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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Nov 16. 2023

며느리에게 사위 뒷담화하기

언뜻 들어서 단박에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는, 며느리에게 사위 뒷담화라니. 시어머니 영희씨는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빼어난 시어머니였다.


‘사위에게 불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불만을 부부끼리 말할 수 있다. 친구에게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에게 말할 수는 없다. 그 불만을 사위에게 직접 말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이 정도는 나라는 인간이 가진 상식이었다. 그러나 영희씨와 나, 둘의 상식의 세계에는 교집합이라곤 없었다.


영희씨가 사위에게 못마땅해하는 것은 주로 두세 개쯤 되었는데, 그중 가장 잦은 빈도로 입에 올리는 것은 사위의 외모였다. 그녀는 밥을 먹다 말고 김서방은 '뚱뚱하니' 그만 먹으라 말한다거나, 요즘 들어 살이 더 쪘다, 다이어트 안 하느냐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키가 작아서 더이상 살찌면 안 된다는 말도. 한 상에서 밥 먹는 입장에서 당장이라도 체할 것 같은 말들이었지만, 성격 좋은 세일즈맨이었던 김서방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넉살 좋게 밥을 삼켰다. 웃어넘기는 그야 장모에게 반기를 들기 껄끄러운 '외부인'이니 그렇다 치고 '내부인'인 그의 와이프, 내 시누이도 자신의 엄마 영희씨를 말리지 않았다. 듣는 이가 내는 멋쩍은 웃음소리 빼고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아니었건만, 그녀의 뚫린 입에서 나온 말들은 밥상 위에서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흘러 다녔다.  


영희씨는 두 외손주의 작은 키도 사위의 탓으로 돌렸다. 아빠가 작으니 애들이 저렇게 작다는 그 말의 시비를 따져본다면 분명한 사실일진대,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들도 있는 법이다. 영희씨는 그 말을 사위와 딸은 물론이고 손주들을 앞에 두고 염불처럼 외워댔다. 마침 그리 먹성 좋은 편이 아니었던 두 아이들이 밥을 깨작거릴 때마다 그녀는 조건반사처럼 '김서방 때문에'했다.


키뿐만이 아니었다. 특히 첫째 손주를 두고는 어렸을 땐 '여자애처럼' 예뻤으나 갈수록 지 아빠를 닮아 '못나진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아들이 그 아빠를 닮는 것이 영희씨에게는 마치 몹쓸 저주라도 되는 듯이. 영희씨는 누구에게든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즉시 내뱉는 데 발군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 상대가 사위든 손주든 며느리든.



접대가 많고 퇴근이 늦을 때가 잦은 사위의 직업도 그녀에게는 불만이었다. 때때로 직업에 대한 불만은 육아에 덜 참여했던 과거의 그의 죄를 들추어낼 때 유용한 조미료가 되기도 했다. 모순되게도 동시에 그녀는 내 직업의 적은 보수를 은근히 깎아내리며 김서방과 자신의 딸이 얼마나 많은 수입을 일궈내고 있는지를 자랑스레 뽐내었다.


그중에서도 정말 못 들어주겠군, 혀를 내둘렀던 것은 저쪽 사돈에 대해 내게 뒷소리 할 때였다. 딸과 사위 내외가 집으로 떠나면, 손주들의 행동에 대해 쓴소리 하고는 원인을 사위의 어머니, 안사돈 탓으로 돌리는 식이었다. 그 사위의 어머니, 말하자면 사돈의 육아방식 때문에 아이들이 경우 없고 저리 부산스럽게 자랐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오냐오냐' 키운 죄였다. 영희씨의 딸은 직장에 다녔고, 그의 시어머니가 아이들 케어며 집안일이며를 온종일 도맡고 있었다. 언뜻 듣기에도 남자 초등학생 둘을 상대해내는 그 노동이 무척이나 고단해 보였는데 영희씨는 이제 아이들의 '못남'을 그 사돈 탓을 하고 있었다. 정작 영희씨는 딸과 가까이 살면서 외손주들을 그리 적극적으로 돌봐주지 않았다는 맹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듣다 못한 내가 얼굴도 모르는 사돈을 대변해보기도 했다. 어르신 덕에 형님과 아주버님이 직장 생활에 무리가 없는 것이고 아이들에게도 좋을 것이며 남아 둘을 늦은 시간까지 돌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임을.

그랬더니 영희씨는 "걔네가 그래서 돈 주잖아." 야멸차게 내 말문을 틀어막았다. 돈, 그 몇 푼 받으면 힘들어도 되고 당신으로부터 이토록 비난받아도 되는 것인지.


이런저런 그녀의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어찌 이리 때마다 풍성하고 저급한 언어를 창조해 낼 수 있는지 경외로움이 느껴졌다. 마르지 않는 화수분 같은 그녀의 입. 이토록 생각의 회로가 겹치지 않는 인간을 앞에 두고 있자니, 그동안 내가 살며 겪은 인간상의 분포표가 얼마나 편향된 것이었는지 반성하며 감탄하게 되는 것이었다. 인간상은 사람 수만큼 다양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렇게 입만 쩍 벌리고 있을 것이 아니었다. 내 모든 정신력을 동원해 며느리의 삶을 비상체제로 전환했어야 했다. 이것이 결코 사위의 험담에서 그치지 않을 것임을, 그리하다 결국 머지않은 미래에 그녀는 근질대는 뚫린 입으로 며느리라는 새 먹잇감을 쪼아댈 것임을. 자기 앞에 드리운 컴컴한 그림자는 못 보고, 그저 그녀의 사람 됨됨이에 낙제점을 매겼던 몇 년 전의 나는 너무도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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