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ssel, <Red Sex>
학교 앞 스벅 2층. 햇빛을 받아야 우울이 가신다기에 일부러 통유리창 앞의 1인석 바 자리에 앉았다. 어찌나 날이 청량한지 티 없이 맑은 하늘. 햇빛이 쭉 뻗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린 듯한 햇빛을 마주하려고 고개를 드는데 갑자기 하늘에 크고 작은 어둠 구멍들이 뻥뻥 뚫렸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것들이 완전히 점멸할 때까지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쳐다봐야 했다. 내가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태양의 흑점처럼 새카만 구멍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야 몸이 풀렸다. 잔뜩 얼어붙었을 때부터 하늘에 재앙이 난 게 아닌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내면의 공포나 피폐함을 본 거겠지. 우울 한 점 없이 밝은 하늘에서.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너 진짜 병원 가 봐. 약 먹어.
사촌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카톡을 보냈더니 이런 답이 왔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언니가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을 잘 아니까. 그리고 언니의 주변에도 정신과 내원을 하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내가 정신과 약을 먹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아냐, 나 일단 상담 예약해놨어.
교내 상담실은 상담 희망자에 비해 규모도 작고 인력이 부족해서 대기를 걸어놔도 첫 상담까지 몇 달이 걸렸다. 내가 말한 건 본 회기가 아니라 일종의 예비 상담 같은 것이었다. 본격적인 상담 전에 내담자의 상태를 파악하고자 1~2회 진행하는.
-또 비슷한 일 생기면 그때는 병원 갈게.
그렇게 마음 먹었고, 나 자신과 언니를 안심시켰다. 또 햇빛 사이에서 새카만 구멍들을 본 적은 없어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건 다행이지만 달리 보면 본격적인 치유국면에 들어서기까지 적어도 몇 달의 시간이 더 걸린 셈이다.
문제는 다른 부분에서 서서히, 꾸준하게 나타났다. 걷는 게 힘겹고 머리에 열이 몰리더니 갑자기 팔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밥을 먹어도 포만감이 안 들고 등등.. 신체적인 증상을 하나하나 설명하면 글이 늘어지니 이 매거진에서는 음악에 한정해 보겠다. 이상 징후라기엔 너무나 사소하고, 단순히 취향 타는 일 같아서 문제인지도 잘 몰랐던 것. 우울증이 깊어가면서 나는 점차 밝고 행복한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감정에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꼈다. 내가 들을 수 있는 노래의 폭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곧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좁아졌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언제부터 그리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대략 따져보자면, 일상이 점점 버거워지는 것과 궤를 같이 하지 않았나 싶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곡은 Vessel의 <Red Sex>. 그 당시 심리 상태와 잘 맞아떨어졌는지 정말 자주 들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예고편 배경음악으로 접했다. 처음 듣는 순간 영상에 착 달라붙고 너무 감각적인 곡이라 바로 원곡을 검색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정말 어쩌다 한번씩 듣던 것이었는데, 이 시기 들어선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거의 매일 아침 들었다. 학교 가기 어지간히 싫었던 듯하다.
<Red Sex>는 사실 우울하다 못해 음울한 곡이다. 기이하고 불안한 선율은 뒤로 갈수록 불길한 긴장감으로 고조된다. 그런데 그 긴장감과 곡 전체의 언캐니함이 묘한 쾌감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분명 매력 있는 곡이지만, 매일 아침 인사하듯 들을 곡은 아니었다는 결론.
이번 글에서 이 곡을 계속 언급할 예정이라 이런 말하긴 조금 민망하지만, 지금 우울감에 젖어 있거나 마음이 힘든 분들은 굳이 찾아듣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특히 뮤직비디오는… 심리적인 문제로 고생하는 분들께 추천하지 않는다. 나도 이번 글을 쓰는 과정에서 처음 봤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기괴하고 피폐했다. 감상자에 따라 기분이 매우 가라앉거나 불안해질 수 있을 듯하다.
우울한 정도에 따라 음악을 듣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신나는 노래로 기분전환을 하거나, 무작정 밝은 노래를 틀기보다 자기 마음을 알아봐주는 것 같은 가사와 선율에 위로 받거나, 까딱하면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질까봐 노래를 아예 안 듣거나.
순간적인 우울감은 빠른 리듬감이나 밝은 멜로디로 털어내기 쉽다. 그러나 우울이 단문에서 장편소설처럼 길고 복잡하게 변하고 나면 그런 식의 처방은 외려 우울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럴 때는 차라리 비슷한 우울을 담은 곡이 위로가 된다. 나만 이런 건 아니라는 생각, 타인에 대한 공감은 견고한 고독감을 흐트러뜨리고 사람이 다시 앞으로 나갈 엄두가 나게 해 준다.
