘휘 대충 헹구었다. 그러고는 밖에 나갈 때면 거기에 마실 물을 담아 나갔다. 그렇게 우리 집에 머무르는 며칠간 그 물통은 살뜰히 쓰임을 다했다. 영희씨는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그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들고 갔다. 집에 텀블러며 물통이며 차고 넘치는데 왜 쓰던 일회용 페트병을 제대로 씻지도 않고 계속 쓰는 건지, 나로서는 물음표 투성이었어도 그게 그녀의 라이프스타일이라면 그런대로 이해해볼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유로 나를 헤프다고 낙인찍고 비난하는 건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회용 페트병을 오픈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세균이 빠르게 번식하는지, 기사를 보여드리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대신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여 찾아낸 링크를 애꿎은 남편에게 보냈다. 이것 봐, 내가 헤픈 게 아니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더위에 일회용 물통을 며칠 동안 두고두고 쓰진 않아. 저건 텀블러가 아니잖아.


아직도 나는 내가 정말 '헤픈'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그저 나를 비난할 거리를 찾느라 그런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겠다. 분명한 것은, 설사 누가 봐도 헤프게 살림을 산다고 한 들 그녀가 내게 그것을 지적하고 비난할 자격은 없다는 사실이다.

 



나를 이리도 지적하고 훈수두기 바쁜, 주방의 오야붕이자 자칭 타칭 주부 9단이라는 영희씨의 살림법은 어떨까. 몇 년간 지켜본 내 눈에는 별반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인다. 아니, 사실 그녀 말대로 '별나고 깔끔 떠는' 나에게는 경악스러울 때가 많다. 그녀의 공간에서 그녀가 살림해내는 법에 대해 말하자면, 나도 남의 집 살림에 쓸모없는 소리나 얹는 격일테니 논외로 치고. 적어도 내 공간에서 그녀가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좀처럼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잘 참았다. 아주 잘.

 

그녀는 김치통, 반찬통 겉에 뭍은 양념쯤은 가뿐히 무시하고 찬통을 냉장고로 직행시켰다. 냄새도 나고 냉장고가 더러워지는 것이 싫었던 나는 더러워진 용기들을 눈치껏 다시 닦고 슬며시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그럴라치면, 그새 영희씨는 나에게 한마디 하고는 했다.

그거 조금 묻었다고 다시 꺼내서 닦나, 피곤하다 피곤해.


냉장고가 더러워지는 것이 싫어, 찬통을 깨끗이 닦아 보관하는 것도 그녀에게는 피곤한 일로 치부되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녀가 민망할까봐 냉장고 문 뒤에 숨어서 눈치를 보며 양념을 닦았다. 그녀는 나에게 피곤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나, 정작 나에게 피곤했던 일은 내 냉장고의 청결을 위해 시어머니 몰래 찬통을 닦아야 하는 일 같은 것이었다.


결혼 초창기 영희씨 내외가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될 때면, 나와 남편은 반찬을 넉넉히 담아냈었다. 미처 다 먹지 못한 밑반찬들을 한 데 모아 버리려 하자 영희씨가 손사래 치며 나를 막아섰다.

이걸 왜 버려!

손댔으니 버리려고요.

아구 아까워라 원래 있던 통에 다시 넣으면 되지.

젓가락 다 닿았는데. 침...들어갔잖아요.

깔끔 떠네 깔끔 떨어.


여럿이 휘적거린 반찬을 새 반찬과 섞어 다시 넣는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보다 못한 남편이 거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남은 반찬을 조그만 찬통에 따로 넣고, 다음에 먹겠다는 말로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주로 이런 일들로 영희씨는 늘 내가 별나다거나 까탈스럽다는 말로 상황을 마무리 짓고는 했다. 반대로 내 입장에서는 영희씨가 대충, 그리고 지저분하게 살림하는 것일텐데. 그녀에 대한 나의 의견과 주장을 입 밖으로 모조리 뱉지 않듯이, 그녀도 나에게 그렇게 해주길 바라보지만 또, 또, 또 내 욕심일 뿐이다. 이미 그녀는 수년간 생각나는대로 말해왔으니, 그렇게 하도록 방조한 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을테지.


주방과 관련한 일련의 일들을 몇 년간 겪으면서 나는, 영희씨가 스스로 그 입을 멈출 리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자동처럼 재생되는 여러 지적들과 의문문으로 가장한 비난들에 일일이 답하기에도 지쳐버렸다. 나의 생활양식을 그녀에게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할 이유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불행히도 나는 그녀가 나에게 가하는 일상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용기도, 배짱도 전무했다. 그래도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다.  


나는 영희씨 내외를 우리 집에 초대하지 않기로 했다. 단 한 번도 인사치레로라도,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호호호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이때다 하고 당장 들이닥칠 분들이니까. 오고 싶어 하는 기색을 내비치시면 몇 번을 빙빙 둘러 거절하다 마지못해 수긍하는 정도로 내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모든 만남은 최대한 우리 집 밖에서 이뤄졌다.

알고 있다. 나는 영희씨 내외에게 시부모님 잘 '모시지' 않는 정 없는 며느리 정도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그렇다한들, 음식 불평에다 면전에서 까탈스럽고 별나다 소리를 들을 바에는 나쁜 며느리로 조용히 낙인찍히는 편이 백번 낫다. 그들에게 내 의중이 가 닿지는 않았겠지만, 나로서는 나름의 소심한 복수를 하고 있는 셈이다.


타인의 집에 초대받아 그의 살림에 사사건건 입을 열지 않는 것처럼, 남에게 차리는 예의는 가족끼리도 필요하다.

'가족이니까' 이런 말도 할 수 있지. '가족이니까' 편하게 해야지. 시어머니 영희씨가 종종 들먹이는 '가족이니까'는 예의의 영역을 벗어난 몰상식을 변호하는 데 쓰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말이지 않나. 우습게도 그녀의 말과는 달리, 나의 '진짜' 가족들은 나에게 그녀처럼 굴지 않는다.


며느리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영희씨의 합리성을 압도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감히 추측해본다. 주방의 청결이란 대명제에 대한 합리적 판단은 제쳐두고, 며느리의 살림법을 깔끔 떤다거나 별나다는 말로 평가절하하는 일. 며느리에 대한 부정적 감정에 그녀가 잠식당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구태여 내 살림살이에 대해 입을 열고 싶었다면, '깔끔한 편이다.'정도로 표현해도 되지 않았을까. 별나다, 깔끔 떤다, 유난 떤다는 말은 너 아주 못마땅해정도 되는 경고처럼 들린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유난 떠는 지인이, 별난 지인이, 피곤하게 살림하는 지인이, 깔끔 떠는 지인이, 깔끔 떠느라 헤프게 사는 지인이로 명명되었다.


남의 집 살림살이에 사사건건 입을 여는 자, 별나고 유난스러운 지인이네 집 문턱을 넘을 수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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