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한 파티와 어두운 뒷골목,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타겟을 완벽하게 살해하는 싸이코패스 킬러 빌라넬. 그는 전세계를 오가며 임무를 수행한다. 화려한 옷, 냉장고를 가득 채운 술, 무엇보다 사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 평범한 것들은 빌라넬의 흥미를 자극하지 않는다. 이러한 빌라넬의 흥미를 끈 것은 이브 폴라스트리. 빌라넬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암살 장소에 찾아와 수사하는 이브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여태 자신을 알아봐준 사람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범죄자로 빌라넬을 바라보기보다 그를 향해 순수한 호기심을 품는 이브에게서 색다름을 느낀 것일까? 빌라넬과의 대화를 원하며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이브의 모습에 당황하고, 찰나의 두려움을 비치는 듯하던 빌라넬의 얼굴에는 금세 장난기가 가득해진다. 어느새 빌라넬은 이브의 관심을 끌기 위해 더 자극적이고 대담한 범행을 일삼게 된다. 들킬 만한 짓은 하지 말라는 상사의 말을 뒤로하고 이브를 보기 위해 범행 현장에 다시 찾아가기도 한다. 이제 그는 이브가 자신의 흔적을 찾아와 줄 것을 믿고 있다. 그러다 결국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이브의 동료를 살해하기까지 한다. 이미 빌라넬에게 이브가 가지는 의미는 흥미와 궁금증 그 이상이었다.
난 너랑 저녁을 먹고 싶을 뿐이야!
계속해서 이브의 주위를 맴돌고, 때로 이브와의 섹스를 상상하던 빌라넬은 결국 이브의 집에 찾아가 파격적인 저녁식사 제안을 한다. 놀라서 도망치는 이브를 붙잡고 다급하게 같이 식사하고 싶을 뿐이라 소리치는 빌라넬의 모습은 여태껏 보였던 그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대비된다. 자신의 동료를 죽인 빌라넬을 향한 분노와 경멸, 공포로 가득차 발버둥치는 이브를 빌라넬은 때로는 힘으로 제압해가며 침착하게 마주한다. 사이코패스라는 말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화를 내기도 한다. 이처럼 그들의 만남은 긴장감과 불신, 원망으로 얼룩져있으면서도 서로를 향한 끌림으로 가득하다. 다가오는 이브에게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다, 상처받고 다시 도망치면서 이브를 향한 빌라넬의 원망과 갈망은 더욱 짙어진다.
썩 아름답지만은 않은 빌라넬의 그리움을 찬찬히 지켜보다 보면, 단순한 끌림을 넘어선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브와 자신이 연결되기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를, 이브와 더욱 가까워지고, 그를 더 알게 되고, 그가 자신을 더욱 아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브를 만난 후 무감각하던 빌라넬의 안에서 수많은 감정의 물결이 요동친다. 뜨겁고 격앙된 열망, 호기심, 애틋함과 그리움, 실망과 원망, 불안과 질투, 소유욕, 슬픔, 그리고 기쁨까지. 빌라넬에게 이브는 어떤 존재보다도 특별한, 자신의 감정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호수같은 존재가 아닐까.
빌라넬을 바라보는 이브
늘 너를 생각해.
ⓒ 이미지 출처: 킬링이브
빌라넬을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그를 집요하게 쫓는 이브를 보면, 단순한 직업적 소명 의식이나 정의감을 넘어선 맹목적인 몰입이 느껴진다. 마치 빌라넬이 나타나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던 것처럼, 이브는 직업과 남편을 포함한 대인관계,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던지며 빌라넬에게 다가선다. 이브가 빌라넬에게 이토록 집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브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기준에서 바라보았을 때 별다른 어긋남 없이 좋은 사람이며, 좋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번듯한 직장에서 사회악에 맞서는 모습은 정의롭기 그지없고, 모난 데 없이 유순한 남편의 내조를 받으며 오순도순 가정을 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유쾌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자신의 신념을 갖고 그것을 관철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빌라넬의 다사다난한 삶에 비추어보았을 때, 이브의 삶에서 어그러진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게 안정적이고 또 바람직하다. 이때, 그늘진 곳 하나 없는 에덴동산 위를 뛰놀던 이브의 앞에 선악과를 손에 쥔 빌라넬이 등장한다. 보란듯이 선악과를 베어무는 빌라넬에게 선이나 악은 마치 장난감에 불과해보인다. 익숙하게 선악과를 탐하는 빌라넬의 모습은 이브에게 그 자체로 뱀의 유혹이다. 단 한 번도 맛본 적 없고, 감히 원하거나 손을 뻗어본 적도 없지만, 이브는 에덴동산을 뛰놀면서도 늘 마음 속 한켠에 달콤한 선악과를 향한 갈망을 품고 있었을 테다.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정의로운 수사관 이브와 극악무도한 킬러 빌라넬은 언뜻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브가 빌라넬에게 그토록 빠져든 이유는 닮은 이를 알아본 데서 오는 동질감과 닮고 싶은 이를 향한 동경에 있다. 정의롭고자 하는 마음과 어긋나고자 하는 욕구, 올곧아야 한다는 생각과 흐트러뜨리고 싶은 마음, 고통과 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과 그것에 둔감해지고 또 매료되는 것, 나아가서는 다른 여성과 연결되고자 하는 열망과 여성을 향한 사랑까지. 빌라넬은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까지 묻어둔 이브의 욕망을 꺼내보이고 현실에 갈등을 불러온다. 결국 빌라넬과의 만남은 이브에게 그간 숨겨왔던 또다른 자아를 마주하는 일인 것이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 즉 빌라넬과 가까워질수록 이브의 혼란이 극에 달하는 장면도 종종 엿볼 수 있다. 빌라넬을 향한 애증도 그 일환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브의 몸과 마음은 겉잡을 수 없이 빌라넬에게로 흘러가는 듯하다. 이브는 이대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베어물게 될 것인가? 아니면 유혹을 뿌리치고 뱀을 물리칠 것인가? 그들이 손을 잡게 된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들이 서로를 밀어낸다면, 각자가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강렬한 이끌림으로 시작된 둘의 관계는 그보다 더 짙은 물음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