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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Nov 03. 2023

시어머니 때문에 정신과에 갔는데요

https://brunch.co.kr/@local/65


시어머니 영희씨가 던진 돌은 그날 이후 내 일상을 참담하게 만들었다. 작다면 작을 일, 그 돌 몇 무더기에 내 인생이 힘껏 조져지는 듯 처참함을 느끼는 날들이었다.


내 상황에 대한 답을 내어줄까 싶어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펼쳐 들기도 했다. 펼쳐든 종잇장에서 맞닥뜨린 구절들에 이마를 탁 짚으며 깨달음을 얻는 날들이 이어졌다. 물론 그때뿐이긴 했지만.


“추한 것과 싸우지 않는다."는 경구에 내적 환호를 내지르며 니체 만세 외치기도 했다. 단 한 번의 소중한 지인이 인생을 추한 것과 싸우느라 소비할 수는 없었다. 역시 니체정도 되는 현자의 가르침은 동서고금 어느 상황에나 범용적이다.


나는 추한 것과 싸우지 않으리라. 나는 영희씨때문에 고통받지 않으리라. 결의를 다지듯 손가락을 우두둑 거리며 소리를 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때뿐이었다.



책과 책 사이를, 온라인 세계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내 복잡한 심경에 현답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안녕하지 못한 며칠을 보내는 동안 불쑥불쑥 아니 나한테 대체 왜, 하는 억하심정 같은 것들이 욱-하고 올라왔다. 이거 안 되겠다 싶어진 것은 직장에서고 길에서고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차오르는 눈물 때문이었다. 갑자기 미친 듯 두근 거리는 가슴이라든가 띵 하고 탁해지는 머릿속, 갑갑함 그런 것들은 눈물에 따라오는 덤이었다.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문자 T였다. 자 지인아,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해결책을 찾자!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해결은 전문가로부터 나올 것이었다. 나는 전문가, 그리고 그의 전문성, 지력 같은 것들을 사랑한다. 나는 지역 맘카페의 추천 댓글과 네이버 평점을 뒤져가며 두세 곳의 정신의학과를 추려보았다. 그리고 전화를 돌려보았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진료를 받지 않으면 눈물에 잠식당할 것 같은데, 내 전화를 받는 이들은 모두 태연하다. 그들은 빨라야 2주 뒤나 예약이 가능하다고 나긋나긋 답했다. 아, 정신과라는 곳은 이토록 예약이 힘든 곳이구나,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를 맞닥뜨리고 겸허해진다. 정신과의 전화 상담을 맡은 이들은 하나같이 친절하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여자 의사가 앉아있었다. 그 짧은 찰나에도 나는 생각했다. 내가 저런 전문직이었다면 영희씨는 나를 더 귀하게 여겼을까, 적어도 막말은 안 했으려나. 이쯤 되니 추한 것과 싸우지 않겠다는 내 결의는 온 데 간 데 없고, 내 모든 촉수는 영희씨와 나를 잇는다.


나는 어쩐지 의사를 '의사 선생님'이라 칭하는 게 낯간지럽다. 의사와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자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정신과는 처음이신가요?


그녀는 내게 무슨 일로 오게 되었는 지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최근에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그 이후로 제가 생활에 좀 어려움이 있어서요 하며 두루뭉술하게 입을 떼 보았다. 그러자 의사는 내게 '어떤 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구구절절한 남 이야기 듣는 것을 질색하는 나로서는 내 말이 그녀에게 영양가 없는 잡담처럼 들릴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해야 하나요, 난처해하며 묻는 내게, 그래야 제가 진단을 할 수가 있으니까요 답이 온다.


몇 주 전에 시어머니께서 저에게 소리를 지르시고, 해서는 안될 말들을 하셨는데요, 그게 말이죠.


입을 떼자 무슨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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