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이브와의 복싱 수업

"너 지금 화나 있구나?"

by 탄고

여자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을 때도 한강 변을 따라 같이 걸을 때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나를 향해 웃어 주던 여자 친구를 볼 때조차 언제 헤어지자고 말을 할까, 라는 생각뿐이었다.


연인이나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좋은 면이 아니라 부족한 점과 단점을 더 많이 발견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실 그들의 단점이 아니라 애써 그들의 흠을 만들어서 찾아냈던 것이다. 관계를 멀어지게 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 속에서 주변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관계가 내게서 멀어져 갔고 그들을 밀어내고 힘들게 해야만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관계란 내게 지치게 하는 것일 뿐이었다. 마음이 병들어서 일까 날이 갈수록 음식을 먹어도 소화를 못 시키는 것 같았다. 먹으면 복부가 팽만해지고 더부룩하고 아무리 걷고 움직여도 도통 음식이 내려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 다음날 오후까지 음식물이 배안에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들었고 다음날이 되어도 딱히 배고프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내과에서 약을 받아먹어도 내시경을 받아봐도 도통 나아지지 않았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정말 잘 먹고 소화도 잘 시켰던 것 같았는데 작년과 비교해봤을 때 뭐가 달라졌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작년엔 내가 어떻게 지냈더라. 물론 작년에도 스트레스가 많긴 했지만 올해 스트레스가 유독 더 많았던 거 같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스트레스 때문일까, 스트레스가 큰 이유를 차지하는 것은 맞겠지만 과연 이렇게 소화 불량의 원인으로 스트레스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맞을까,라고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작년과 올 해의 큰 차이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먹는 양은 그대로인데 운동량이 확실히 줄었다. 작년엔 함께 축구를 하던 지인들이 주변에 많았기에 매주 주말이면 축구를 같이 했고 웨이트에도 재미를 붙여 꾸준히 운동도 했었지만 그에 비해 지금은 하루 30분가량의 간단한 홈트레이닝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 운동이다. 운동을 하는 거야.


내가 할 줄 아는 운동이라고는 축구밖에 없는데 어디서 축구를 할 수 있을까. 먼저 떠오른 곳은 오픈 채팅방이었다. 요즘 오픈 채팅으로 동아리나 취미 활동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오픈 채팅방에 축구라고 검색한 뒤 내가 속해 있는 동네를 찾고 있었다. 다들 저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자기소개 문구를 적어두었다. "마포구 10년 전통의 대표 축구 동아리", "타 동네 동아리와 리그 운영제 실시 중"등의 문구가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축구를 오랫동안 쉬었고 내가 당장 들어가면 모르는 다 모르는 사람일뿐더러 오래 운영했다면 다들 친할 텐데 낯선 사람인 내가 들어가면 과연 다들 반겨줄까?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던 나에게 또다시 많은 생각들이 찾아왔고 이 생각들은 나의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문자 한 통이 왔다. 캐나다인 친구 이브였다. 그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지만 우리 둘의 나이차는 대략 60년에 달한다. 나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조부모님보다도 훨씬 형님이신 것이다. 주말인데 베이컨에 맥주 한잔 해야 하지 않겠냐며 문자가 왔다. 그러고 싶지만 요즘 내 속이 영 말이 아니어서 말이 아니라서요,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 모든 짐은 내가 다 짊어지고 있는 말투로 답장을 건넸다. 퀘벡에서 온 이브는 나를 리틀 퍼커,라고 부른다. 맞다. 욕이다. 하지만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리틀 퍼커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리틀 퍼커라고 부를 때마다 항상 혼자 낄낄 웃는 모습의 90세 이브가 이제는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나도 마음 같아선 맥주 한잔 하고 싶지만 아쉬움을 달래고 답장했다.


: 맥주는 이제 안돼요. 몸 관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운동을 좀 해보려고요. 운동할만한 곳을 찾아보는 중이에요

이브: 운동? 아쉽지만 맥주는 다음에 하는 걸로 하고 그럼 우리 집에 운동하러 와


이브가 할 줄 아는 운동이 있었던가? 축 늘어진 뱃살을 톡톡 치며 세상 행복한 듯 웃는 백인 노인의 이브를 떠올리며 전혀 매치가 안되는데,라고 생각했다.


나: 이브집에 운동 기구가 있어요?

