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 맥과이어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뮤지컬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오즈에 당도하기 전 ‘착한 마녀’ 글린다와 ‘서쪽 마녀’ 엘파바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성 관계는 사랑과 우정이라는 이분법적인 관계로 규정지을 수 없는 다양한 양상이 나타난다. 뮤지컬 <위키드>의 주인공인 엘파바와 글린다 또한 단순히 친구 사이 혹은 우정이라고 표현되기에는 훨씬 깊은 감정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 관계는 사랑의 범주 밖에 놓이며 주목받지 못해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엘파바-글린다의 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는 곡의 가사를 분석하여 여성 관계의 의미를 도출해내고자 한다.
이제는 내일로 나아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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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된 두 넘버 ‘너로 인하여’와 ‘나를 놓지 마’는 각각 엘파바-글린다, 엘파바-피예로의 듀엣곡이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그려지며, 엘파바와 남자 주인공 피예로는 사랑하는 연인 관계로 그려진다. ‘너로 인하여’에서 엘파바와 글린다는 서로로 인한 성장과 발전을 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한다. 또 작품 전반에서 정서적 교감과 연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엘파바와 글린다는 너무나도 다른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서 시작해 점차 다름을 받아들이고, 동물 종족 차별 금지와 오즈의 평화라는 같은 지향점을 향해 나아간다. 엘파바가 오즈 국민들의 오해로 인해 큰 어려움에 빠졌을 때 오즈의 ‘착한 마녀’로 불리던 글린다는 그에게 그토록 중요한 평판을 희생하면서까지 엘파바를 구해주려 하고, 엘파바는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글린다의 평판을 지켜주려고 하며 서로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길 마다하지 않는다.
한편 사랑으로 규정지어지는 엘파바와 피예로는 ‘나를 놓지 마’에서 알 수 있듯 보다 성적인 교감을 보여준다. 정서적 교감과 연대, 그리고 성애는 모두 사랑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다만 우리는 사랑에 있어 성애, 그 중에서도 육체적 관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육체적 관계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관계를 우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두 사람이 나눈 감정과 교감을 섣불리 규정짓는 일이다.
더불어 뮤지컬에서 엘파바-피예로-글린다는 삼각관계로 다뤄지고, 엘파바와 피예로의 관계는 메인 러브라인으로 그려진다. <위키드>에서는 여타 다른 콘텐츠의 삼각관계와는 달리 엘파바와 글린다가 피예로를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둘의 관계에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난다. 엘파바와 피예로의 관계나 글린다와 피예로의 관계는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관객들은 이러한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를 우정이라고만 생각할 뿐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기는 주저하는 한편, 엘파바와 피예로의 관계는 의심의 여지없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메인 러브라인에도 간섭 받지 않는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를 어떻게 우정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너라는 중력이 손을 내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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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파바와 글린다의 만남과 관계는 자연의 흐름처럼, 어디에 있어도 똑같이 작용하는 중력처럼 절대적이고 필연적이다. 심장에 비유되는 서로의 존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이 고유하다. 그 누구와도 사랑과 신뢰를 주고받지 않았던 엘파바에게 글린다는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이 되어준다. 엘파바의 상징인 검은 고깔모자와 망토는 글린다가 씌워 준 것으로, 이 두 아이템은 엘파바의 정체성 형성에 글린다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글린다 또한 처음에는 자기 중심적이고 철부지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엘파바를 통해 타인을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고, 공연 후반부에는 훨씬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를 ‘운명’이라 말한다. 보통 운명이라고 하면 쉽게 사랑을 떠올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를 보며 우정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너로 인하여 달라졌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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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성애가 기본값인 사회에서 여성들의 관계는 그것이 어떤 역동을 품고 있는지와 관계 없이 늘 우정으로만 해석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들은 분명 깊은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다양한 감정을 공유한다. 친밀한 관계를 우정과 사랑으로 이분화하고 사랑을 성적인 관계의 틀 안에서만 해석하는 시각을 벗어나 여성 간의 좀 더 다양한 양상의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나눈 감정에 주목해야한다.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 역시 우정이라는 틀 안에 갇혀 여성과 남성 간의 사랑에 비해 덜 깊이 있을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엘파바와 글린다는 어떤 단어로 규정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깊은 애정과 끈끈한 연대를 다졌다.
그들은 너로 인하여 내가 달라졌다 말하며 항상 곁에서 지켜줄 테니 더 넓은 내일로 나아가자고 노래한다. 과거로부터 서로를 변화시키고 현재에서 함께 성장하며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뮤지컬이 끝날 때 그들이 함께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노래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여성들이 자기 삶의 여성들을 되돌아보고, 그들과 나눈 감정과 그들이 자신의 삶에 가져온 역동을 깊이 새기기를 바란다. 많은 여성들이 여성을 사랑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