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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Jun 03. 2022

남편의 부모님을 위한 밥, 밥, 밥 차리기

언젠가 시아버지가 단체 카톡방에 메시지를 남기셨다.


'지인이가 끓여주는 된장국 먹고 싶다. 1년은 기다려야 먹을 수 있겠네.'


설명을 좀 보태자면, '1년은 기다려야'는 해외에 있는 우리가 귀국할 무렵을 말씀하신 것일 테다.


아! 뜬금없는 된장국 타령에 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 메시지를 받을 무렵, 코로나로 인한 봉쇄 덕에 나는 몇 달째 삼시세끼 밥 차려 내느라 진이 빠져있던 터였다. 그 사정을 모르지 않으면서 저런 메시지를 남긴 그가 원망스러웠다.


무슨 답을 기대하신 걸까. 물음표가 이어졌다. 된장국을 끓여드려야 할 의무를 왜 내가 져야 하는 걸까. 우리 엄마가 댁의 아드님께 '사위가 끓여주는 된장국 먹고 싶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결혼 전 남편과 나, 둘 다 요리를 비롯한 살림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나마 둘 모두 자취 경력이 꽤 되다 보니 기본적인 살림이야 어찌어찌해냈다. 그런데 요리의 경우는 심각했다. 결혼 전 내가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인스턴트나 샐러드, 시판 소스를 이용한 파스타뿐이었다. 반면 남편은 더 곤란한 요리실력이었는데, 그나마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조리법을 충실히 따르는 라면 그리고 고기구이 정도였다. 우리는 당연히 칼을 쓸 줄도 몰랐고, 과일이건 채소건 껍질을 깎아야 할 일이 생기면 채칼로 도려내는 수준의 실력을 뽐냈다.


집 밖으로 몇 걸음만 나서도 식당이 즐비했고, 일주일에 절반 정도를 밖에서 해결하다 보면 한 두 번 해 먹고 남은 재료들은 냉장고에서 썩기 일쑤였다. 그랬기에 우리는 굳이 밥을 해 먹을 이유가 없었다. 그 말인즉슨 요리 실력이 늘 틈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에 흥미를 붙이기에 세상은 너무 편리했고 우리는 너무 바빴다.


결혼 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매 끼니를 밖에서 해결할 수는 없었다. 혼수로 마련한 식기들, 주방용품들을 장식품으로만 둘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남편보다 퇴근이 빠르다는 이유로 신혼초에는 내가 주방에 서보기도 했다. 두 시간에 걸쳐 카레 하나를 해내는, 일견 대장정에 가까운 요리들을 시도했더랬다. 퇴근 후 날마다 새 메뉴로 거하게, 그리고 오-래-오-래 요리를 하던 나는 얼마 못가 백기를 들었고, 우리는 결국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이런 안타까운 요리 내력이 우리 둘에겐 그럭저럭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손님을 맞이해야 할 때는 별 문제가 되곤 했다. 초대하고 싶지 않지만 초대해야만 하는 손님. 배달 혹은 포장 음식으로 한 끼 간단히 먹고 헤어질 수 없는 손님.  


시어머니 영희씨 내외의 첫 방문 즈음에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밥! 밥! 밥!이었다. 왜 인간은 삼시세끼를 챙겨 먹어야 하는 걸까. 아침 한 끼 안 먹어도 별 탈 없던데. 그러나 그건 우리 사정이었고, 그간 봐온 시부모님의 식생활 양식은 삼시세끼, 그리고 한식 정도로 대표될 수 있었다.


내가 하도 머리를 싸매고 밥 걱정을 하자, 엄마가 밑반찬을 바리바리 택배로 보내주기도 했다. 시부모님의 방문 며칠 전부터 반찬을 공수하며 든든히 냉장고를 채워두었다. 적어도 이틀 밤은 묵고 가시기에 절대 반찬이 떨어져서는 안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찬이 떨어져 내가 요리를 해야 되는 상황이 오면 안됐다.