이브: 내가 얘기 안 했던가? 이래 봬도 운동 코치였다구!


얘기 안 해줬다마다 처음 듣는 이브의 이야기에 너무 깜짝 놀랐다. 과연 무슨 운동 코치였을까, 하는 궁금함에 1시간을 걸어 이브집에 도착했다. 이브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그의 집 앞 농장에 있는 말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제 나를 자주 봐서 일까 그래도 그들과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이 지나가는데 어떻게 시선 한 번을 안 줄까,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이브: 리틀 퍼커! 왔어?

나: 이브, 운동 코치였다구요? 무슨 운동 코치였어요?

이브: 나? 야구코치였지. 하지만 야구 말고도 할 줄 아는 운동이 많다고. 어디 보자 우리 리틀 보이. 너에겐 예전부터 복싱을 가르쳐주고 싶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운동이 나와 조금 당황했다. 웨이트, 크로스핏 등의 운동을 생각했는데 복싱이라니.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복싱을 배우러 체육관에 가면 바로 글러브부터 줄게 아니라 줄넘기만 100일 가까이 시키고 스텝 연습부터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속으로 그래 줄넘기도 좋은 운동이지, 하는 마음으로 100일가량은 줄넘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나: 좋아요. 뭐 부터할까요?


이브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내었고 그의 집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를 알고 지낸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지하실에 내려온 건 처음이었다. 이런 공간이 있었구나 하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글러브를 가지고 와서는 내 손에 끼워 주었다.


이브: 우리 리틀 퍼커. 재능 좀 볼까?


그가 낄낄 거리는 웃음을 보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나를 지하 실안의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내 몸만 한 샌드백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브는 샌드백의 뒤로 가서는 샌드백을 꼭 붙들고 힘껏 쳐보라고 말했다. 샌드백이 얼마나 딱딱한지 느껴보려고 글러브를 낀 손으로 샌드백을 톡톡 건드려보았고 생각보다 단단했던 샌드백에 조금 놀랐지만 역시 애송이구나, 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만화나 영화에서 배운 폼을 떠올리며 왼손과 오른손으로 번갈아가며 빠른 잽을 두 번 연속 날려보았다.


이브: 오! 나쁘지 않아. 날렵해. 재능이 있는데? 하지만 역시 파워가 부족해. 지금 제일 미운 사람을 떠올려보며 치는 거야!


미운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은 없다. 사실 지금 제일 미운건 나 자신이다. 사랑을 주는 연인과 친구들에게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밀어내기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누구를 쉽게 미워하는 성격이 못되다고요.


이브: 누구를 떠올리는 거야? 아까랑 힘이 똑같아!

나: 미운 사람 같은 거 없어요!


최대한 말을 짧게 하며 호흡을 아꼈다. 말을 하면서도 잽과 훅을 번갈아가며 샌드백을 계속 내리쳤다.


이브: 거짓말하지 마. 그러면 왜 그렇게 시종일관 화나 있고 예민해있는 거야?

나: 나는 내가 답답해요.

이브: 리틀 퍼커. 우리 잠깐 쉴까?


서로 마주 보는 의자에 걸터앉았고 서로 잠시 동안 조용했다. 조용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숨소리를 낮추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브: 리틀 퍼커 힘드니?

나: 네 오랜만에 운동하니까 좀 힘드네요.

이브: 마음 말이야

나: 인정할게요. 사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친한 친구들도 여자 친구도 그냥 떼어 놓고 싶어요. 혼자 있어야 마음이 편해요. 사실 어떤 이유 때문에 힘든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내 고민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브: 계속 얘기해.

나: 얘기한 대로예요. 분명 내 주변 사람들이 그냥 지쳐요. 사실 그보다 뭘 더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브: 생각나는 대로. 다 얘기해. 리틀 퍼커,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이해가 가지만 사실 말에서 느껴지는 마음이나 감정은 너무 복합적이야. 너도 무슨 마음인지 스스로가 잘 모르는 거 같아. 말을 계속 뱉다 보면 그 말에 딸려서 마음도 튀어나올 거 같아.


