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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May 27. 2022

새아기로 불렸던 그 해 설

세 번째 이야기

새아기로 불렸던 그 해 설- 첫 번째 이야기

새아기로 불렸던 그 해 설- 두 번째 이야기


알고 보니 그 동네는 집성촌 비슷한 곳이었고, 그중 남편네가 대장격이었다. 그래서 이 집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모양이었다. 남편에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얘, 이런 건 결혼 전에 얘기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이건 반칙이지. 아니, 사기 결혼 같은데.'


 많은 손님들은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다과상도 먹어치웠다. 상에 오를 음식 준비부터 나르고 치우고까지는 모두 개량한복을 맞춰 입은 시어머니 영희씨와 작은어머님들, 그리고 노랗고 빨간 새아기 한복을 입은 내가 해야 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무급 노예라고나 할까. 아니다. 몰락한 양반이 신분제 최하위에 놓인 정도의 처참함이 더 맞겠다. 내가 느낀 피로감이나 좌절감은 내 노동의 강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가치를 찾을 수 없는, 그리고 상당히 불공평하게 분배된 일을 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 일의 몫을 함께 져야 마땅해 보이는 이들은 결코 동참하지 않는 일.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사이에, 나는 연세가 있으신 분들께 세배를 하라는 명을 받기도 했다. 자신하건대 내 평생 해 온 절의 횟수보다 그날 했던 절의 횟수가 더 많을 것이다.      

큰 절, 작은 절. 초등학교 때 배운 게 다였던 데다, 새해에 대충 옆사람 따라 할머니께 절 한 기억밖에 없었다. 영희씨는 내게 누구한테는 손을 위로 올린 절을 해야 하고, 누구한테는 손을 엉덩이 옆으로 내린 절을 해야 한다며 알려줬다. 분명 한국말로 하셨는데도 내게 그것은 다른 세계의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저분이 누구시라고요?


누군지도 모르는 어른들에게 절을  때마다 영희씨는 옆에 서서 못마땅한 듯이 나를 쳐다봤다. 뭔가 단단히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치를 보며 겨우 절을 하고 나서는  절에 타박을 줄줄이 들어야 했다.  하나에  마디 꾸중이 세트인 것처럼, 절을  때마다 그녀의 모진 평가가 이어졌다.              


"아니, 저분께는 큰절을 했어야지."     

"손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     

"그게 아니다. 틀렸어."     

"어휴, 그런 것도 하나 몰라서 어쩌냐."               


실수가 반복되자 영희씨는 급기야 내가 절하는 도중에 짜증을 버럭 내기도 했다.     

"아까 알려줬잖아. 그게 아니지."      

엉거주춤 자신 없게 내려가던 몸이 굳었다. 절하다 말고 손의 방향을 바꿨다. 살다 보니 절을 못해서 혼나는 날이 오기도 하는구나.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아니 오래 살지 말아야 했나.               


 시간까지도 유독 꽉 닫힌 방문이 하나 있었다. 안방이었다. 안방에 모여 자던 남편의 사촌동생들은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모든 이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곳인 마냥 여겼고, 누구 하나 발을 들여놓을 생각 없어 보였다.     


손님들이 대충 떠나고 늦은 오전 무렵이 되자  방문이 열리고 하나 , 잠자는 안방의 사촌 공주님들이 차례로 나왔다. 왕자님  분도 섞여 있었다. 예닐곱쯤 되는 그들은 잠이   얼굴로 배고프니 밥을 달라고 칭얼댔다. 나와 고작 두세  터울밖에  되는 그들이 해가 중천에  때까지 퍼질러 자다 나온 모양을 보고 있자니, 억울했다.  대체 아무도 그들을 깨우지 않는 걸까. 그들의 조상님 드시라고 하는 제사고, 와르르 와서 먹고 마시고 떠난 사람들도 그들의 피붙이인데 말이다. 남의  여자들의 손을 빌어 조상님께, 집안 어른들께 공을 들이는  부조리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울컥했다.         


나도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느지막이 일어나 페에서 커피나 한잔 하면서 여유로운 연휴를 시작했을 테다. 결혼을  해가지고는  치욕을 당하고 있나. 커피는 무슨, 나는 또다시 밥과 찬들을 날랐다. 대체  거추장스러운 한복은 굳이  입으라는 건지. 일을 시킬 거면 옷이라도 편하게 입게  주던가.