동네 반찬가게의 일주일치 식단표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무엇을 사야 영희씨가 머무르는 그 며칠을 잘 버틸 수 있을까 전략적으로 반찬가게를 공략했다. 며칠 두어도 상하지 않을, 반찬가게 출신임을 드러내지 않을 메뉴를 엄선하고, 주 요리와 밑반찬의 가짓수를 적절하게 배치하며 일련의 사기극을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그렇게 며칠간 아이템 모으듯 사모은 반찬들을 찬통에 고이 넣어두고, 반찬이 포장되어 있던 일회용 용기나 구매 영수증 같은 증거는 철저히 인멸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수고로웠다, 아주 많이.  


그러게 애초에 왜 거짓말을 하느냐 물어보신다면, '당신은 영희씨를 모르잖아요.'라고 해두고 싶다.

일단 영희씨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란 불가능했다. 게다가 내 형편없는 요리 실력으로는 더더욱이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장소를 불문하고 식사가 시작되면 영희씨의 품평은 자동처럼 재생되고는 했다.

짜다, 너무 익었네, 밥이 퍼졌네, 이건 내가 한 게 더 맛있네.

웬만한 맛집에 모시고 가도 젓가락을 휘적거리며 음식에 대한 평을 서슴지 않고 하시는 분이니, 내 음식들은 말해 뭐해. 시간과 정성, 노동을 불 보듯 뻔한 결과에 쏟아붓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반찬을 사서 먹는다는 진실을 말한들, 영희씨가 가만있지 않을 것도 분명했다. 그녀에게 요리란 마땅히 주부가 해야 할 의무였고, 그건 내가 회사를 다닌다거나 요리를 싫어한다거나 요리를 할 줄 모른다거나 하는 어떤 예외도 용납하지 않는 신성한 의무였다. 요리에 관해서는 아들이나 나나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영희씨는 나에게만 그 의무를 기대했다.


그녀에게 요리란 자고로 '뚝딱'하면 되는 것이었고, 그간 나에게도 '뚝딱'하면 되는데 왜 힘들어하느냐고 시시때때로 설파해왔다.


"퇴근하고 와서 밥 해 먹기 힘들어요, 손도 느리고 잘하지도 못하고요."

"감자 양파 애호박 숭덩숭덩 썰어 넣고 된장 풀어 넣으면 뚝딱 된장찌개 되는데. 찌개 하나 뚝딱해서 먹으면 되지." 늘 이런 식이었다.


그놈의 뚝딱.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주방에서의 나는 도깨비방망이의 뚝딱! 은 안되고, 뚝딱뚝딱거리는 어설픈 몸짓의 뚝딱만이 가능하다.


어쨌든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준비한, 내가(산 음식으로) 차린 밥상을 마주할 때면 으레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이건 친정 엄마 김치야? 우리 김치는 어딨어? 이 고등어는 맛이 좀 다른데, 어떻게 구운 거야? 이건 뭘로 무친 거야? 들기름은 어디서 났어?


취조가 이어질 때면 등 뒤로 진땀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그에 답하려면 반찬의 내력을 꿰고 있어야만 했다. 내가 만들지 않은 반찬들의 조리법까지 질문받을 때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런 영희씨를 몇 년간 겪고 나니 이제는 예상 질문과 답변을 넉넉히 생각해둔다.  


그녀와의 식사가 불편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식사를 끝낸다는 것이다. 남들이 한창 식사 중일 때도 개의치 않고 '난 다 먹었어.' 새침하게 한마디 하고는 젓가락을 탁- 내려놓는다.


차라리 밖에서 사 온 음식에 대해 안 좋은 평을 들으면 그렇게 속상하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내가 한 음식에 대해 그녀가 가차 없는 별점을 던질 때면 꽤 속이 상한다.


