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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Jan 23. 2023

갈월동 함께 산책할래요?

반달집 창문 앞에 서면 앞집 옥상에 널린 빨래부터 해방촌 언덕 꼭대기에 있는 교회 장식 등까지 훤히 다 보인다. 날씨 좋은 날엔 남산을 이루고 있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싱싱함이 눈에 다 담길 정도다. 우뚝 선 남산 타워가 “이리 와라. 얼른 와봐라.” 하고 유혹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창밖을 보고 있노라면 얼른 저 풍경을 정복하고 말겠다는 마음이 이글거려 결국 신발끈 조여매고 밖을 나돌아 다니기 일쑤다. 워낙 집에 붙박여 있는 성격이 아닌 나와 설쌤은 걸음걸음 발자취로 동네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편이다.


2층 문을 열자마자 앞집 마당의 ‘고민머리 나무’가 보인다. 지붕 높이보다 웃자라 머리가 모서리에 쿡 박힌 나무의 자세가 꼭 항시 고민을 끼고 사느라 골치 아파하는 내 모습과 닮아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오른쪽으로 딱 한 걸음만 옆에 심었으면 고민 없이 쭉쭉 자라기만 했을 텐데 왠지 더 자랄 수 있는 능력치보다 한참 덜 자란 것만 같아서 안타깝다. 제 딴에 지붕을 피한다고 피한 티가 나는 게 나무 기둥이 지붕 반대쪽으로 제법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그마저도 한계가 있는 모양. 그만큼 내 마음만 괜히 나무 쪽으로 더 기운다.

끼익 대문을 열면 가끔 후다닥 도망가는 고양이 뒤꽁무니를 목격할 수 있다. 어쩌다 터를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갈월동엔 까만 턱시도 고양이 대가족이 산다. 고양이 낌새가 느껴지면 열에 아홉은 턱시도 고양이다. 자물쇠가 걸린 빈집 대문 뒤로 새끼 고양이 몇 마리가 겁에 질린 눈으로 바짝 얼어있는 걸 보고 순간 저들을 꾀어내 집으로 데려가고 싶단 생각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하지만 주인집 할머니가 살아있는 건 키우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적이 있는 바, 마음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집사의 로망은 산책길에 가끔 마주치는 정도에서 타협을 보기로 했다.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첫 코너에 <우리 식당>이 자리 잡고 있다. 갈월동 동네 사람들과 바로 옆 후암동 직장인의 평일 점심을 책임지는 곳이다. 이사 오자마자 주인집 할머니께서도 맛있다며 엄청 추천하지 않았으면 사실 허름한 외관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 같은 곳이다. 고등어구이, 제육볶음, 오징어볶음 등 요일마다 다른 메뉴를 판다. 여느 식당처럼 테이블 좌석도 있지만 아랫목이 따뜻한 안방 좌식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이 우리 식당만의 묘미다. 식당 사장님 내외의 가족사진부터 손주가 타온 것으로 추정되는 상장, 직접 만드신 퀼트 장식품 등을 구경하다 보면 따뜻한 밥 한상 뚝딱 차려지는 건 금방이다. 동네에 손 크고 밥 잘하는 이모님 집에 놀러 와 든든히 밥 한 끼 얻어먹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갈월동에서 후암동으로 이어지는 골목엔 단독주택이 많다. 남 눈치 안 보고 맘 가는 대로 지어놓은 집집마다의 벽 재질, 지붕 색깔, 마당 조경 구경하는 재미도 있지만 집 가장 바깥에서 보란 듯 서있는 담장들이 뽐내는 개성도 만만치 않다. 그중에 한 담장은 너무나 미스터리 해서 설쌤과 지나갈 때마다 의아해하며 예의주시하는 중이다. 범상치 않은 화분 디스플레이도 희한하지만 무엇보다 그네처럼 매달려있는 멈춰있는 아날로그시계가 미스터리 하다. 분명 시곗바늘이 멈춰있는데 지나갈 때마다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이 달라져있다. 누군가가 계속해서 시간을 조정한다는 뜻인데, 그 시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대체 왜 시간을 바꾸는 것일까? 흠,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것으로...

조금만 더 걸으면 다소 올드한 갈월동 골목 분위기를 확 반전시키는 에스프레소 바 <오르소>가 나온다. 처음엔 동네 이미지에 맞지 않게 세련된 인테리어의 가게가 지어지는 걸 보고 걱정부터 했더랬다. 나로선 반갑지만 이 외진 골목에 누가 찾아온다고! 하지만 완벽한 기우였다. <오르소>는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멀리 다른 지역 사람은 물론 연예인까지 찾아오는 핫플레이스가 되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계절에 맞게 시원한 슬러시형 에스프레소는 물론 상큼한 레모네이드 같은 에스프레소, 달달하고 녹진한 에스프레소,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에스프레소까지 다양한 메뉴를 저렴한 가격에 친절한 사장님이 대접해 주니, 가도 가도 또 가고 싶고 멀리서도 찾아오고 싶은 곳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더 흥하소서.

큰길 쪽으로 나가면 나와 설쌤이 갈월동은 물론 서울, 아니 전국을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빵집이 나온다. 바로 벨기에에서 온 부부가 운영하는 <따팡> 베이커리다. ‘빵은 달아야 한다’라는 신조를 달고 사는 나지만 <따팡>의 각종 식사빵을 접하고 생각이 달라졌다. 바삭한 겉을 와작 씹으면 촉촉하고 쫄깃한 속살이 드러나면서 고소하고 묵직한 맛의 베이스에 살짝 시큼하고 짭조름한 재미를 더하는 깜빠뉴는 따팡에서 최고로 애정하는 메뉴다. 일주일에 4일 정도는 이 깜빠뉴로 아침을 해 먹고 출근한다. 여유로운 주말 아침, 따팡에 들러 품에 한가득 빵을 안고 귀가할 때, 그 행복감은 어떤 호화로운 식사보다 나를 부유하게 만들어준다.

마음먹고 소풍을 나올 땐 백범광장으로 향한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유명해진 남산 계단을 오르면 넓은 잔디 광장이 펼쳐진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푸른 남산이고 바로 앞 풍경은 빽빽한 빌딩숲인 게 서울에 사는 느낌을 한껏 고양시켜 준다. 우린 챙겨 온 캠핑 의자를 매번 찾아가는 나무 아래 설치하고 여유를 즐긴다. 와인이나 위스키를 소분해서 가져오는 날은 낭만의 끝이다. 집에서 지척인 거리지만 그마저도 밖이랍시고 조금 취기가 오른 김에 미주알고주알 마음속 얘기를 상대방에게 털어놓게 된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괜히 미래를 계획하게 된다. 백범광장에서 우리끼리 다짐한 그 약속들 중에 몇 가지를 지켜나가고 있더라? 잘 모르겠지만 다짐하는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는 사실로 생각보다 너무 멀리 나왔다는 걸 눈치챈다. 매번 같은 경로인데도 매번 의욕이 앞선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속에 발도장 찍은 영역이 늘어날 때마다 동네를 생각하는 시야가 선명해진다. 변함없는 평수에 살면서도 더 넓게 사는 비결이다. 문득 이사 오기 전 동네에서도 비슷한 만족감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쩌면 터를 내린 곳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은 나의 오래된 버릇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어떠랴? 옆에서 같이 호들갑 떨면서 타오르는 애정에 불을 지펴줄 사람이 있으니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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