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자버 Sep 29. 2023

다정한 죽음 외에는 확실한 게 없어서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고

친구란 남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존재다. 할 일 제쳐두고 뛰어가 꼭 붙잡고 연연해야 하는 관계라면, 아무리 시간이 남아돌아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관계라면 친구 사이가 아닌 그 이상, 혹은 그 이하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뜻이다. “시간이 남으면 너를 만나고 싶다.”라는 적당히 미지근하고 알맞게 간이 맞는 그 멘트는 반드시 절친한 누군가를 위해서만 써야 하는 말인 것만 같다.


참 곤란한 건, 누군가에겐 시간이 남아돌고, 누군가에겐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과 그렇게 삶의 태도가 다른 두 사람도 서로를 친구로 삼고 싶어 한다는 아이러니한 케미스트리에 있다. 누군가에게 인생은 경험이다. 해당 라운드에 주어진 시간 동안 만나는 인연과 사건들을 최대한 즐기는 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반면 누군가에게 인생은 기록이다. 무한한 우주에 유한한 족적을 남길 수 있는 한정된 기회를 알차게 사용해야 한다.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전자가 ‘파우릭’, 후자는 ‘콜름’이다.


영화는 콜름이 절친(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파우릭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절교를 선언하면서 시작된다. 도대체 왜, 어제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맥주를 나눠마시던 콜름이 대체 왜 자신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파우릭은 그저 억울하기만 하다. 짙고 덥수룩한 그의 눈썹은 서운함과 막연함에 팔자 모양으로 꺾인 채 러닝타임 내내 좀처럼 평평해질 줄을 모른다. 파우릭을 보고 있으면 짠하다.


반면 콜름을 보고 있으면 위액이 역류한 것처럼 목 끝이 까슬까슬 쓰려온다. 일생일대의 곡을 쓰겠다는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시간은 흘러만 가는데, 죽음이 곧 들이닥칠 텐데! 그가 작곡한 곡은 그저 그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작곡에 쏟을 시간과 훌륭한 곡을 만드는 데 영감을 줄 수준 높은 어울림이다. 한마디로 파우릭과 시시덕 댈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부족한 건 자기 자신인데 콜름은 원망의 화살을 파우릭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파우릭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한 번만 더 말을 걸면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겠다.”라고.


만약 파우릭이 말을 걸어 콜름이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면, 그로 인해 작곡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결국 내 걸작을 망친 건 바보 같은 파우릭 탓이야! 하고 논리백단의 그럴듯한 자기변명이 완성된다. 참으로 신선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너무 신선한 변명이라 콜름이 잘라낸 손가락에서는 비린내도 안 날 거다. 따질 것도 없이 콜름처럼 삶을 대하는 나는 몇 번이나 속이 메슥거렸다. 타자를 치고 있는 손을 본다. 과연 내 손가락은 몇이나 남아있을는지.


사람들은 순진무구한 피해자가 된 파우릭 편을 들며, 인생은 역시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제법 간결한 결론들을 내리는 것 같다. 그런 골조가 뚜렷했던 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쪽인 것 같다. 무한대의 삶을 다 살아봐도 결국은 ‘지금 여기 너와’ 함께 하겠다는,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사는 태도를 찬양하자는 건 <이니셰린의 밴시>가 하고 싶은 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이 평소에 겪는 진짜 비극은, 본인 안에 파우릭과 콜름이 둘 다 살아 숨 쉬며 시시 때때의 갈등에 휩싸인다는 점 아닐까. 한바탕 놀이판처럼 즐기고 싶다가도 영원하고 순수한 것을 추구하고 싶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갈등하는 존재, 우리는 인간이니까. 어느 쪽도 확실한 건 없다. 확실한 건 죽음밖에 없다. 죽음은 이니셰린의 밴시(아일랜드 전설 속에 나오는 죽음의 요정)처럼 저 멀리 절벽 위에 서서 우리를 위한 송장곡을 준비하고 있다. 다정하게도 모두에게 공평한 끝을 선물해 줄 거다.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들 속에서 본질은 콜름이면서 파우릭처럼 그때그때의 위기를 소화해 보려 노력하다 한 해가 거의 다 가버렸다. 그래도 얼마간 심각한 것들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때, <이니셰린의 밴시> 리뷰로 간만의 업로드를 해본다. 다행히 아직 글을 쓸 수 있는 정도의 손가락은 남아있는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마흔이라는 어나더 라운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