이브의 말대로 생각을 정리해서 말할 필요도 조리 있게 말할 필요도 없이 그냥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그냥 뱉어냈다.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스스로는 잘 알지 못했지만 하나같이 지치고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 앞의 이브는 진지한 상담사의 모습이 아닌 내 이야기를 재밌게 듣고 있었다. 낄낄 거리는 이브 특유의 웃음과 함께 "리틀~퍼커"하는 리액션과 함께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조리 있고 명확하게 정리해서 하는 말이 아닌데도 누군가 내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듣고 있는 건 정말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실컷 내 얘기를 다 하고 나서 이브가 내게 일깨워 주고 싶었던 생각이 이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모든 관계에 있어서 외로웠다.


이브: 그동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쪽이었지?

나: 네 맞아요.

이브: 친구들이 힘들 때면 늘 옆에 있어주려 했을 테고 말이야?

나: 그랬죠

이브: 얘기를 좀 해보니까 어때?

나: 솔직히 좀 걱정되고 불안해요. 이브를 앉혀놓고 이렇게 내 얘기만 주야장천 해도 되는 걸까. 내 지루하고 힘들었던 이야기에 관심도 없을 텐데, 물론 이브는 내게 괜찮다고 얘기하겠지만 속으로는 지루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브: 리틀 퍼커. 물론 지금 너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마 오늘 밤이 되면 너의 대화는 대부분 기억나지 않을 거야.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래. 그러니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건 그 순간에 털어놓고 끝내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얘기하는 거야. 오히려 너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마음을 쏟아준다면 그거야 말로 오래 안 가 금방 지쳐버릴 거야. 너의 잽처럼 말이지. 그냥 툭툭.

나: 좋아요 툭툭.


늘 혼자 남겨질까 두려워 들어주는 역할, 도와주는 역할, 맞춰주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다가 타인과의 관계도 나와의 관계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토록 외로웠던 적은 없었다. 이것을 어느 누구와 얘기해봐야 하는 걸까, 아니 그보다 이걸 얘기한다고 충분히 공감받을 수 있을까 괜히 나의 안 좋은 감정만 전해주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브의 말대로 내가 지금 진심으로 공감받고 위로받고 싶다고 해서 나에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준다면 그 에너지는 오래가지 못해 금방 지칠 것이다. 문제라고 생각하면 진짜 문제가 된다고 했던가. 나의 고민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그 크기가 결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이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금 전 이브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나도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이고 마음인지 잘 모르고 있구나. 나랑 별로 친하지 않나 보구나.


나: 이브의 말이 맞아요. 나는 아직 내 마음을 잘 모르고 있어요. 내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이고 무얼 원하는지요. 결국 제가 제 자신의 관계가 별로 안 좋은 거겠죠?

이브: 나는 운동을 했다 보니 아무래도 계속 운동에 비유해서 이야기해줄 수밖에 없네. 캐치볼을 한다고 생각해. 너에게 감정이 날아오면 피하지 말고 너의 글러브로 딱 잡는 거야. 그리고 다시 던지는 거지. 물론 다시 던질 때는 상대방이 잘 잡을 수 있게 상대의 레벨을 파악해서 던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이야. 리틀 퍼커 부모님이랑은 좀 친해?

나: 사실 부모님과의 관계도 큰 고민 중 하나예요.

이브: 너 자신과의 관계는 중간지점이야. 너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통해 너와 너 자신의 관계가 만들어지고 너와 너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너와 네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만들어지지

나: 그럼 저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먼저 바꿔봐야 하는 건가요?

이브: 글쎄.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너와 너 자신의 관계를 바꿔보는 게 빠르지 않을까?

나: 좋아요. 그럼 전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이브: 난 운동코치지 선생님이 아니야 리틀 퍼커.

나: 안도와 줄 건가요?

이브: 원인을 같이 알아봐 줄 수는 있지. 하지만 정답은 너 혼자 생각해내야 할 거야. 설령 내가 생각하는 정답을 알려주어도 넌 그대로 하지 않을 테니까 더더욱 말이야.

나: 좋아요. 든든하네요. 다음 운동은 언제로 할까요? 다음에도 복싱인 가요?

이브: 정말 귀찮은 리틀 퍼커구나. 다음 주 토요일 이 시간이야.


애착 유형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나와 부모님의 관계로부터 시작된 나의 관계패턴이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주었는가, 나 자신과의 관계는 어떻게 타인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로부터 독립해가는가를 내 친구 이브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가는 이야기이다. 나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온전히 챙기지 못하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좋은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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