그런데 그때는 내 마음이 아마 훨씬 검고 깊었던가 보다. 나 지금 괴롭구나, 하고 내 마음을 돌아볼 여유 하나 없이, 내 내면이 어딜 봐도 못나다 느껴져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들춰보기 싫었을 만큼. 거의 모든 긍정적인 감정들이, 특히 밝은 기쁨과 행복감이, 나와는 동떨어진 세상의 일 같았다. 긍정적인 심상에 자극 받을 때마다 나는 소외감 내지는 자괴감을 맛봤다. 행복을 듣기가 힘들었다. 초대받지 못한 세상에 뚝 떨어진 미운 오리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짧으면 고작 3분 남짓한 노래 한 곡에 사람이 이렇게 가라앉는다는 사실에 나의 (자의적인) 결함 리스트가 또 한 줄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속을 들춰내고 싶지 않은데, 음악을 듣는 것도 엄연히 하나의 상호작용이라 자꾸만 내가 비춰졌다. 보고 싶지 않은데. 비춰지는 것마다 못나 보여서, 나는 정말 보기 싫은데.
돌이켜보면 내 안에는 외부의 밝은 것들에 조응할 것들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감정의 우물이 바닥을 보였다. 좋은 것에 ‘알맞게’-어떻게 보면 이것도 살짝 강박적이다- 반응할 수 있는 자산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계속 맞닥뜨릴수록 내가 초라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하여간 그래서 <Red Sex>쯤 되어야 내가 ‘안전하게’ 들을 수 있는 곡이었다. 내가 이 곡에서 얻은 것은 위로가 아니고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그나마 이걸 들을 땐 못난 생각은 안 든다는. 그것도 공감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글쎄.. 공감이라기엔 너무 방어적이고 얄팍한 조응이었다.
<Red Sex>의 음울함과 불안한 긴장감 안에 살포시 숨으면 내가 안 보였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숲의 나무 사이로 숨은 것 마냥. 그러니 이 곡은 안전했다. 적어도 내게는. 나는 이미 사람들 틈에서 탈진해 있었고, 나 자신과도 되도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어디선가 위안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위로받고 싶으면 의지해야 하고, 그러려면 내 상태를 표현해야 하는데 나는 말할 힘이 없었다. 애초에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모르겠다. 머릿속은 엉키고, 내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고, 그래서 자신을 들여다 볼 엄두도 점점 더 안 나고.
그때는 주변도 별 도움이 안 됐다. 그나마 없는 힘 쥐어짜서 나 아프다고 말하면 ‘너 그거 아니야’나 ‘괜히 그런다’ 같은 말을 들었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항상 잘 하잖아.’ 난 이 말이 제일 싫었다. 대부분 내가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잠깐 힘들어서 저런다고 믿고 싶은 건지, 그냥 관여하기 싫은 건지. 어쩌다 ‘다 그렇게 살아. 네가 그렇게 힘들 게 뭐 있는데’ 같은 말을 들으면 그냥 더 말할 의지가 사라졌다. 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남들이 내게 별 생각 없이 하던 말이 사실은 나 자신에게도 곧잘 하던 말이라, 혼자 있어도 상처입는 걸 피할 수 없었다. 그렇지, 나보다 힘든 사람 많지. 그러니까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나는 내 고통을 세상에 대어 재 보고 포기하듯 납득했다. 그러자 내 고통은 철없고 설익은 불평이 되고 나는 또 약하고 못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머리도 마음도 어딘가 축이 비틀려서 말로 정리할 수 없던 고통 그 자체를 폄하하니 이제 더 말로 꺼낼 필요도 없어보였다.
마음을 살펴보고 돌봐줘야 하는데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상담실에서 상담사 님 도움으로 겨우겨우 속엣말을 꺼내게 되면서 비로소 마음이 조금씩 보였다. 내가 제일 힘들다고 억지 부리며 남의 고통을 깔아뭉개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힘들다는 걸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는데.
나를 짓누르는 우울을 처리할 마음을 먹었어야 했다. 근데 그게 혼자 되면 우울증이 아니다. 게다가 이미 내 시각은 왜곡된 상태이므로 혼자서 우울을 들여다봤더라면 또 죽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았을 것이다. 다만 고통을 애써 축소하고 못 본 척 하느라 굽이진 길을 돌아온 시간이 안타깝다.
<Red Sex>를 차차 듣지 않게 되었는데 역시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상담 기간에 그 곡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 건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두서 없는 이야기라도 밖에 내어놓다 보면 잔뜩 엉킨 머릿속을 실타래처럼 풀어낼 실 한 가닥 잡아낼 수 있게 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