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70. 범죄 피해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라
공익허브는 매주 월요일 ‘미션 100’을 연재합니다. 한국사회에 필요한 제도적 변화 100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 퀴즈를 내보겠습니다. 범죄 사건에서 피해자는 사건의 당사자가 맞을까요, 아닐까요? 대대수 독자님들이 “당사자가 맞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놀랍게도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범죄 피해자는 실질적으론 사건의 당사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제3자로 취급 받습니다.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에선 검사와 피고인을 형사 재판의 직접적인 당사자로 보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까닭에 범죄 피해자는 형사 절차에서 ‘참고인’ 혹은 ‘증인’이라는 이름으로 제3자로서의 지위만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지난해 11월 경남 진주시에서 일어났던 ‘편의점 폭행 사건’ 기억하시나요? 당시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모르는 남성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했던 피해자 A씨는 지금도 법정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항소심 첫 공판을 앞두고 A씨는 예상치 못한 벽을 마주했습니다. 지금까지 재판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공판기록서, 가해자 반성문, 최후의견진술서 등의 열람•등사를 신청했는데 법원이 그중 일부만 허용한 겁니다.
재판부(창원지법 제1형사부)는 공판기록서를 포함한 일부 기록물의 열람은 허가했습니다. 그런데 반성문이나 최후의견진술서처럼 가해자가 직접 작성한 서류는 열람을 불허했어요.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형사소송법」 제39조에 따라 재판부는 불허 사유를 명시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더구나 피해자는 한 번 내려진 판단에 불복할 수도 없습니다. 피해자로선 구체적인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꼼짝 없이 재판부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죠.
그동안 법원은 범죄 피해자들의 재판 기록 열람을 두고 보수적 판단을 내려왔습니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존중한다는 명분에서입니다. 형사 재판에서 피해자는 사건의 증인 역할도 겸하기 때문에, 기록을 살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증언을 취사 선택하거나 변형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법조계 내부에서는 법원의 허들이 지나치게 높다고 지적합니다. 재판 기록을 보지 못하면 피해자들은 신고한 내용이 공소사실에 제대로 반영됐는지, 가해자가 어떤 범죄 사실로 어떻게 기소가 됐는지 확인할 수 없어요. 의견서나 가해자 진술을 확보하려고 해도 이마저 법원이 열람을 불허하면 수포로 돌아가고요. 범죄 피해자 입장에선 가해자측 방어 논리에 대응할 기회를 잃게 되는 셈입니다.
재판 기록을 확인하기 위해 범죄 피해자들이 취할 수 있는 또다른 방법으론 문서송부촉탁 신청과 민사소송이 있어요. 그런데 두 가지 모두 실효성이 떨어집니다. 문서송부촉탁의 경우 검찰에서 계류•진행 중인 사건 자료는 거의 보내주지 않고, 보내주더라도 일부 내용만 있거나 전달 시기가 늦을 때가 많다고 해요.
그렇다고 가해자를 상대로 “자료를 제공하라”며 민사소송을 걸기엔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공개해야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소장에 소송당사자의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을 기재해야 하는데 해당 정보가 소송 대상인 가해자에게 전해질 수 있어요. 이 경우 범죄 피해자는 가해자의 보복범죄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선뜻 민사소송을 제기하기가 쉽지 않죠.
범죄 피해자들이 재판 과정에서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알 권리를 충분히 보장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피해자를 실질적인 소송 당사자로 보고, 재판 기록 열람•등사의 허가 폭을 넓혀야 하고요.
아쉽게도 우리 법정의 변화는 더딥니다. 지난해 2월 ▲‘중대 강력범죄’와 ‘취약 계층 대상 범죄’ 피해자에 관한 재판기록 열람•등사 원칙적 허가 ▲법원의 결정 이유 의무적 명시 ▲피해자는 불허 결정에 즉시항고•재항고가 가능하다는 내용을 담은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됐습니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계류하다 21대 국회에서 폐기되고 말았죠.
국회 논의가 정체된 사이 가해자들은 ‘피고인의 권리’로 수사자료는 물론 엄벌 탄원서까지 열람한 다음 수십장의 반성문을 써서 제출하고 있습니다. 가해자 쪽으로 기울어진 법의 균형추, 이제 다시 조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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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프레시안. 24-06.03. [ ‘돌려차기’•‘편의점 폭행’ 피해자들의 울분 “가해자 반성문 왜 못 보나”].
아시아투데이. 24-06.04. [피해자는 못 읽는 가해자 반성문…“소송 당사자로 보고 기록 오픈해야”].
한겨레. 24-06-27. [“피해자는 가해자 반성문 못 봅니다”…법원 향한 분투가 시작됐다].
국회입법조사처. 2023. [범죄피해자 공판기록 열람•등사제도 개선 방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