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지인 Apr 24. 2023

제 자식은 제가 알아서 키울게요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방영한 에피소드였다. 한 남자 가수가 추운 겨울날 재래시장을 거닐었다. 아기띠에 동동 아들을 매달고서. 그 아기가 양말만 신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시장통 여기저기에서는 아이고 아기 발 시리겠다, 신발을 신겨야지, 신발 신발 또 신발, 아기 신발을 향한 중년 여성들의 아우성이 이어졌다. 성화에 못 이긴 아기 아빠가 신발을 사서 아기의 발에 안착시키자 그 잔소리의 대장정은 끝이 났다.


K할머니는 참지 않지. 밈으로 온라인 세상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그 짧은 편집본을 보는 동안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내가 겪어왔던 어떤 장면들과 오버랩되었기 때문일테다. 아기를 데리고 다니다보면 낯선 이들로부터의 참견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아기 춥겠다, 덥겠다인데 내 경험을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아기 엄마 혹은 보호자 입장에서 꽤 달가운 소리는 아니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아닌 것을 여러 번 들으면 힘이 든다. '정'이라고 포장해보기엔 청자가 싫다고 하니, 싫은 일이다. 물론 아기 하나 이상(일곱 여덟도 거뜬히!) 키워낸 선배 할머니들의 짬을 무시해선 안된다.


그래도 '요즘 아기 엄마들'로 통칭되는 이들의 입장에서 샐쭉하니 토로해보자면, 아니, 내 아기가 춥고 더운 것을 제일 신경 쓰고 챙기는 사람은 부모인 나인데 왜 남의 집 자식 차림새까지 신경들을 쓰시나요 하고 싶다. 여기는 신성한 동방예의지국이니 웃어른에게 그런 말은 삼키고 예의 멋쩍은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곤 했던 적이 여러 번이다.



가족(이라고 쓰고 영희씨라고 읽는)에게서 듣는 아기의 춥고 더움에 관한 우려 섞인 말들은 더 가까이서, 더 잦은 빈도로 들려오는 것이라 더 더 더 고역이다.


아들 추피의 아기시절, 추피와 만날 때면 시어머니 영희씨는 모자, 양말, 손싸개 등 각종 방한용품을 꼼꼼히도 입히고 신겼다. 조금이라도 서늘하다 싶은 날 그녀를 만날 때면 나는 반사적으로 추피를 동동 동여매기 바빴다. 아기를 춥게 입혔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추피는 절대 추워서는 안됐다. 또한 추피는 절대 더워서도 안됐는데, 그래서인지 영희씨는 기저귀를 24시간 차고 있는 추피가 무척 더울테니 기저귀를 풀어헤쳐 두라며 훈수를 두기도 했다. 어쨌든 추피의 아기 시절, 나는 영희씨와 만날 때면 안부인사처럼 우리 추피 춥겠네, 덥겠네를 들어야 했다.


영희씨는 우리 집 어린이 추피의 체온뿐만 아니라 전방위적인 간섭을 몸소 실천해 오신 분이다. 춥고 더움에 관한 지도편달정도는 그래, 내가 미숙한 엄마인 것이겠지라고 생각해보며 어떻게든 타협해 볼 수 있었다. 내가 맞닥뜨린 진짜 문제는 영희씨가 손주 추피의 외적인 부분에 대한 지적을 상시적으로다가 내뱉는다는 것이었다. 상-시.



머리카락은 길-게 더 길-게


추피가 돌이 지나고부터 우리는 줄곧 그의 머리카락을 ‘스포츠’ 스타일로 통칭되는 정도로 짧게 유지해왔다. 추피는 땀이 많았던 탓에 툭하면 머리에서 꼬순 쉰내가 나곤 했는데 때때로 그 냄새가 꽤 지독하기도 했다. 그래서 머리가 짧으면 관리가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가 그 머리스타일을 고집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그를 키우는 우리의 취향이었다. 짧은 머리일 때의 추피가 우리 눈엔 더 보기 좋았다는 단순한 이유. 그뿐이었다.


그러나 영희씨는 손주의 머리 길이가 좀체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돌이 지나고 첫 이발을 시킨 날부터 그녀는 불만을 제기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추피의 머리 길이가 짧아진 날이면 그녀의 불만 섞인 말들을 들어야만 했다.


머리를 좀 기르지, 또 빡빡 깎였니. 왜 자꾸 짧게 자르는거야? 이번에도 또 저리 짧게 잘렸구나. 앞머리는 왜 저리 깎였니.


그녀의 ‘왜’는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힐난의 ‘왜’였다. 나의 귀한 손주를 왜!

항변하노라면, 사실 그녀의 말처럼 '빡빡이'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그 해, 우리가 살던 곳은 락다운이 꽤 자주, 오래 지속된 탓에 한동안 미용실을 갈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자연스레 추피의 머리 깎는 주기가 길어지곤 했다. 그럴 때면 페이스톡 화면 너머로 영희씨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저것 봐라, 머리가 기니까 훨씬 나은데. 인물 나네! 저렇게 좀 길러줘, 자꾸 자르지 말고.


