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 일인용 5
요즘은 누가 마흔이라고 하면 그렇게 반갑다. 같은 나이의 사람이 39년이나 있었는데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다. 아마도 내 안의 마음들이 나이와는 무관하거나 혹은 나이를 원인의 범주에 넣지 않아서일 거다.
지난해, 마흔을 앞둔 조세호의 불안을 유재석이 개그의 소재로 가져다 쓸 때 나는 종종 서글펐다. 마흔을 기다리는 장기하도 있었지만, 마흔이 되기 싫어 평생 서른아홉이고 싶다는 게스트의 말도 마음에
많이 남았다. 오늘은 서른하나에 시작해 마흔에 다시 연극 <인디아 블로그> 무대에 선 김다흰의 코로나 19로 좌절된 서른아홉 세계일주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다 아쉬워졌다.
세상의 모든 서른아홉과 마흔의 이야기가 내 것처럼 들렸다. 대체 마흔이 무엇이길래 이다지도 숫자에 얽매여있단 말인가. ‘헤매지 않는다’라는 뜻의 ‘불혹’이라는 단어가 단단한 족쇄가 된 게 분명했다. 이렇게 사시나무 떨 듯 흔들리는, 전진보다는 멈춤이 익숙한 상태가 어떻게 헤매지 않는다는 말인가. 마흔의 모두가 반가운 것은 아마도 경계에서 위태로운 나를 잡아주는 게 나와 같은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일 거다. 다른 마흔은 나와 다를까? 혹은 같을까? 마흔의 조각들을 모으면 어떤 그림이 될까.
망원동 일인용
오늘의 마흔. 혼자서도 잘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