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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햇살 Aug 11. 2021

지금 몇 번째 계절을 살고 있나요?

 으스슥 쪼개어 촤르륵 떨어지는 수박을 으깬다. 바스슥 소리 나게 씹으며 단물을 꾸울꺽 삼킨다. 내가 좋아하는 수박의 계절이다.


 강인한 햇살 아래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것만 같은 이글거림. 웬만한 노출 정도는 서로가 눈감아주는 계절, 온기와 냉기를 다이나믹하게 오갈 수 있는 각종 스포츠 활동, 열매가 한껏 익어지리란 기대감이 충만한 계절, 자칫 화상의 위험까지 감수하고도 까무잡잡한 태닝 피부를 위해 뙤약볕에 몸을 맡기는 계절, 덥다면서도 기어코 더욱 후덥지근하고 습한 나라로 여행 가서 땀을 빠작빠작 흘려가며 식도락을 즐기고 오는 계절. 바로 여름이다.


 가을이 되면 즐기지 못할, 여름에만 즐길 수 있는 스포츠가 많듯, 지금의 내가 그렇다. 너무 빠지다가 예상치 못한 사고로 다치기도,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지금에서야 겪을 수 있는 고통이다.


 어릴 때, 우리 가족은 휴양으로 사이판에 갔다. 벌써 20년 정도 지난 일이라 사진 속 장면들만 조각조각 스쳐가는 정도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눈에서 아른거리는 장면이 있다. 20년 전의 한여름 날, 코발트빛 사이판 바다 한가운데서 자그마한 튜브에 몸을 맡기고, 동생이랑 하늘을 바라봤다.

 “누나! 이렇게 튜브에 누운 채로 하늘 봐봐! 엄청 좋다~.”

 우리 남매는 작고 오동통한 튜브를 침대 삼아 누운 채 한참을 멍하니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피부가 까맣게 그을리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진 파랑과 살짝씩 눈의 시선 끝을 간지럽히는 잔잔한 파도와 함께 있었다. 시시각각 움직이는 구름 따라 어린 남매의 눈망울도 파랗게 반짝이며 바쁘게 움직였고 그저 그 시간에 몸을 맡기고 신나게 웃어댔다.


 그날의 우리는 쓸 데 없는 잡념이나 삶의 무게라고는 1도 없는 순수하고 해맑은 아이들이었다. 덕분에 우리나라 자외선의 몇십 배에 달하는 햇볕을 장시간 맞아서 2년이 지나도록 수영복 선이 또렷이 남게 되었지만, 어려서였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무모함이 아련하고 아름답다. 꽤 오랜 시간 또렷이 남은 선의 질김만큼이나 오래도록 남아있는 추억이 되었다. 아마 지금도 유난히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게 그때의 기억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30대인 나는 인생의 두 번째 계절인 ‘여름’을 보내는 중이다. 아직 열매가 다 익지 않았지만, 한껏 익어가리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지글대는 햇살에 눈을 못 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을 향해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가고 있는 시간이다. 때로는 뛰어가기도, 걸어가기도, 숨을 고르며 쉬기도 한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새, 나의 계절이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 왔을 때 무모하고 때론 바보 같아도 이글거렸던 여름이 생각났으면 좋겠다. 지난여름을 떠올리면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에 누워 쉴 새 없이 까르르 웃고 있던 남매가 기억나듯 말이다.


 어릴 때의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각종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변화와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겁이 많은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런 걱정들은 삶에서 날 아프게 했던 수많은 변수들이 만든 경고등이다. 그 경고등으로 위험을 피해 가기도, 내면을 더 단단하게 채찍질하기도 하지만, 때론 너무 많은 걸 알게 되어버린 게 슬프기도 하다. 생각을 깊게 하거나 미리 걱정하기보다는 조금은 더 무모하게, 다시는 오지 않을 이 한여름의 뜨거움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즐겨야겠다.


 가을에 어떤 열매가 열릴지, 얼마나 큰 열매가 얼마나 많이 열릴지 모르지만, 그 기대감과 상상이 날 걸어가게 하고 버티게 하는, 찐한 한여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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