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a, <The Greatest>
지금은 자해보다 자살충동 자체가 더 심각한 사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10대 시절은 물론이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난 ‘실행’의 측면에 더 무게를 두었었다. 자살시도는 실제로 해 본 적 없지만 자해는 해 봤으므로 중학생 때의 심리상태가 더 위험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말 자살시도를 해 봤다면 아예 그런 저울질을 해 볼 시간조차 내게 없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그리고 극심한 우울증은-불행인지 다행인지- 자기를 직접 해할 기력조차 없는 상태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오히려 어느 정도 회복되어 기력을 찾았을 때 자신을 해할 의지가 생겨 더 위험해질 수 있다.) 아무튼 그런 사고 과정을 거쳐서, 내게 넘으면 안 되는 선은 자해행위였다. 기준을 그렇게 두니 내면의 자학은 거리낄 선이 없었다. 그렇게 무럭무럭 우울증이 자라났다. 적어도 자해는 안 하니까 난 아직 안전선 안에 있어. 그렇지만, 당장 내가 죽음을 생각할만큼 괴로운데 무엇을 위한 안전선이었을까?
당장 내가 괴로운데 무엇을 위한 안전선이었을까?
그렇게 눈을 가리고 지내다 우연히 들은 시아(Sia)의 노래 한 곡으로 인해 '이게 말로만 듣던 우울증인가 보다'라고 비로소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바로 조치를 취한 건 아니었다. 자기감정을 방치하는 사람의 습관이 어디 가겠는가? 그 노래를 듣고 엉엉 운 날 바로 신경정신과든, 상담실이든 찾아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랬을 리가. 그건 판타지나 다름없는 일이다. 아니면 영화 같은 일. 내 마음의 민낯을 보게 된 후, 나는 이걸 들키지 않겠다고 꼭꼭 숨기기 시작했다. 실제로 나는 한참 뒤에야 상담실을 찾았다. 그럼에도 내가 이 노래를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억하는 것은, 이 노래로 인해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프지 않다’는 믿음은 <The Greatest>에 가득한 생의 의지 속에서 철저하게 부서졌다.
내 속을 곪게 하지만 어쨌든 나를 지켜주던 환상이 없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방어막을 치우고 고통을 그대로 받기 시작하니까 너무 힘들었다. 상태를 직면했지만 바른 대처법은 몰랐던 나였기에, 우울증은 점점 악화되었다. 걷거나 먹는, 일상적인 움직임마저 힘겨워졌다. 자기 전에는 이대로 영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며 눈을 감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또 하루를 살아야 해서 눈물부터 났다. 우연히 찾아오는 죽음을 막연히 그리며 감각도 마음도 죽어갔다. 세상이 너무 무거웠다. 절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몇 해가 지난 지금, 나는 그때의 고통에 대해 시각을 조금 달리하게 되었다. 결국 언젠가는 터져야 했던 아픔이었다고. 자기 고통에 둔감하고, 뭔가가 날 상처 입히는 걸 알아도 그걸 놓기보다 감내하는 데에 에너지를 잘 쓰던 나. 그런 나였기에 아예 아픔이 내 전체를 덮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당장 죽을 만큼 힘든 게 아니었다면, 나는 하던 걸 다 그만두고 회복에 힘을 쏟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진짜 큰일 났을지도. 필요악 같은 ‘고통에의 직면’인 셈이다. 시아의 <The Greatest>는 내게 댐의 수문을 여는 버튼 같은 노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면서 들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기이하기까지 할 때는 다시금 시아의 <The Greatest> 가사를 검색해 읽었다. 옮겨 적기도 했다. 그러면 생채기 투성이였던 가슴이 비로소 아파 왔다. 아프면 그나마 살아있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인지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지만, 마음의 신경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그 감각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가사를 읽으면서, 나는 매번 조금씩 울었다.
결국은 살고 싶었던 것이다.
Uh-oh I need
another love be mine
Cause I I I got stamina
The greatest the greatest alive
The greatest the greatest alive
Sia, <The Greatest> 가사 중에서