아직 밥을  먹은 여자들, 그리고 단잠에서 깨어난 남편의 사촌동생들을 위한 늦은 아점 상을 차렸다. 남자들은 어디론가 세배를 하러 가야 한다며 .               


밥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꾸역꾸역 밀어 넣다 더는  먹겠어서 밥공기의 밥을  숟가락 남겼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영희씨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고만큼을 안 먹고 남겨? 싹싹 비워야지. 그래 놓으면 누가 먹어!"     

누가 먹긴요, 누구 먹으라고 남긴 건 아니고요. 못 먹겠으니 버려야 할 것 같은데요.


속으로 하고픈 말을 삼키며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먹을게요."               

먹성 좋은 내가 그날 아침 입맛이 없었던 것은, 아마도 하고픈 말들을 그동안 너무 많이 삼켜서였을 테다. 삼킨 말들로 부른 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어쨌든, 영희씨와 밥을 먹으면 잔반 없이 싹싹 비운 식판을 검사받던  시절로 돌아가는 추억 여행을  수도 있다. 옆에 있던 작은어머님  분이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머쓱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시어머니 이런  절대  보는 분이야. 먹기 싫어도 그냥 네하고 듣는  좋아."     

예, 안타깝게도 저도 이미 알고 있어요. 원래 그런 분이신걸. 나는 동의의 의미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긴 밥을 억지로 입에 쑤셔 넣다 시계를 보았다. 아,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가자 우리 집으로. 억지로 먹지 마라, 먹고픈 만큼만 먹으라 말해주는 엄마가 있는, 우리 집으로.




다행히 '시누이 오는  보고 가라.' 명절 괴담 같은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되었다. 영희씨는 우리가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고, 시누이를 보고 가면 좋았을 텐데 정도의 말은 꺼냈지만 별수 없었다.  시에 떠날지 눈치 보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싫었던 터라, 미리 기차표를 예약해두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도착으로부터 24시간 뒤로 예약된 '우리 집'가는 티켓. 우리는 첫 명절을 나름 공평하게 보내보겠다며 주어진 시간을 정확히 이등분했었다. 내 집 반, 너네 집 반. 그 시간의 양은 동일했을지라도 남편과 내가 겪은 시간의 결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명절을 겪으며 뼈저리게 느낀 점이 있다. 세월이 만들어   집안의 관습 혹은 문화 속에서,  아무리 공평함이나 정의 따위를 들먹여도 그것은 그저 벽에다 대고 부르짖는 외침이  것이라는 것을. 그것도 아주 견고한 아성의  말이다.


우리는 무식하리만치 공평하게 남겨놓은 나머지 24시간을 보내기 위해 떠날 채비를 했다.

한복을 갈아입으러 들어가자 영희씨가 말했다.

"첫 명절인데 한복 입고 친정에 가야지. 그대로 입고 가라."

저희 집은 그런   따져요. 아무도 제게 한복 입고 오라고 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누가 봐도 새색시 한복에다, 꽃신을 신고서 핸드백을 든 새아기가 기차역에서 시부모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드디어 끝이었다. 플랫폼으로 나서며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내 서러움에 눈물이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흘깃거렸다. 그들은 으레 명절 때문에 속상했겠거니 했을 테다. 행인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않고 눈물이 미어터졌다.


기차에 타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혹여 소리가 새어 나올까 입을 꽉 다문 채 흐느끼며 울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며 달래던 남편은 시간이 지나자 나를 본 채 만 채 했다. 얼른 기차가 서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는 한숨도 푹푹 내쉬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인마, 네가 왜 한숨을 쉬니.


기차가 추고 겨우 눈물을 닦으며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역을 나서니  멀리 주차장에 엄마가 타고 있을 차가 보였다. 엄마를  것도 아니고, 차만 봤을 뿐인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뒷자리 문을 벌컥 열었다.


"왔어? 오느라 힘들었지?"


운전석에서 엄마가 활짝 웃으며 돌아다보았다. 여러모로  꼴은 엄마의 예상과 한참 빗나가 있었다. 한복을 입고  것도 놀라웠을 텐데, 얼굴처럼 기분처럼  쳐진 한복 치마에다 눈은 퉁퉁 부어 얼굴 곳곳눈물 자욱이었으니.