그녀에게는 우리가 맞닥뜨린 락다운이고 뭐고, 것보다 당장 추피의 길고 긴 머리칼이 중요한 이슈였다. 추피가 말귀를 알아듣고 의사표현이 분명해지면서부터는 추피의 외모에 대한 지적을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듣게 되는 상황이 더욱 껄끄러워졌다. 며느리로서가 아니라, 엄마로서 내 자녀가 그런 평가의 말을 듣는 것이 껄끄러웠다. 머리가 길든 짧든, 우리는 추피의 외모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 부모였고 어린 추피에게 편견을 심어주고 싶지도 않았다. 각설하고, 머리가 짧아서 별로네 마네 소리를 자녀가 직접 듣는 것을 달가워할 부모가 있으려나.


알아서 할게요, 저희는 짧은 게 깔끔하고 예뻐 보여서요. 어수룩하게 우리의 취향을 수없이 내뱉어보았지만 영희씨의 귀에는 닿지 못한 듯하다. 그놈의 머리칼에 대한 참견과 불만 섞인 잔소리가 그 후로도 꽤 오랜 기간, 불과 작년까지도 잦아들지 않은 것을 보면.



옷과 신발은 빨갛고 노랗고 쨍하게, '아기처럼' 입히고 신기기. 그리고 쫄바지는 금지!


영희씨는 머리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복장에도 불만이 가득했다. 손주의 바지가, 신발이, 그냥 쉽게 말해 엄마인 내가 입혀놓은 옷 스타일 모두가. 그녀는 추피의 몸에 걸쳐진 마음에 안드는 그 무엇이 보일 때마다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지인이는 꼭 저런 스타일로 애 옷을 입히더라?


비교육적이거나 저속한 옷, 아이의 성장발달을 저해하는 옷을 입히고서 저 말을 들은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무채색 면바지에 남색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혔을 뿐이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어른 스타일로 통칭하고는 했는데 어쨌든 손주가 그런 '어른 스타일'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꽤 못마땅한 일이었다. 만날 때마다 한 번은 짚고 넘어갔던 의복에 대한 지적은 옳고 그름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취향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영희씨는 외손주에게 미키마우스가 잔뜩 그려진 알록달록한 옷을 왕창 사다 주곤 했다. 그 브랜드에서 나오는 옷들이 비싸고 예쁜 옷이며 자신은 꼭 그 브랜드 옷만 외손주에게 선물해 준다고 자랑하곤 했다. 거기 옷들을 입혀놓으면 애들이 참 예쁘다며. 내게는 그것이 꽤나 촌스럽게 느껴졌던 것을 보면, 그녀와 나는 애초에 미적 취향이 잘 맞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런 우리가 각자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얼마나 달랐을까. 같은 것을 보고도 이렇게 판단이 다른데. 나는 나의 취향을 입밖에 내지 않았지만, 그녀는 취향에 거스르는 추피의 옷차림이 눈에 보일 때마다 입 밖으로 꺼내놓기 바빴다.


그녀의 강력한 불호는 한 가지 더 있었는데,  추피가 아기 때 많이 입던 쫄바지였다.

 

지인이는 꼭 저런 쫄바지를 자주 입히더라. 바지 없어? 왜 바지를 안입히고 자꾸 쫄바지를 입혀.


왜 저렇게 입혔어라는 비아냥 섞인 '왜'를 듣고 있자면, 어떤 대답을 해드려야 하는 것인지 빠르게 두뇌를 가동해 보지만 제 눈에 예뻐서 입혔는데요 라는 떨떠름한 답변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당장 누군가로부터 ‘왜 이렇게 입으셨나요’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저런 무례한 질문을 영희씨로부터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영희씨는 추피에게 옷을 사주고 싶을 때면 돈을 주시곤 했다. 지인이 취향 맞춰 옷 못사겠으니 알아서 사입히라는 말은 덤이다. 그런 말을 듣고 있노라면 꼭 내 취향에 큰 문제라도 있는 것 같다. 그저 너희 원하는 것, 예쁜 것 사입히라고 해주시면 안되는 걸까. 날이 잔뜩 선 말과 함께 받는 돈이라면 억만금이라 해도 노땡큐다.


취향의 차이일 뿐인 것을, 꼭 집어 비꼬고야 마는 영희씨의 의중은 무엇일까. 손주의 육아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것일까, 아님 며느리에 대한 반발감일까. 가끔 만나는 할머니 취향까지 고려해드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손수 키워줄 것 아니라면, 아무리 할머니일지언정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다.

나도 영희씨로부터 취향 존중, 취.존 받고 싶다.



영희씨 딸의 두 아들은 늘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있는데, 그들의 머리스타일에 굳이 내 선호를 따져보자면 '극불호'라고 할 수 있겠다. 길고 축 쳐진 머리에다 눈 바로 위에서 자로 댄 듯 일자로 잘라 놓은 그 머리는 내 눈에는 바가지를 엎어 놓은 듯 답답해 보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취향의 문제고, 아이를 키우는 형님의 선택 혹은 아이들의 선택일테니 내가 입에 올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영희씨로부터 추피의 머리칼에 대해 한 마디씩 듣는 날이면 어김없이 남편에게 외치곤 했다.


어머님은 외손주 머리칼이나 신경 쓰셨으면 좋겠어. 누구는 말할 줄 몰라서 안해? 나도 덥수룩한 걔네 머리 볼 때면 마음까지 갑갑해져 아주. 그렇지만 입밖에 내지 않잖아?


나는 '취존'하니까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한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을 때 마구 내뱉지 않을 때 어른이 된다고 믿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영희씨는 아직 '응애'다.  

작가의 이전글 그런대로 안온한 날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