한 번은 파스타에 샐러드며 스테이크며 손수 요리한 것들로만 한 상 가득 차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접시마다 포크를 몇 번 들락거리고는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맛있으니 더 드셔 보시라는 아들의 말에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너넨 이게 맛있어? 난 맛있는지 모르겠어." 한마디를 남기고는 식사가 끝나는 내내 우리가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거친 말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그녀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내 요리에 대한 평가는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억지로 먹어주는 배려까지야 바라지 않지만, 어린아이처럼 '나 맛없어 못 먹겠소.' 팍팍 티 낼 것 까지야 없지 않나. 그녀의 음식에 대해 내가 불평하지 않듯, 그녀도 애써 요리한 나에 대해 그 정도의 예의는 지켜주길 바라보지만 아무래도 어려운 바람인가 보다.


어쨌든 그 이후로도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그녀는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하고서 이것저것 몇 번 집어 먹고는, 일찌감치 식사를 끝내는 일이 잦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영희씨의 시선을 고대로 느끼며 밥을 밀어 넣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니, 나는 더더욱 그녀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일이 불편해졌다. 아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싫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마땅히 호스트의 도리일진대, 손님의 무례함까지 감내하면서 그 수고를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영희씨가 음식에 깐깐하다고 해서 맛집이나 고급 식당만을 찾아다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녀는 외식을 즐기지 않는다.


우리 집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이면 영희씨는 안방 문을 열고 나에게 말한다.

"밥 안 먹어? 밥 안쳐야 되지 않아?"

네, 먹어야죠 밥. 브런치로 주말 한 끼 때워볼까 하는 나의 바람은 처참히 깨진다.


영희씨는 있는 반찬으로 간단히 먹지 뭐하러 굳이 나가서 돈을 쓰냐고 한다. 그녀는 세끼를 차리고 치우는 수고를 생각해주지 않는다.  번쯤 기꺼이 제안에 응해줄 것도 같은데, 그녀는 한번에 외식을 수락하는 법이 없다.   정도는 나가서 먹을 것을 제안하면, 영희씨의 거절은 한결같다.

"집에 먹을  많은데, 뭐하러 나가서 먹어. 차리기 귀찮으면 내가 뚝딱 차려줄게."


시어머니가  차리는데 귀찮다고 쉬고 있을 며느리는 존재할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는  같다. 아마  광경을 실제로 본 적이 없기에 저런 말을   있는  같기도 하고. 눈앞에서 그런 며느리의 모습을 맞닥뜨린다면 그녀가 자신의 말을 후회하게 될는지 모르겠다.


나가서 먹는 음식도 싫고, 집에서 먹는 것도 입맛에 안 맞는 영희씨. 나는 남편에게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어머님은 본인이 한 음식 말고는 다 별로라고 하실 분이야. 어떤 음식도 그녀를 만족시킬 수는 없어."



시아버지가 보낸 메시지에 답을 해야 했다.

'아버님, 그땐 아드님이 요리하는 걸로 해요.' 라며 진심을 담은 답장을 농담처럼 보냈다. 그 답장의 숨은 메시지는 '제가 여태껏 차려드렸으니, 이제는 아드님이 차려주는 밥을 드셔 보시는 게 어때요.'였다.


이어지는 시어머니 영희씨의 메시지

'아버님도 아들도 요리는 꽝이야~'

영희씨, 어쩌다 요리 못하는 아들로 키우셨나요. 잘 좀 키워서 장가보내지 그러셨어요. 못해도 자꾸 하다 보면 느는 법이라고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학습능력 출중하신 아드님도 하다 보면 늘 텐데요.  


내 심정을 담아 세 글자를 보냈다. '눈물이...'


그리고 이어지는 시아버지의 메시지 '왜! 눈물을?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니?'


슬픈 일, 암요 많죠.

낳아주고 키워준 아들은 한 번도 제 손으로 부모에게 한 끼 대접한 적 없고, 결혼했다는 이유로 제가 그 부모에게 밥 해다 바치는 일. 그리고 으레 그게 저의 의무인 마냥 당연하게 생각하시는 두 분. 호평에 인색한 어머님, 된장국 끓여달라는 아버님. 아들은 요리 못한다는 어머님, 뭐가 슬픈 일인지 모르는 아버님.


이런 게 슬퍼요.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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