"어머, 지인이 왜 이래?"

엄마의 물음에 나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서러워서 진짜..."

자꾸만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장모님, 그게... 저희 집에서 좀 힘들었나 봐요. 출발하고부터 지금까지 계속 울면서 왔어요."


"아유, 그랬구나. 쟤 워낙 그런 거 싫어하는 성격이라 잘 있으려나 싶었는데. 역시나 힘들었나 보네. 일단 가자."

 

엄마는 웃기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한 무엇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신호에 걸릴 때마다 나를 돌아다보았다.


"이제 끝났으니 그만 울어. 집에 곧 도착해. 아빠 앞에서도 울 거야?"

"뭐가 끝나! 명절이 이걸로 평생 끝이야? 끝내고 싶으면 이혼해야 끝나지!" 나는 우는 와중에도 따박따박 말대답을 잊지 않았다.


엄마는 타깃을 바꿔 죄지은 마냥 옆에 앉아 있던 남편에게 다정히 말했다.

"지금 아주 가시 방석이지? 지인이 때문에 자네가 고생이 많았네."


"아니 엄마! 내가 고생했어, 쟤가 한 거라고는 자기 친척들이랑  마시고 먹고 마시고 놀고밖에 없어. 고생한  나라고."


마침  안에는 휴지가 없었다.  떨어진 휴지를 찾으며, 눈물을 훔치던 나에게 엄마는 임시방편으로 생리대 하나를 건네주었다.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생리대 하나로, 나의 쏟아지는 눈물, 콧물을 닦아내고 있자니 그야말로 시트콤이 따로 없었다. 한복 차림에 꽃신을 신고 엉엉 울다가, 생리대를 야무지게 펴서 눈물도 닦고 콧물도 닦는 새아기의 모습이란.  기이한 광경에 엄마도 남편도 그리고 나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런데 지인아, 한복 입으면서 속치마를 안 입으면 어떡해. 치마가 이렇게 보기 싫게 늘어져있는데, 아무도 안 알려줬어?"

엄마는 내가 우는 것보다도 내 한복 치마가 이렇게 보기 싫게 쳐져있는데도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은 게 속상한 눈치였다. 여자 어른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저 꼴로 하루 종일 다니게 내버려 둔 게 원망스러웠나 보다. 나는 또 서러워졌다.


집에 도착해 들어갈 땐 눈물은 그렁그렁했지만, 다행히 울음은 멈춰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내가 우는 걸 못 견뎌한 아빠가 뭐라고 할지 눈에 선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아빠를 보자마자 역시나 예정된 수순처럼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오자마자 왜 울어? 무슨 일이야?"

아빠는 놀란 눈이 되어 나를 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말이야. 우리 집에도  오고, 남의 집에서 말이야... 울음... 그리고  울음... 엄마 아빠가 이러려고  열심히 키운  아니잖아? 울음... 남의  가서 주방  하고 남의 제사 지내라고  키워서 결혼시킨  아니잖아. 울음... 이어지는 울음들... 요리 못한다고 구박이나 듣고... 나나 쟤나 공부만 하고 회사에서 일만 했지, 요리할 줄을 아냐는 말이야... 내가 무슨 가정부야? 아들 귀하면 나도 귀하지. 나도 우리 집 귀한 딸인데  나만 시켜!  쟤네  일을 쟤는  시키는 거야... 서럽고 억울해 죽겠어. 이어 목놓아 우는 소리.


몇 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느낀 감정의 농도를 오롯이 느껴낼 수는 없나 보다. 경험을 활자로 옮기는 지금도, 내가 그토록 끊임없이 울었다는 것이 놀랍다. 울 수야 있지, 그런데 지인이 얘 좀 과한데?


그날이 내 짧은 인생 중 가장 오래, 가장 많이 목 놓아 운 날이 아니었나 싶다. 기차를 타고 도시와 도시를 가로지르며 우리 집에 이르러서도 내 울음은 그렇게 쉽게 그칠 줄을 몰랐다.


사실 내 울음과 함께 터져 나온 말들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았다. 우리 집이 아니고, '쟤네'집에서 해야 했던 말들, 그 집에 있던 사람들에게 쏟아내야 했던 말들이었다. 청자를 잘못 찾은 내 말들은 갈 길을 잃고 허공에 떠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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